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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출발 법회

새출발법회 4주차 ㅡ 행위의 중심은 현재에 두어야 합니다. 그러나 눈은 미래를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0 1,338 2017.08.03 21:03

[동영상] ☞ https://youtu.be/3W0pH_T7Zw0 

 

쉽지만 어긋남이 없는 공부를 위해 해피법당이 개설하는 새출발법회 네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이런 말씀으로 공부를 시작하려 합니다. - 「행위의 중심은 현재에 두어야 합니다. 그러나 눈은 미래를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이런 말씀입니다. 과거의 연장선에 현재가 있고, 현재는 다시 미래를 향해 멈추지 않고 달려갑니다. 시간과 그 위에 펼쳐지는 우리의 삶은 이렇게 과거-현재-미래로 이루어집니다. 이때,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과거는 결정되었고 미래는 결정되지 않은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과거는 이미 만들어진 것이고 미래는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여기에 현재가 행위 즉 업이라는 이름으로 작용합니다. 그래서 과거에 현재를 더해 미래를 만든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의 삶에서 나의 미래를 내가 스스로 창조해 간다는 것입니다.

 

 

또한, 앞으로 진행할 업에 대한 공부에 의하면, 과거와 현재의 관계는 이렇게 말해집니다. - 「과거는 작은 것입니다. 현재는 큰 것입니다. 과거는 작은 것이고 현재는 큰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거의 연장선 위에서 미래를 향해 달려가는 엔진이라고 할까요, 행위의 중심을 두어야 하는 현재는 이렇게 큰 것인데 눈이 미래를 놓치면 눈앞의 달콤함을 좇는데 급급해 행위는 커다란 위험을 부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말하는 것입니다. 눈은 미래를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자, 오늘 뜬금없이 과거-현재-미래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사실은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우리가 요즘 세상을 보는 바른 시각 즉 정견(正見)을 주제로 공부하고 있는데요, ‘①저 세상은 있다, ②화생하는 중생은 있다, ③선악의 행위에는 과와 보가 있다.’의 세 가지를 기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난 한 주 동안 이 주제와 관련한 두 가지 에피소드가 있어서 이렇게 시작하였습니다.

 

 

첫 번째 에피소드, 어떤 법회 동영상에서 한 사람이 물었습니다. - ‘스님, 저 세상이 있습니까?’ 스님의 답변 - ‘있으면 어떻고 없으면 어떻습니다. 지금 살기도 여유롭지 못한데 왜 죽은 다음 이야기까지 보태서 고민을 합니까? 그저 지금 잘 살면 됩니다. 그러면 저 세상이 없으면 지금 잘 사는 거로 족하고, 저 세상이 있으면 지금 잘 산 힘으로 좋은 데 가겠지!’

 

 

우레 같은 박수가 뒤따르는 멋진 답변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지금 잘 살면!’이라고 그 스님은 답변하셨지만,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일까?’의 질문을 다시 해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간 공부하였지만, 저 세상이 있을 경우와 없을 경우의 잘 사는 법을 다르게 보아야 하기 때문에, 경우를 고려하지 않은 채 ‘잘 살면 돼!’라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불교적으로는 이 질문에 어떻게 답해야 할까요? 당연합니다. 저 세상은 있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묻겠지요. ‘그걸 어떻게 믿습니까?’

 

 

경전 말씀을 한 가지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시하 경(A5:34)>입니다.

 

 

한때 세존께서는 웨살리에서 큰 숲의 중각강당에 머무셨다. 그때 시하 대장군이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절을 올리고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시하 대장군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지금여기서 스스로 보아 알 수 있는 보시의 결실을 천명하실 수 있습니까?"

 

 

"천명할 수 있다, 시하여."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시하여, 보시를 행하는 보시의 주인을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고 마음에 들어 한다. 시하여, 보시를 행하는 보시의 주인을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고 마음에 들어 하는 이것이 지금여기서 스스로 보아 알 수 있는 보시의 결실이다.

 

 

다시 시하여, 보시를 행하는 보시의 주인을 선하고 참된 사람들이 가까이한다. 시하여, 보시를 행하는 보시의 주인을 선하고 참된 사람들이 가까이하는 이것도 지금여기서 스스로 보아 알 수 있는 보시의 결실이다.

 

 

다시 시하여, 보시를 행하는 보시의 주인에게는 좋은 명성이 따른다. 시하여, 보시를 행하는 보시의 주인에게 좋은 명성이 따르는 이것도 지금여기서 스스로 보아 알 수 있는 보시의 결실이다.

 

 

다시 시하여, 보시를 행하는 보시의 주인은 끄샤뜨리야의 회중이나 바라문의 회중이나 장자의 회중이나 사문의 회중이나 그 어떠한 회중에 다가가더라도 담대하고 기죽지 않고 다가간다. 시하여, 보시를 행하는 보시의 주인이 끄샤뜨리야의 회중이나 바라문의 회중이나 장자의 회중이나 사문의 회중이나 그 어떠한 회중에 다가가더라도 담대하고 기죽지 않고 다가가는 이것도 지금여기서 스스로 보아 알 수 있는 보시의 결실이다.

 

 

다시 시하여, 보시를 행하는 보시의 주인은 몸이 무너져 죽은 뒤 좋은 곳[善處]에 태어난다. 시하여, 보시를 행하는 보시의 주인이 몸이 무너져 죽은 뒤 좋은 곳[善處]에 태어난다는 이것은 내생의 보시의 결실이다."

