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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출발 법회

불교신자로서의 효율적인 신앙생활 - 심오한 삶의 이야기를 밝혀내는 일은 부처님에게 맡겨두어야 합니다.

0 1,377 2017.09.26 07:36

‘해피스님의 마음이야기’ 두 번째 시간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어제부터 이어지는 이야기를 통해 심(心)-의(意)-식(識)이라는 세 가지 마음의 조건 관계와 종교에 대한 이해 그리고 삶과 행복의 실현에 대한 어렵다면 어려운 주제를 말하는 중입니다.


그렇다면 저는 왜 마음이야기의 시작에서 이런 어려운 주제를 선택한 것일까요?


사실 저의 의도는 한 가지입니다. 마음과 나 그리고 삶과 행복이라는 현실의 문제에는 쉽게 알기 어려운 심오한 영역이 있다는 점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 심오한 영역에 대해 각각의 종교는 각각의 해석을 제시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자기가 공감하고 동의하는 해석을 선택하여 삶의 기준으로 삼고 또한 그 해석을 선언한 분에 대한 신뢰를 일으켜 그 종교의 신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불교신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알기 어려운 심오한 영역에 대해 불교는 불교적 해석을 제시합니다. 이 해석에 공감하고 동의하는 사람 그리고 그 해석을 선언한 부처님에 대한 신뢰 즉 믿음을 일으킨 사람이 부처님의 제자라는 이름으로 불교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신자는 부처님이 선언한 해석에 대해 공감하고 동의하여 자기 삶의 기준으로 삼고 또한 그 해석을 선언한 부처님에 대한 신뢰 즉 믿음을 일으킨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면 저는 왜 이런 의도를 일으켰을까요? 불교 안에서 나타나는 효율적이지 못한 신앙생활을 지적하고, 불교신자로서의 효율적인 신앙생활의 필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특히 수행자를 중심으로 하는 많은 불교신자들이 심오한 영역에 대해 잘못 접근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어떻게 잘못 접근하나요? ‘마음의 실체를 알아보리라!’, ‘나는 누굴까?’, ‘나는 어디에서 왔으며, 죽은 뒤에는 어떻게 될까?’ 등의 문제의식을 공부라 해도 좋고 수행이라 해도 좋은 신앙생활의 중심에 두고 살아가는 분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들은 심오한 영역에 속하는 것입니다. 웬만해서는 그 답을 잘 드러내주지 않는 문제들인 것이지요. 그래서 평생을 이런 문제를 붙잡고 살아가도 올바른 답변을 찾아내기가 어려운 법이지요. 오히려 자기대로의 편견에 붙잡혀 잘못된 결론을 만들고는 그 결론에 다시 붙잡혀 불만족을 확대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될 가능성이 높은 것입니다.


주목해야 합니다! 만약에 이 사람이 깊은 공부과정을 통해 이런 문제들에 대한 바른 답을 찾아낸다면, 그 바른 답은 무엇일까요? 아시겠나요? 그렇습니다. 이 사람이 정말로 바른 답을 찾아냈다면, 그 결론은 바로 부처님이 해석하고 선언한 그 내용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 경전 읽고 가겠습니다. <웃띠야 경>에 나타나는 오직 부처님 가르침만이 실현 가능한 방법이라는 주제입니다. [배경 음악] 


“그러면 고따마 존자는 무엇을 설하십니까?”


“웃띠야여, 나는 실다운 지혜로 안 뒤에 제자들에게 법을 설하나니 그것은 중생들의 청정을 위한, 슬픔과 비탄을 건너기 위한, 고통과 고뇌를 사라지게 하기 위한, 방법을 얻기 위한, 열반을 실현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고따마 존자가 중생들의 청정을 위해, 슬픔과 비탄을 건너기 위해, 고통과 고뇌를 사라지게 하기 위해, 방법을 얻기 위해, 열반을 실현하게 하기 위해 실다운 지혜로 안 뒤에 제자들에게 설한 그 가르침으로 세상 사람들이 모두 열반으로 인도됩니까? 아니면 반입니까, 아니면 삼분의 일입니까?”


그때 아난다 존자는 웃띠야 유행승에게 이렇게 말했다. ㅡ “여래는 세상 사람들이 모두 열반으로 인도되거나, 반 혹은 삼분의 일이 그렇게 되는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여래는 ‘세상으로부터 열반으로 인도되었고 인도되고 인도될 자들은 모두 지혜를 무력하게 만드는 마음의 오염원인 다섯 가지 장애를 제거하고, 사념처(四念處)에 잘 확립된 마음으로, 칠각지(七覺支)를 있는 그대로 닦은 뒤에 비로소 세상으로부터 열반으로 인도되었고 인도되고 인도될 것이다.’라고 압니다.”


