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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건에 따라 심(心)이라고도 의(意)라고도 식(識)이라고도 부르는 이것, 마음!」의 조건 관계

0 1,821 2017.09.26 07:38

‘해피스님의 마음이야기’ 두 번째 시간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어제 제기한 한 가지 문제에 대해 결론을 내야하는 시간인데요, 「조건에 따라 심(心)이라고도 의(意)라고도 식(識)이라고도 부르는 이것, 마음!」의 조건 관계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마음이 나 그리고 삶으로 연결되고, 행복의 지향이라는 방향을 가진다고 이야기 나누었는데요, 문제는 이 마음이 하나의 이름으로 통일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세 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어떤 마음이 어떤 방법으로 나와 삶 그리고 행복과 관계를 맺는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는 필요가 생겨난 것이지요.


누차 말씀드렸지만 마음에 대한 이런 이야기는 심오한 영역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려고 시도하지 않아야 합니다. 오직 부처님은 깨달음의 과정에서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고 어떤 결론을 주셨는지, 부처님 살아서 직접 설한 가르침을 통해 찾아내고, 배워 아는 일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경전이 설명하는 세 가지 마음의 조건 관계를 정리해 보겠는데요, 역시 삶 즉 마음이 몸과 함께 세상을 만나는 이야기 위에서 설명됩니다.


먼저 마음이 몸과 함께 세상을 만나는 이야기는 두 개의 영역으로 구분됩니다. 인식의 영역과 행위의 영역입니다. 세상이라는 대상을 인식해서 아는 과정과, 인식된 대상에게 행위하는 과정의 두 가지 영역으로 삶은 나누어 말할 수 있는 것이지요. 이때, 인식은 행위로 연결되고, 행위는 연속성을 가지고 다시 인식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주목해야 합니다! 인식도 마음의 몫이고, 행위도 마음의 몫입니다. 마음이 인식하는 일을 합니다. 또한 마음이 행위하는 일을 합니다. 마음은 이렇게 인식과 행위라는 내 삶의 두 영역의 주체입니다. 그런데 인식할 때의 마음과 행위할 때의 마음은 다릅니다. 각각이 다른 몸통으로 생겨나서 다른 이름을 가지고 다른 일을 하는 겁니다. 이런 형편에 의해서 이제 마음은 각각의 이름을 가지게 되는데, 인식하는 마음의 이름은 식(識)이고 행위하는 마음의 이름은 심(心)입니다. 


그렇다고 식(識)과 심(心)이 전혀 다른 남남은 아니라는 점도 이해해야 합니다. 심오한 공부의 영역에 속하는 설명은 생략하고 결론만 말씀드리면, 식(識)은 자기의 역할 즉 인식하는 일을 하는 과정에서 몸집을 부풀려서 심(心)이 됩니다. 인식하는 마음인 식(識)이 삶의 과정에서 몸집을 부풀려 심(心)이 되어서는 행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심(心)은 식(識)과 다른 것이지만 전혀 다른 것이 아닌, 단지 부풀려진 식(識)입니다. 인식하는 마음인 식(識)의 연장선상에서 부풀림의 과정을 통해 변화하고 행위하는, 다르지만 같음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는 마음이 심(心)이라는 것이지요. 


이렇게 식(識)과 심(心)은 삶의 과정에서의 역할을 조건으로 이름 붙여집니다.


• 경전 읽고 가겠습니다. ‘왜 식(識)입니까?’의 질문으로 식(識)의 두 단계 인식과정을 정의해 주는 <삼켜버림 경>과 <교리문답의 큰 경>입니다. [배경 음악] 


“비구들이여, 그러면 왜 식(識)이라 부르는가? ‘분별해서 안다, 분별해서 안다’라고 해서 식(識)이라고 한다. 그러면 무엇을 분별해서 아는가? 신 것도 분별해서 알고, 쓴 것도 분별해서 알고, 매운 것도 분별해서 알고, 단 것도 분별해서 알고, 떫은 것도 분별해서 알고, 떫지 않은 것도 분별해서 알고, 짠 것도 분별해서 알고, 싱거운 것도 분별해서 안다. 비구들이여, 이처럼 분별해서 안다고 해서 식(識)이라 한다."


“도반이여, ‘식(識), 식(識)’이라고 부릅니다. 도반이여, 왜 식(識)이라고 부릅니까?” “‘분별해서 안다, 분별해서 안다’라고 해서 식(識)이라고 부릅니다. 무엇을 분별해서 압니까? 즐겁다고 분별해서 알고, 괴롭다고 분별해서 알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다고 분별해서 압니다. 도반이여, 그래서 ‘식(識), 식(識)’이라고 부릅니다.”


한편, 삶을 구분하는 방법은 또 한 가지가 있습니다. 식(識)이든 심(心)이든 이 두 가지 마음이 몸과 함께하는 영역과 몸과 함께하지 않는 영역으로의 구분입니다. 그리고 몸과 함께할 때 마음은 의(意)라고 불립니다. 식(識)이어서 아는 일을 하던, 심(心)이어서 행위하는 일을 하던, 몸과 함께하는 영역에 있으면 의(意)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많이 알려져 있는 것으로의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와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의 자리입니다.


