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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출발 법회

바른 견해 - 저 세상 있음, 화생하는 중생 있음, 업에는 과와 보가 따름

0 1,158 2017.11.09 09:55

[ … ] 들으셨습니다. 토요일 밤, 삶에 대한 깊은 사색이 함께하는 부산불교방송 주말특집 해피스님의 마음이야기 함께하고 계십니다.


‘저 세상은 있다.’ ‘나는 윤회한다.’는 결론에 대한 확실한 동의의 필요성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그리고 삶에 대한 이런 시각을 견해라고 하고, 견해는 삶에서 생겨나는 다양한 이야기의 조건이 된다는 말씀까지 나누었습니다.


오늘 남은 시간의 이어지는 주제는 바른 견해입니다. 경전은 여러 가지로 바른 견해를 설명하고 있는데, 그 중 가장 원초적 형태의 바른 견해는 <빠야시 경>에서 제시됩니다. 이 경은 꾸마라깟사빠라는 스님과 빠야시 태수 간의 대화 기록인데, 그릇된 견해를 가진 빠야시 태수에게 꾸마라깟사빠 스님이 바른 견해를 설득시키는 내용입니다.


경은 「그 무렵에 빠야시 태수에게 '이렇게 저 세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화생(化生)하는 중생도 존재하지 않는다. 선행과 악행의 업들에 대한 과(果)도 보(報)도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이러한 사악한 나쁜 견해가 생겼다.」는 말로 시작하고, 꾸마라깟사빠 스님은 반복적으로 「태수여, 이러한 방법으로 '이렇게 저 세상이란 존재한다. 화생하는 중생도 존재한다. 선행과 악행의 업들에 대한 과(果)도 보(報)도 존재한다.'라고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라고 비유를 통해 설득합니다.


견해의 옳고 그름을 저 세상과 화생하는 중생 그리고 업(業)에 대한 과(果)와 보(報)의 유무로써 판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야기의 주제인 윤회 즉 저 세상 있음을 시작으로 화생(化生) 그리고 업(業)의 과(果)와 보(報)라는 연결된 개념을 제시하는 것이지요.


저는 이 바른 견해가 부처님이 가르쳐 주는 바른 견해 가운데 가장 원초적인 형태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세 살 어린아이도 알아야 하고 여든 어르신들께서도 놓치지 않아야 한다고 자주 말하곤 하는데, 그 의미를 알아보겠습니다.


먼저, ‘저 세상은 있다.’는 것은 몸이 죽어도 마음은 따라 죽지 못하고 새로운 몸과 만나 다음 생을 살아간다는 것 즉 중생인 우리는 윤회한다는 것입니다.


‘화생(化生)하는 중생이 있다.’는 것은 다시 태어남의 공간적 구성을 말해줍니다. 중생의 세상은 사생(四生) 즉 네 가지의 태어남으로 구성되는데, 태생(胎生)-난생(卵生)-습생(濕生)-화생(化生)입니다. 


