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불교입문 > 새출발 법회 > 해피스님의 마음이야기

새출발 법회

인터넷 상의 대화 - 저의 답변[거짓에 떨어지지 않아야] & 단견-상견-연기

0 1,091 2017.12.02 11:09

[ … ] 들으셨습니다. 일요일 밤, 부처님 살아서 직접 설한 가르침과 함께하는 부산불교방송 주말특집 해피스님의 마음이야기 함께하고 계십니다.


자, 앞에서 그 어떤 분의 글에 대해 제가 반대의 글을 적었다고 하였는데요,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부처님은 지옥-축생-아귀-인간-천상의 오도윤회를 말합니다. 아무개란 분이 힌두교 이야기는 잘 아시나 본데 불교는 잘 모르시는 것 같군요. 부처님 살아서 직접 설한 가르침[율장과 4부 니까야]는 명색(名色)[쉽게는 몸이라고 이해]와 서로 조건 되지만 몸이 죽어도 따라 죽지 못하는 식(識)이 해탈할 때까지 삶을 반복해야 하는 것으로의 윤회를 토대로 하여 설해지고 있습니다. 경전은 심지어 이 식(識)이 어떻게 생겨나서 지금을 살고는 머물러 쌓임을 통해 변화하는지를 상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몸이 죽으면 따라죽지 못하고 다음 생을 이어 살아야 하는 이유도 물질에 종속되지 않는 마음의 특성 때문이라고 알려줍니다.


불교신자라면 다른 가르침에 해박하기에 앞서 부처님 가르침에 해박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공부가 필요하고 법회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참고로 아무개님이 예로 드신 경전은 우리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해탈한 자의 태어남에 대한 질문에 부처님이 답하신 내용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윤회하는 중생인 우리의 삶과 윤회에서 벗어남을 실현한[해탈] 아라한을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이 <왓차곳따 불 경(M72)>에서, 마음이 해탈한 비구는 어디에 태어나느냐고 묻는 왓차곳따 유행승에게 부처님은 ‘연료를 조건으로 타올랐고, 그 연료를 다 써버리고 더 이상 다른 연료를 공급받지 못하면 연료가 없어서 꺼졌다고 한다.’는 불의 비유에 이어 이렇게 설합니다. ㅡ “왓차여, 참으로 그와 같다. 사람은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 오온(五蘊)으로써 여래를 묘사하면서 묘사를 시도하지만 여래는 그 오온(五蘊)을 제거했고, 그 뿌리를 잘랐고, 윗부분이 잘린 야자수처럼 만들었고, 멸절시켜, 미래에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끔 하였다. 왓차여, 여래는 오온(五蘊)이라는 이름에서 해탈하여 심오하고 측량할 수 없고 깊이를 헤아릴 수 없나니 마치 망망대해와도 같다. 그에게는 '태어난다.'라는 말이 적용될 수 없고. '태어나지 않는다.'라는 말이 적용될 수 없고, '태어나기도 하고 태어나지 않기도 한다.'라는 말도 적용될 수 없고, '태어나는 것도 아니고 태어나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는 말도 적용될 수 없다.”


그렇다면 아무개님은 번뇌 또는 무명과 갈애라는 연료를 공급받고 있는 중생인 우리의 삶에 연료의 공급을 완전히 차단한 부처님 또는 아라한의 경우를 적용시켜 말하면서 윤회 없음에 타당성을 부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아님 즉 거짓인 것이지요.


한편, 윤회와 관련해서는 윤회 없음을 말하는 단견(斷見)[유물론(唯物論)]과 아뜨만의 윤회를 말하는 상견(常見)[힌두교] 그리고 이 두 가지 삿된 견해를 모두 극복한 것으로의 연기(緣起) 즉 삶의 과정을 통해 변화하는 식(識)[무아(無我)]에 의한 윤회가 있습니다. 당연히 세 번째가 부처님 가르침이고 정견(正見)입니다.」


여기까지가 그 어떤 분의 글에 대해 제가 적은 반대의 글입니다. 어떻습니까? 자세히 보면 다르지요? 윤회라는 이 중요하고 심오한 주제를 말하면서 부처님 가르침을 공부하지 않고 판단하거나, 부처님 가르침을 왜곡 적용하면 이렇게 전혀 엉뚱하고 사실이 아닌 거짓의 결론이 만들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자, 이제부터는 저의 반대의 글에 포함된 「윤회 없음을 말하는 단견(斷見)[유물론(唯物論)]과 아뜨만의 윤회를 말하는 상견(常見)[힌두교] 그리고 이 두 가지 삿된 견해를 모두 극복한 것으로의 연기(緣起) 즉 삶의 과정을 통해 변화하는 식(識)[무아(無我)]에 의한 윤회」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먼저 윤회 없음을 말하는 단견(斷見)[유물론(唯物論)]입니다. 유물론, 무엇인가요? 모든 존재는 물질을 근원으로 한다는 의미 정도로 말할 수 있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에 의하면, 유물론(唯物論)[materialism]은 「물질을 제1차적·근본적인 실재로 생각하고, 마음이나 정신을 부차적·파생적인 것으로 보는 철학설」이라고 요약됩니다. 나를 구성하는 몸과 마음 가운데 물질인 몸은 제1차적 존재이고, 마음은 몸에서 부차적으로 생겨나는 제2차적 존재라고 정의하는 철학적 사고입니다. 


