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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출발 법회

식의 윤회의 근거 - 육계 & 갈애멸진의 큰 경

0 1,302 2017.12.02 11:14

[ … ] 들으셨습니다. 일요일 밤, 삶에 대한 통찰이 함께하는 부산불교방송 주말특집 해피스님의 마음이야기 함께하고 계십니다.


이제 윤회에 대한 오늘 이야기를 마무리해야 할 시간입니다. 이 주제에 대한 확신과 정확함을 제공해 주는 경전 몇 가지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먼저 <요소의 분석 경(M140)>에서 부처님은 「땅의 요소, 물의 요소, 불의 요소, 바람의 요소, 공간의 요소, 식의 요소가 있다. ‘사람은 여섯 가지 요소로 이루어진다.’라고 가르친 것은 이것을 두고 말한 것이다.」라고 합니다. 사람을 구성하는 제1차적 존재를 지(地)-수(水)-화(火)-풍(風)-공(空)-식(識)의 육계(六界)로 제시하는 것입니다. 


지수화풍(地水火風)이 사대(四大)라고 부르는 물질 요소라는 것은 다들 아시는 내용일 겁니다. 이때, 공(空)은 사대(四大)와 함께하여 물질을 규정해주는 역할을 하는 요소입니다. 예를 들면, 얼굴 중심에 코가 있는데, 코라는 것은 사대로 구성된 적절한 살점을 바깥에서 둘러싸고 있는 공간과 콧구멍이라는 안쪽의 공간이 함께함으로써 코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만약 콧구멍이 없다면 그 살점은 코가 아니라 혹이라고 불릴 것입니다. 이렇게 공(空)은 사대(四大)와 함께하여 물질을 규정해 주는 요소입니다. 그래서 지(地)-수(水)-화(火)-풍(風)-공(空)의 다섯 가지 요소는 물질의 요소입니다. 


아마도 인도적 유물론이 있다면 지(地)-수(水)-화(火)-풍(風)-공(空)의 다섯 가지 요소만을 제1차적 요소라고 정의할 것입니다. 그래서 단견(斷見)을 주창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부처님은 여기에 한 가지 요소를 더 제시하는 것입니다. 식(識)입니다. 식(識)이라는 마음을 물질요소인 지(地)-수(水)-화(火)-풍(風)-공(空)과 대등한 제1차적 요소로 정의하는 것입니다. 


주목해야 합니다! 몸이 죽어도 마음이 따라 죽지 않고 새로운 몸과 함께 새로운 삶을 이어가게 되는 것은 바로 이렇게 식(識)이 물질에 종속되지 않은, 대등한 제1차적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단견(斷見)을 부정하고 윤회한다고 말하는 데는 이렇게 물질에 종속되지 않고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는 제1차적 존재인 마음을 통찰하셨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마음이 이렇게 몸에 종속되지 않은 요소라는 점을 확인해 주는 또 하나의 경전을 보겠습니다. 불교의 수행체계를 완성해 주는 경전인데요, <사문과경(沙門果經)(D2)>입니다. 이 경은 높은 수행의 경지인 제사선(第四禪) 이후에 전개되는 여덟 가지 방향을 제시하는데, 그 중 첫 번째 방향을 참고하겠습니다.


「그가 이와 같이 마음이 삼매를 닦고, 청정하고, 깨끗하고, 흠이 없고, 오염원이 사라지고, 부드럽고, 자기 활동성을 회복하고, 안정되고, 흔들림이 없는 상태에 이르렀을 때 지(知)와 견(見)으로 마음을 향하고 기울게 합니다. 그는 이와 같이 꿰뚫어 압니다. ㅡ ‘나의 이 몸은 물질로 된 것이고, 네 가지 근본물질[사대(四大)]로 이루어진 것이며, 부모에서 생겨났고, 밥과 죽으로 집적되었으며, 무상하고 파괴되고 분쇄되고 해체되고 분해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나의 이 식(識)은 여기에 의지하고 여기에 묶여 있다.’라고.


대왕이여, 예를 들면 깨끗하고 최상품인 유리보석이 팔각형이고 아주 잘 가공되고 맑고 투명하여 모든 특질을 다 갖추었으며 푸르고 누르고 붉고 흰 실이나 갈색의 실로 묶여 있다 합시다. 그것을 눈이 있는 사람이 손에 놓고서 '이 유리 보석은 깨끗하고 최상품이며 팔각형이고 아주 잘 가공되고 맑고 투명하여 모든 특질을 다 갖추었는데 푸르고 누르고 붉고 흰 실이나 갈색의 실로 묶여 있구나.'라고 살펴보는 것과 같습니다. 대왕이여, 그와 마찬가지로 그는 이와 같이 마음이 삼매를 닦고, 청정하고, 깨끗하고, 흠이 없고, 오염원이 사라지고, 부드럽고, 자기 활동성을 회복하고, 안정되고, 흔들림이 없는 상태에 이르렀을 때 지(知)와 견(見)으로 마음을 향하고 기울게 합니다. 그는 이와 같이 꿰뚫어 압니다. ㅡ ‘나의 이 몸은 물질로 된 것이고, 네 가지 근본물질[사대(四大)]로 이루어진 것이며, 부모에서 생겨났고, 밥과 죽으로 집적되었으며, 무상하고 파괴되고 분쇄되고 해체되고 분해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나의 이 식(識)은 여기에 의지하고 여기에 묶여 있다.’라고. 대왕이여, 이것 역시 스스로 보여지는 사문의 결실이니 앞에서 설명한 스스로 보여지는 사문의 결실들보다 더 뛰어나고 더 수승한 것입니다.」