이때, 바른 견해를 말하면서 화생(化生)의 존재를 지적하는 것은 태생(胎生)-난생(卵生)-습생(濕生)의 세 가지 태어남에 대해서는 의문이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있는지 없는지 따져보지 않아도 있는 줄 안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비해 화생(化生)하는 중생의 유무를 따지는 것은 이것이 ‘저 세상의 유무’처럼 스스로 보아 알 수 있는 것이 아닌 심오함의 영역, 종교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태생(胎生)-난생(卵生)-습생(濕生)의 세 가지 태어남과 화생(化生)은 무엇입니까? 태생(胎生)-난생(卵生)-습생(濕生) 즉 태로 태어나거나 알로 태어나거나 습기 가운데 태어난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생명을 의미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살아가는 가운데 보이는 생명들이니 인간과 짐승 세상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반면에 화생(化生)은 이 세 가지 눈에 보이는 생명이 아닌 다른 존재입니다. 화(化)해서 태어난다는 의미인데요, 눈에 보이는 생명이 아닌 존재이니 보이지 않는 생명들을 의미하는 것이겠지요. 부처님이 보아서 알려주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생명은 어떤 존재가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알고 계시는 대로 지옥과 아귀 그리고 하늘의 생명들이 있는 겁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생명들인 화생(化生)이 없다고 말하곤 하는데, 부처님은 직접 보아서 알려주는 것입니다. 화생(化生)하는 중생이 있다고요. 그럼으로써 중생들이 태어나 살아가는 세상은 지옥-짐승-아귀-인간-하늘의 다섯 가지 길로 구성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화생하는 중생을 포함한 오도윤회(五道輪廻) 즉 다섯 갈래의 윤회하는 세상을 말해주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저 세상은 있다.’에 이어 ‘화생하는 중생은 있다.’라는 말씀은 죽으면 다시 태어나야 하는데, 그 태어남의 자리가 이렇게 지옥-짐승-아귀-인간-하늘의 다섯 가지 길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어서 ‘선행과 악행의 업(業)들에 대한 과(果)도 보(報)도 존재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법우님, 이렇게 저 세상이 있어 윤회하는 것이고, 다시 태어나는 자리는 지옥-짐승-아귀-인간-하늘의 다섯 갈래가 있습니다. 그런데 법우님은 죽은 뒤에 어디에 태어나실 건가요? 혹시 지옥에 태어나실 건가요? 짐승이든 아귀든 삼악처(三惡處)라 불리는 저 힘든 세상에 혹시라도 태어나실 의향이 있으신가요? 


당연합니다, 법우님. 절대 지옥 가면 안됩니다. 짐승이든 아귀든 저 힘든 세상 삼악처에 떨어지면 안됩니다. 불교신자라면 당연히 하늘에 태어나야 하는 거고요, 혹시 부족하더라도 인간으로는 태어나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겠지요, 법우님?


맞습니다. 당연히 우리는 하늘에 태어나야 하고, 행여 부족하더라도 인간으로는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늘에 태어날 수 있을까요?


사실은 이 질문도 역시 스스로 보아 알 수 있는 것이 아닌 심오함의 영역, 종교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라고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선언을 필요로 하는 것이지요. 이제 부처님은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선행과 악행의 업(業)들에 대한 과(果)도 보(報)도 존재한다.’고 말해주는 것입니다.


농사를 지으면 흉작이든 풍작이든 결실이 있듯이, 행위 즉 업(業)에도 고(苦)든 락(樂)이든 과(果)와 보(報)가 따른다는 것입니다. 과(果)와 보(報)는 업(業)에 따르는 결실을 두 단계로 구분해 말하는 것인데, 다음 주에 말씀 나눌 업(業)에 대한 이야기에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어쨌든 업(業)에는 이렇게 과(果)와 보(報)가 따른다는 것이 부처님이 선언해 주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어떤 업을 짓느냐에 따라 어떤 과(果)와 보(報)가 뒤따를 것인지도 알려주는데, 나쁜 행위 즉 악업(惡業)에는 괴로움의 과(果)와 보(報)가 따르고, 착한 행위 즉 선업(善業)에는 행복의 과(果)와 보(報)가 따른다는 것입니다.


이제 이 세 가지 바른 견해는 하나의 의미로 연결됩니다. 저 세상이 있어서 죽으면 새로운 몸과 함께 다시 태어남 즉 윤회해야 하는데, 태어남의 자리는 지옥-짐승-아귀-인간-하늘의 다섯 갈래가 있고, 악업(惡業)을 지으면 괴로움의 과(果)와 보(報)가 뒤따라 지옥-짐승-아귀의 삼악처에 태어나게 되고, 선업(善業)을 지으면 행복의 과(果)와 보(報)가 뒤따라 인간 또는 하늘에 태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빠야시 경>이 알려주는 가장 원초적인 바른 견해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살아서도 행복하고 죽어서는 더 좋은 태어남이 이어지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부처님이 알려주는 이 기준, 바른 견해를 갖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행복의 과(果)와 보(報)를 부르는 선업(業)을 지어 하늘 세상에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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