그렇다면 유물론의 입장에서 마음은 몸을 토대로 생겨나는 것입니다. 비록 살아가는 동안에는 주인인체 몸을 끌고 살아가지만, 몸이 죽으면 토대를 상실한 마음은 설 자리가 없어서 소멸하고 만다는 주장입니다. 


이렇게 유물론적, 몸이 죽으면 마음도 소멸하고 마는 것, 몸의 죽음과 함께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되어 존재를 이어가지 않는 것. 나와 삶 그리고 세상에 대한 이런 견해를 단견(斷見) 또는 단멸론(斷滅論)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뜨만의 윤회를 말하는 상견(常見)[힌두교]는 무엇인가요? 힌두교의 전신이라고 해야겠지요, 브라만교는 창조주 하나님 브라흐마를 설정합니다. 그는 생겨나지 않은 존재이면서 모든 것을 창조한 창조주인데요, 창조의 작업을 마치고 난 후에는 자기 몸을 창조된 것들 즉 피조물수로 나누어 피조물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래서 창조된 모든 존재의 안에는 브라흐마의 분신이 있어서 주인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브라흐마의 분신을 힌두교 경전언어인 산스끄리뜨는 atman이라 부르고, 불교 경전어인 빠알리는 attan이라고 부릅니다. 중국에서 아(我)라고 번역하였고, 일반적으로 자아(自我)라고 불리는 그것입니다.


그렇다면 아(我)는 창조주 하나님 브라흐마의 분신입니다. 신(神) 자체이어서 신의 특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습니다. 자아이기 때문에 조건의 변화에 영향 받지 않고, 조건의 변화 때문에 불만족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어떤 조건 하에서도 오염되지 않아 깨끗함의 상태를 유지합니다. 상락아정(常樂我淨)이라고 부르는 아(我)의 특성입니다.


이런 자아는 몸과 함께 살다가 몸이 죽으면, 몸의 죽음이라는 조건의 변화에 영향 받지 않습니다. 옷이 낡으면 새 옷으로 갈아입듯이, 몸이 죽으면 새 몸으로 갈아입으면 됩니다. 그래서 죽는다고 해도 자아는 항상함 가운데 자기 상태를 유지하면서 새로운 몸으로 다음 생을 삽니다.


이렇게 자아가 자기 상태를 유지하면서 새로운 몸과의 만남 즉 몸을 바꿔 다음 생을 이어간다는 주장을 상견(常見) 또는 상주론(常住論)이라고 합니다.


어떻습니까? 이 두 가지 견해가 사실인 것으로 다가오나요? 아니면 사람들에 의해 설정된 것일 뿐 사실과는 다른 것으로 다가오나요?


그렇습니다. 부처님에 의하면, 이 두 가지 견해는 사실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삶의 현실을 통찰하지 못하다보니 이런 방법으로 설정하고 믿고 있을 뿐이지 내 삶이 이렇게 단멸(斷滅)하거나 상주(常住)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부처님은 내 삶의 현실을 어떻게 알려줍니까? 불교교리의 핵심을 이루는 어려운 이야기여서 결론만 간략히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조건 경(S12:20)>에서 부처님은 연기(緣起)를 설명합니다. 「생(生)을 조건으로 노사(老死)가 있다 ~ 무명(無明)을 조건으로 행(行)이 있다.」라고 하여 십이연기(十二緣起)의 모든 지분[무명(無明)-행(行)-식(識)-명색(名色)-육입(六入)-촉(觸)-수(受)-애(愛)-취(取)-유(有)-생(生)-노사(老死)]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이때, 연기(緣起)는 「진실함, 거짓이 아님, 다른 방법에 의하지 않음, 이것의 조건 짓는 성질, 이것을 일러 연기라 한다.」라고 정의되고, 연기된 것들로는 십이연기의 열두 지분을 설명입니다.


경은 이러한 연기와 연기된 것들을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 잘 보기 때문에 과거-미래-현재에 걸쳐 나의 존재와 관련한 어떤 의문에도 빠지지 않는다고 알려줍니다. 즉 십이연기(十二緣起)가 설명하는 방식에 의해 아뜨만 아닌 식(識)이 변화의 과정으로 연결되기 때문에 상견(常見)도 아니고, 그러나 그런 식(識)의 연결에 의해 윤회하기 때문에 단견(斷見)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부처님은 삶의 현실에 대한 통찰에 의해서 십이연기적 삶의 과정에 의해 자아(自我)아닌 것으로의 식(識)이 변화 가운데 윤회한다고 알려줍니다. 이렇게 삶의 과정을 지혜로써 잘 보면 단견이든 상견이든 어떠한 견해와 마주쳐도 의문에 빠지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필요한 것이 한 가지 있음을 알겠습니다. 공부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잘 배워 아는 일입니다. 단견(斷見)도 상견(常見)도 아닌 연기(緣起) 곧 십이연기(十二緣起)를 잘 배워 알면 삶에 대한 의문이 없어집니다. 윤회 없음의 거짓된 견해와 아뜨만의 몸 바꾸는 윤회라는 거짓된 견해에 흔들리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 위에 아는 대로 실천하면, 십이연기의 과정에서 생겨나는 괴로움은 소멸하고 행복한 삶이 실현되는 것입니다. 그 끝에 윤회에서 벗어남 즉 깨달음이 있는 것입니다.


부산불교방송 주말특집 해피스님의 마음이야기는 이렇게 윤회에 대한 부처님의 입장을 분명히 전달하고 있습니다. 음악 듣고 계속하겠습니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