제사선을 성취하기 이전에 중생들의 마음은 몸에 의지하고 몸에 묶여있다는 것입니다. 설명이 필요 없는 우리들의 삶의 현상이지요. 마음이 몸에 의지하고 묶여 있다 보니 오래 살아야 하는 마음이 짧게 살고 죽어버리는 몸을 중심으로 낮은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사선을 성취하면 비로소 눈이 있는 사람이 보석이 실에 묶여 있는 것을 살펴보듯이 마음이 몸에 의지하고 묶여 있는 줄 알고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럼으로써 몸에 대한 의지와 묶임에서 풀려나 자유로워진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마음이 몸에 종속되지 않은 대등한 것이어서 몸이 죽어도 따라 죽지 못하고 새로운 몸과 만나 새로운 삶을 이어간다는 사실에 대해 두 개의 경전을 통해 확인하였습니다. 불교 안에서 단견(斷見)을 확실하게 타파하는 근거가 될 것입니다. 불교 안에서 윤회 없음 즉 단견(斷見)을 주장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부처님은 이렇게 단견(斷見)을 부정한다는 사실, 놓쳐서는 안되겠습니다.


물론 이 마음이 자아(自我)가 아니어서 상견(常見) 역시 부정된다는 것은 무아(無我)의 가르침을 설하는 많은 경전들에 의해서 확인되는 것입니다.


한편, 윤회의 주제에서는 한 가지 오해를 지적해야 합니다. 부처님은 식(識)이 윤회한다고 가르쳐줍니다. 십이연기(十二緣起)에 관련된 모든 경전들이 이 사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한 오해가 있습니다. 윤회하기는 하지만 식(識)이 윤회하는 것이 아니라는 해석입니다. 식(識)이 윤회하는 것이 아니다보니 윤회하는 당사자를 찾아서 다양한 주장을 또한 하게 됩니다.


<갈애 멸진의 큰 경(M38)>입니다. 사람들은 이 경에서 부처님이 사띠라는 이름의 비구가 식(識)이 윤회한다고 말할 때 그렇지 않다고 꾸짖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식(識)이 윤회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이 말씀이 맞다면, 당연히 식(識)이 윤회의 당사자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선 이 경전의 해당 부분을 보겠습니다.


「한 곁에 앉은 어부의 아들 사띠 비구에게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띠여, 그대에게 이와 같이 ‘내가 세존께서 설하신 가르침을 알고 있기로는 ’바로 이 식(識)‘이 계속되고 윤회하는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라는 악한 견해가 생겨났는가?”


“세존이시여, 제게 이와 같이 ‘내가 세존께서 설하신 가르침을 알고 있기로는 ’바로 이 식(識)‘이 계속되고 윤회하는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라는 견해가 생겨났습니다.”


“사띠여, 어떠한 것이 그 식인가?”


“세존이시여, 그것은 말하고 느끼고 여기저기서 선행과 악행의 보(報)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 어리석은 자여, 누구에게 내가 그런 가르침을 설했다는 것인가? 어리석은 자여, 식(識)도 조건적으로 생겨난다는 것, 즉, 조건 없이는 식(識)도 생겨나지 않는다는 것을 여러 차례 법문으로 설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어리석은 자여, 그대는 스스로 잘못 이해하여 오히려 우리를 왜곡하고 자신을 파괴하고 많은 해악을 낳는다. 그것은 실로 그대를 오랜 세월 불익과 고통으로 이끌 것이다.”」


이 경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바로 이 식(識)’에 대한 서술입니다. ‘말하고 느끼고 여기저기서 선행과 악행의 보(報)를 경험하는 것’이라고 서술된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번뇌의 경(M2)>에서 이 견해는 배우지 못한 범부가 비여리작의할 때 생겨나는 여섯 가지 견해 중의 하나로 나타나는데, 상견(常見)임을 알 수 있습니다. ㅡ 「‘이러한 나의 자아는 말하고 느끼며, 여기저기서 선행과 악행의 보(報)를 경험한다. 그런 나의 자아는 상(常)하고 견고하고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법이고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식(識)이 윤회한다는 답변 때문에 사띠 비구를 꾸짖은 게 아닙니다. 오히려 추가적 확인을 거쳐 식(識)을 ‘바로 이 식(識)’이라는 아뜨만으로 답했을 때 비로소 식(識)도 조건적으로 생겨난다는 가르침을 들어 꾸짖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띠 비구는 식(識)이 윤회한다는 견해 때문에 꾸짖음을 들은 것이 아니라 식(識)을 아뜨만으로 생각하는 견해 즉 상견(常見)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부처님으로부터 꾸짖음을 들은 것입니다. 부처님의 꾸짖음 또한 ‘내가 언제 식(識)이 윤회한다고 했느냐?’가 아니라 ‘식(識)도 조건적으로 생겨난다는 것, 즉, 조건 없이는 식(識)도 생겨나지 않는다는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부처님은 식(識)이 윤회하지 않는다고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부산불교방송 주말특집 해피스님의 마음이야기, 오늘 이야기는 이렇게 정리합니다. 우리는 윤회합니다. 그래서 윤회 없음, 단견(斷見)은 거짓입니다. 식(識)이 윤회합니다. 그러나 이 식(識)은 십이연기(十二緣起)적으로 변화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아뜨만이라 하든, 자아라 하든 어떤 형태로든 변치 않는 것, 항상한 존재에 의한 윤회, 상견(常見)은 거짓입니다.


오직 단견(斷見)도 상견(常見)도 아닌 조건적으로 생겨나는 식(識)에 의한 연기(緣起)적 윤회가 부처님이 깨달아 선언한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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