이때, 마음이 몸과 함께하는 의(意)의 영역은 삶의 이야기에서는 표면의 영역입니다. 그리고 몸과 함께하지 않는 영역은 심오한 내면의 영역입니다. 이때, 심오한 내면의 영역은 표면의 삶을 지배합니다. 내면에서 식(識)이 혼자 인식하고 심(心)이 혼자 행위한 결과가 표면으로 올라와 몸과 함께하는 의(意)의 영역에서의 인식과 행위를 지배한다는 것입니다. 불교가 내면의 관찰을 통한 삶의 향상을 추구하는 것은 바로 이런 관계 때문입니다. 표면의 삶을 지배하는 내면의 과정이 제어되지 않고는 삶의 향상 즉 행복한 삶의 실현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식(識) 또는 심(心)과 구분되는 마음의 또 하나의 이름인 의(意)가 정의됩니다. 그래서 마음은 이런 조건 관계에 의해서 심(心)이라고도 의(意)라고도 식(識)이라고도 불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각각의 마음이 각각의 방법으로 나와 삶 그리고 행복과의 관계를 맺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 경전 읽고 가겠습니다.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의 원인-조건으로 심(心)을 제시해 주는 <마할리 경>입니다. [배경 음악] 


"대덕이시여, 악업(惡業)을 짓고 악업을 행하는 데는 무엇이 원인이고 무엇이 조건입니까?”


“마할리여, 탐(貪)을 원인으로 탐(貪)을 조건으로 악업을 짓고 악업을 행한다. 마할리여, 진(嗔)을 원인으로 진(嗔)을 조건으로 악업을 짓고 악업을 행한다. 마할리여, 치(癡)를 원인으로 치(癡)를 조건으로 악업을 짓고 악업을 행한다. 마할리여, 비여리작의(非如理作意)를 원인으로 비여리작의(非如理作意)를 조건으로 악업을 짓고 악업을 행한다. 마할리여, 잘못 지향된 심(心)을 원인으로 잘못 지향된 심(心)을 조건으로 악업을 짓고 악업을 행한다. 마할리여, 악업(惡業)을 짓고 악업을 행하는 데는 이것이 원인이고 이것이 조건이다.”


"대덕이시여, 그러면 선업(善業)을 짓고 선업을 행하는 데는 무엇이 원인이고 무엇이 조건입니까?“

 

“마할리여, 무탐(無貪)을 원인으로 무탐(無貪)을 조건으로 선업을 짓고 선업을 행한다. 마할리여, 무진(無嗔)을 원인으로 무진(無嗔)을 조건으로 선업을 짓고 선업을 행한다. 마할리여, 무치(無癡)를 원인으로 무치를 조건으로 선업을 짓고 선업을 행한다. 마할리여, 여리작의(如理作意)를 원인으로 여리작의(如理作意)를 조건으로 선업을 짓고 선업을 행한다. 마할리여, 바르게 지향된 심(心)을 원인으로 바르게 지향된 심(心)을 조건으로 선업을 짓고 선업을 행한다. 마할리여, 선업(善業)을 짓고 선업을 행하는 데는 이것이 원인이고 이것이 조건이다.”


이때, 식(識)과 심(心)으로 직접 불릴 때는 몸과 함께하지 않는 상태이지만, 앞에서 알아본 ‘마음은 마음 자체로서는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는 것과는 다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몸과 마음이 함께한 것으로의 나의 삶이 있고, 이 삶의 과정에서 이 영역의 안에서 몸과 함께하지 않은 마음의 ‘생겨나고 활동하고 달라지는’ 독립적 과정이 설명되는 것이어서, 몸을 수반하지 않는 독립적인 마음의 설정과는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 마음에 대한 이런 이해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삶은 두 가지 방법으로 구분되는데, 인식과 행위로의 구분과 마음이 몸과 함께하는지 아닌지의 영역에 의한 구분입니다. 그런 가운데 인식하는 마음은 식(識)이고, 행위하는 마음은 심(心)입니다. 그리고 몸과 함께할 때는 의(意)입니다. 마음이 심(心)이라고도 의(意)라고도 식(識)이라고도 불리는 것은 바로 이런 조건 관계에 의해서입니다. 이것이 삶의 중심이 되는 마음으로는 한 가지이면서 이런 조건 관계에 따라 다르게 불리는 마음에 대한 이해입니다.


‘해피스님의 마음이야기’를 통해서 마음이야기를 하자고 했는데, 아이구! 마음이 세 가지나 있습니다. 어떤 마음을 어떻게 선택해서 마음이야기를 진행해야 하는지 막막한 가운데 마음이야기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마음이야기를 세 가지 이름을 가지는 하나의 마음에 대한 이해로부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의 과정을 통해 몸과 함께함으로써 의미를 가지는 마음과 그 마음이 몸과 함께 세상을 만나는 이야기로의 삶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이 이야기의 전개과정에는 마음이 몸과 함께하는 표면의 영역과 몸과 함께하지 않는 심오한 내면의 영역이 있고, 내면의 과정이 표면의 삶을 지배한다는 것까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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