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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상의 대화 - 어떤 분의 글[육도윤회설은 불설이 아니다]

0 1,109 2017.12.02 11:07

편안한 휴일 저녁 즐기고 계시나요? 지금 법우님께서는 부산불교방송 주말특집 해피스님의 마음이야기 네 번째 시간을 함께하고 계십니다. 오늘 이야기는 얼마 전 인터넷에서 있었던 어떤 분과 저의 글 대화로 시작하는데요, 인터넷 상에 올려진 글이라 좀 투박하지만 다듬지 않고 그대로 소개해 드립니다. 

 

! 어떤 분의 육도윤회설은 불설이 아니다.’라는 제목의 글입니다. 

 

행복을 느끼는 마음이 천상이라면 불행을 당하는 그 마음은 지옥에 머무는 것이다. 마음이 닫혀 있으면 지옥이요, 열려 있으면 천국이다. 사람이 살아 있는 한 언제나 오늘이다. 

 

최초의 리그베다 성립을 기원전 1200년에서 1000년으로 볼 때 그 시기를 전후해서 등장한 게 윤회설의 민간신앙으로 추정한다. 윤회설에 대한 처음의 형태는 조상에 대한 제사로부터 비롯되었다. 사람이 죽으면 조상의 나라에 가서 태어나는데 그것을 '피트리'라고 불렀다. 조령이란 의미이고 최초의 2도 윤회설이다. 그러다가 피트리가 되기 이전에 '프레타'라는 중간 단계가 있다고 믿기에 이른다. '프레타'는 요즘 용어로 중음신이나 아귀에 해당되며 이것이 3도 윤회설이다. 기원전 500년쯤 해서 3도 윤회가 발전해 축생과 지옥이 문헌상에 등장하고 그 뒤에 아수라가 추가되어 육도가 된다.

 

불교의 원시경전인 "상응부경전"이나 "아함경" 등에도 윤회설에 대한 언급이 없다. 영혼 문제에 대해서도 침묵하고 있을 뿐이다 

 

-중부경전 속의 바차고타화유경- 

 

부처님이시여, 당신의 제자들이 해탈을 이루어 죽었을 때 그들은 어디에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까?”

 

바차고타여, 어디에 가서 다시 태어난다든지 태어나지 않는다든지 하는 것은 문제의 핵심에서 벗어난 생각이다. 바차고타여, 지금 그대 앞에서 불이 타고 있다고 생각하자. 불은 무엇이 있기에 타고 있는가?” 

 

그것은 나무가 있기 때문에 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이번에 그 불이 꺼졌다고 생각하자. 왜 불이 꺼졌겠는가?” 

 

나무가 다 탔기 때문에 불이 꺼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차고타여, 그 불은 꺼져서 어디로 갔다고 생각하는가?” 

 

부처님이시여, 그 물음은 이상합니다. 꺼진 불은 어디로 갔느냐는 물음은 빗나간 질문이 아닐는지요?” 

 

부처님은 빙그레 웃고 계셨다. 바차고타도 자신의 물음에 모순됨이 있었음을 인정하고 크게 기뻐하였으며,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부처님이시여, 참으로 당신은 위대하십니다. 부처님께서는 온갖 방편으로 진리를 환히 밝혀 주시나니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결론적으로 명쾌하게 밝히지만 윤회는 당생 윤회요, 생각의 윤회일 뿐 영혼 따위는 없는 것이다. 논리적으로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상호 연계작용으로 생주이멸과 성주괴공이 되풀이 될 따름이다. 

 

어떤 분의 육도윤회설은 불설이 아니다.’라는 제목의 글인데요, 언뜻 보면, ‘정말로 부처님은 윤회를 말씀하지 않으셨구나.’라고 생각하게 하는 글입니다. 심지어는 윤회하지 않음에 대한 동의를 미소지음을 통해 칭찬하기까지 한다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심오한 영역에 속하는 주제를 언급하고 있는 이런 글은 자세히 보아야 합니다. 사실일까 아닐까, 부처님은 정말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일까, 깊이를 가지고 접근해야 낭패를 면할 수 있습니다. 

 

그 어떤 분은 원시경전에 윤회설에 대한 언급이 없다고 말하지만, 경전을 공부해보면 사실이 아닙니다. 부처님은 삶의 현실에 대한 통찰을 통해 윤회의 과정에 수반하는 괴로움을 자각하고, 그 윤회에서 벗어나기 위해 모든 법을 설하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특히, <시작을 알지 못함 상윳따(S15)>의 경우는 아예 무명에 덮히고 갈애에 묶인 중생에게 윤회의 시작점은 드러나지 않는다.’는 말씀으로 설해진 20개의 경전이 모아져 있습니다. 그리고 수행을 설명하는 많은 경전들은 수행이 높아지면 전생을 기억하는 숙명통(宿命通)과 죽어서 업에 의한 태어남을 직접 보는 천안통(天眼通)을 얻을 수 있게 된다고 말해줍니다. 삶의 향상 과정에서 윤회의 현실을 과거로부터 현재에까지 직접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좀 더 포괄적 의미로 말하면, 부처님이 설한 모든 가르침, 모든 경전이 윤회하는 삶의 현실에 대한 자각과 윤회해야 하는 중생의 삶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을 설하는 것이고, 또한, 벗어나기 이전 중생으로의 삶의 과정에서라도 갈수록 괴로움은 줄어들고 행복은 늘어나게 사는 방법을 설하는 것이라고 말해야 가르침에 대한 올바른 이해라고 할 것입니다. 

 

그 어떤 분은 또 부처님이 영혼 문제에 대해 침묵하고 있을 뿐이라고 말하지만, 부처님 가르침은 그 영혼이라고 불리는 것의 통찰을 통한 부정을 근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무아(無我)의 가르침인 것이지요. 어리석은 사람들이 삶의 중심에 있는 그것을 영혼이라고 말하면서 붙잡고 살고 있는 한 그것은 괴로움을 만들고, 현명한 사람들이 그것이 영혼이라는 실체가 아니라 조건들의 결합에 의해 생겨난 것이라고 보아서 붙잡지 않고 놓아버림으로써 괴로움을 소멸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르침의 중심을 설하는 많은 경전들을 통해 그것이 사실 아님을 밝혀주는 것이지 부처님은 결코 영혼에 대해 침묵하지 않습니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저는 이 글에 대한 반대의 글을 적었는데요, 음악 듣고 와서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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