 

 

이렇게 말씀하셨을 때 시하 대장군이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말씀하신 지금여기서 스스로 보아 알 수 있는 네 가지 보시의 결실에 대해서는 단지 세존에 대한 믿음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저 자신도 또한 이 네 가지를 알고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보시를 행하는 보시의 주인인 저를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고 마음에 들어 합니다. 세존이시여, 보시를 행하는 보시의 주인인 저를 선하고 참된 사람들이 가까이합니다. 세존이시여, 보시를 행하는 보시의 주인인 제겐 좋은 명성이 따릅니다. 세존이시여, 보시를 행하는 보시의 주인인 저는 끄샤뜨리야의 회중이나 바라문의 회중이나 장자의 회중이나 사문의 회중이나 그 어떠한 회중에 다가가더라도 담대하고 기죽지 않고 다가갑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말씀하신 지금여기서 스스로 보아 알 수 있는 네 가지 보시의 결실에 대해서는 단지 세존에 대한 믿음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저 자신도 또한 이 네 가지를 알고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나 세존께서 '시하여, 보시를 행하는 보시의 주인은 몸이 무너져 죽은 뒤 좋은 곳[善處]에 태어난다.'라고 말씀하신 것에 대해서는 제가 알지 못합니다. 이 점에 대해서 저는 세존에 대한 믿음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하다, 시하여. 참으로 그러하다, 시하여. 시하여, 보시를 행하는 보시의 주인은 몸이 무너져 죽은 뒤 좋은 곳[善處]에 태어난다."

 

 

시하 대장군과의 대화를 통해 지금여기서 스스로 보아 알 수 있는 보시의 결실을 설하는 경은 <시하 경(A7:54)>에서는 다른 측면으로 일곱 가지를 설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경을 통해 이런 가르침을 발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보시라는 공덕행을 통해 지금여기서 스스로 보아 알 수 있는 보시의 결실을 묻는 시하에게 부처님은 몇 가지 지금여기서 스스로 보아 알 수 있는 보시의 결실에 더해 죽은 뒤 좋은 곳[善處]에 태어난다는 내생의 보시의 결실을 말해 주고, 시하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에 대해서 스스로 확인하여 알지 못하는 점에 대해서는 부처님에 대한 믿음으로 받아들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교신자가 부처님 가르침을 대하는 자세입니다. 지혜 부족하여 부처님에게서 지혜로운 삶을 안내 받고자 하는 사람이 불교신자라고 할 텐데요, 그런 불교신자가 스스로 확인할 수 있는 것만 믿고자 한다면 부처님에 의해 안내되는 더 높은 삶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일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시하 경은 참으로 불교신자의 바른 자세를 안내한다고 하겠습니다. -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에 대해서 스스로 확인하여 알지 못하는 점에 대해서는 부처님에 대한 믿음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님, 저 세상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불교적으로는 당연히 ‘저 세상은 있습니다.’라고 답변해야 하고, ‘그걸 어떻게 믿습니까?’라는 질문이 이어질 때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근거로 제시해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요즘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바른 견해인 거지요.

 

 

두 번째 에피소드, 며칠 전 우리 카페에 가입인사를 하신 법우님이 계세요. id를 ‘다음생에’로 쓰시더라고요. 다른 법우님이 ‘다음 생이 있다고 믿는 것이 정견이지요. 바른 견해를 가지신 분의 입장을 환영합니다.’라고 인사하셨는데, 제가 한 마디 더 보태었습니다. - 「그러나 금생에 중심을 둔 삶이어야 할 것입니다. 가르침에 따라 지금을 현명하게 살아갈 때 금생의 행복과 더 좋은 다음 생이 연결되는 것이지요. 해피[解彼 & happy] 하시기 바랍니다!」

 

 

이 두 가지 에피소드에서 저는 과거-현제-미래의 연결된 삶 가운데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생각해 보게 된 것입니다.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는 현재를 중심에 둔 삶을 강조했다고 할 수 있고,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는 미래에 대한 바람을 중심에 두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거지요. 그러나 미래를 놓친 현재는 브레이크 없는 기관차와 같아서 어떤 과(果)와 보(報)를 초래할지 장담할 수 없는 것이고, 현재가 굳건히 받쳐주지 않는 미래는 꿈속에서나 만나질 수 있는 동화 속 이야기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위험이 함께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오늘 공부를 이렇게 시작한 것입니다. - 「행위의 중심은 현재에 두어야 합니다. 그러나 눈은 미래를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그 가운데 삶의 중심인 현재에 대해서 「과거는 작은 것입니다. 현재는 큰 것입니다. 과거는 작은 것이고 현재는 큰 것입니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불교가 적극적-긍정적-능동적 삶을 제시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인데요, 그 중심에 ‘현재’가 있다는 것을 이렇게 알아보았습니다.

 

 

유사한 이야기로, 경전은 소원이 있다면 그 소원이 이루어질 수 있는 이치에 맞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알려주는데, 행위가 만들어내는 미래를 과(果)와 보(報)의 법칙성이라는 이치 위에서 바라보고 스스로 방향타의 역할을 해내어야 노력이 소원을 이루어내게 된다는 의미라고 할 것입니다. 물론 이치에 맞다는 것은 당연히 세상을 보는 바른 시각 즉 정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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