만약에 그의 결론이 부처님이 해석하고 선언한 그 내용과 다르다면, 그 결론이 바른 답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 경우에는, 그가 옳다면 부처님이 틀렸다는 논리가 성립하거든요. 부처님이 완전한 깨달음을 실현하신 분이고,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완전한 가르침이라는 사실 위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해야 합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무리 열심히 공부하고 수행해도 올바른 것인 한에는 부처님의 결론을 능가할 수 없다는 현실 위에서 현명한 분이라면 어떤 신앙생활을 선택해야 하는 걸까요? 어떤 신앙생활이 효율적이어서 나의 삶을 행복으로 이끌어 줄까요?


심오한 삶의 이야기를 밝혀내는 일은 부처님에게 맡겨두어야 합니다. 마음이 무언지, 나는 누군지, 산다는 것은 무엇이고 어떤 방법이 행복한 삶을 실현하는 실제적인 방법인 것인지 등의 문제에 대해서 스스로 결론을 만들려고 하지 않아야 합니다. 오직 부처님께서 완성하여 알려주신 그대로를 공감과 동의 그리고 신뢰로써 받아들이면 됩니다. 그래서 불교신자의 삶의 모범은 가르쳐주신 그대로를 ‘배워 알고, 아는 대로 실천하는 삶’입니다. 그러면 부처님께서 제시하신 그 행복한 삶은 나에게서 실현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앞에서 말한 ‘가르침의 위력’인 것이지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최선의 노력이 바르게 성과를 내었을 때 그 성과가 다른 사람에 의한 결과를 재현하는 것이라면, 평생의 노력은 헛수고가 됩니다. 최선의 노력에 의해 혹시 성공한다 해도 그것이 부처님의 결론을 재현하는 것에 불과하다면 그런 노력은 의미를 가지지 못합니다. 오직 완전한 깨달음, 완전한 스승이신 부처님에 대한 공감과 동의 그리고 신뢰 위에서 부처님에 의해 안내된 최선의 길을 따라 걸음으로써 그 결론의 연장선상에서 실현되는 행복한 삶에 빨리 도달하는 것이 옳은 방법인 것입니다. 이것이 불교신자의 효율적인 신앙생활이라고 해야 합니다.


이런 점은 불교적으로 삶을 완성한 아라한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도 타당성을 가집니다. 아라한은 번뇌를 완전히 부숨으로써 윤회하는 중생의 삶에서 벗어나 완전한 행복의 실현 즉 해탈을 성취한 완성된 성자를 말합니다. 그래서 부처님도 아라한인 것이지요. 이때, 부처님과 아라한을 구분하는 방법은 이렇습니다. 부처님은 스승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깨달음을 성취한 최초의 아라한이고, 다른 아라한들은 부처님이라는 스승에 의지하여 부처님이 제시해준 그 길을 뒤따라 실천함으로써 깨달음을 성취한 제자인 아라한인 것입니다. 


불교 안에서 완성의 자리, 깨달음을 실현한 아라한들도 자기의 길을 가려하지 않았다는 것은 주목해야 합니다. 오직 부처님에 의해 확인된 최선의 길을 뒤따라 걸음으로써 목적한 바 완전한 행복을 실현하는 것에 집중한 것이고, 그래서 현실적으로 성과를 낼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최초의 아라한인 부처님과 부처님을 뒤따라 깨달음을 성취한 제자인 아라한의 관계를 <정등각 경>을 통해 들어보겠습니다. [배경 음악]


"비구들이여, 여래·아라한·정등각은 오온을 염오하고 이탐하고 소멸하기 때문에 집착 없이 해탈한 정등각이라 불린다. 비구들이여, 지혜로 해탈한 비구도 오온을 염오하고 이탐하고 소멸하기 때문에 집착 없이 해탈하였다. 그래서 그는 지혜로 해탈한 자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여래·아라한·정등각과 지혜로 해탈한 자의 차이점은 무엇이고, 특별한 점은 무엇이고, 다른 점은 무엇인가?


비구들이여, 여래·아라한·정등각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도를 일으킨 분이고 아직 생기지 않은 도를 생기게 한 분이고 아직 설해지지 않은 도를 설하신 분이고 도를 아는 분이고 도를 발견한 분이고 도에 능숙한 분이다. 그리고 지금의 제자들은 그 도를 따라가면서 머물고 나중에 그것을 구족하게 된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여래·아라한·정등각과 지혜로 해탈한 자의 차이점이고, 특별한 점이고, 다른 점이다."


어떠세요? 눈이 좀 뜨이시나요? 부처님의 결론을 재현하려하는 어설픔, ‘어설픈 도인 흉내’ 내지 마시고 스승 잘 둔 제자들의 특권을 잘 활용해 효율적으로 행복한 삶을 실현하는 현명한 불교신자이기를 바라면서, 음악과 함께 잠시 쉬고 돌아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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