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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출발 법회

업(業)은 이렇게 조건으로부터 결과에 이르는 전체 영역에 대한 설명으로 확장되고 있습니다.

0 1,004 2017.12.02 11:23

[ … ] 들으셨습니다. 토요일 밤, 편안함과 함께하는 부산불교방송 주말특집 해피스님의 마음이야기 함께하고 계십니다.


이렇게 불교를 대표하는 개념은 업(業)입니다. 하지만, 업은 업 자체로서만 의미를 가지지는 않습니다. 행위를 하면 행위 한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림자처럼 행위를 뒤따르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농사를 지으면 흉작이든 풍작이든 결실을 거두는 것과 같이 업(業)에는 업의 결실로 괴로움이거나 행복이 생겨나는데 과(果)라고 부르고, 살아가면서 그 결실인 괴로움을 직접 겪거나 행복을 직접 누리는 현실적 경험을 보(報)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업에 과(果)와 보(報)가 뒤따르는 현상을 지음 있음이라고 합니다. 또한, 행복한 과(果)와 보(報)를 위해서는 특별한 노력을 필요로 하는데 정진(精進)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괴로움의 소멸과 행복의 실현을 목적으로 하는 불교에서 업(業)은 지음 있음과 정진으로 확장됩니다. 


특히, <머리칼로 만든 옷감 경>은 과거-미래-현재의 모든 부처님들이 업(業)과 지음 있음과 정진을 설한다고 하는데, 이것이 바로 부처님 가르침의 토대가 되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즉 부처님 가르침은 업(業)과 지음 있음과 정진이라는 세 가지 토대 위에서 괴로움을 소멸하고 행복을 실현하는 가르침이어서 이 세 가지 토대를 벗어나는 부처님 가르침은 없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불교를 한 마디로 말하면 행위 즉 업(業)’이라고 말하게 되는데요, 달리 말하면, 업(業)의 주체인 내가 바로 삶의 주인공이어서 내가 어떤 업을 짓느냐에 따라 내가 괴로울 수도 행복할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삶을 해석하는 다른 시각들이 있습니다. <외도의 주장 경>은 현자들로부터 질문 받고, 이유를 추궁 받고, 함께 대화하고, 훨씬 더 나아가면 지음 없음에게 정착되는 세 가지 외도의 주장이 있는데, 이런 주장을 삶의 중심에 두면 행해야 할 것과 행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해 열의와 노력이 없게 된다고 합니다. 


이 경이 말하는 세 가지 외도의 주장은 부처님 가르침 아닌 바깥 길 세 가지라는 의미로 삼종외도(三種外道)라고 알려진 교리인데요, 


‘사람이 즐거움이나 괴로움이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을 경험하는 것은 첫째, 모두 전생의 행위가 원인이다.’ 둘째, 모두 신(神)의 창조가 원인이다.’ 셋째, 모두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다.’


라는 이런 주장과 이런 견해입니다. 조금 확장된 의미로 해석하면, 첫째, 삶의 고락(苦樂)을 운명이나 숙명으로 받아들여 순응하거나, 둘째, 어떤 이름으로든 우리 삶에 간섭하는 권능 가진 자를 설정하고 의지하여 기도하는 일을 통해 행복을 추구함, 또는 셋째, 모든 상황이 우연히 만들어진다는 주장과 견해입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 이런 견해는 업(業)을 중심으로 하는 주인공의 삶을 부정하기 때문에 이런 주장을 삶의 중심에 두면 행해야 할 것과 행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해 열의와 노력이 없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삶을 향상으로 이끌지 못하게 되는 것이고, 그래서 부처님의 길 아닌 바깥 길인 거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 가지는 우리 곁의 많은 불교신자에게서 발견되는 잘못된 신앙생활의 전형이라고 할 것입니다. 잘 되돌아보아야 하는 문제입니다.


이 경은 이렇게 분석됩니다. 부처님은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다는 견해가 사실 아니니 원인도 조건도 있다는 것이고, 오직 전생의 행위거나 오직 신(神)의 창조가 원인이라는 것이 사실이 아니니 삶의 중심이 되는 제3의 어떤 것이 있다고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삼종외도(三種外道)의 부정을 통해 부처님이 알려주는 삶의 중심은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업(業)과 지음 있음과 정진 즉 업(業)에는 과(果)와 보(報)가 따르고, 행복한 과(果)와 보(報)를 위해서는 특별한 노력을 필요로 한다는 이 가르침의 토대는 즐거움이나 괴로움이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을 경험하게 하는 삶의 중심이 바로 업(業)이라고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업(業)은 삶의 중심이 됩니다. 그래서 앞의 경전들도 ‘업이 주인이고, 업의 상속자이고, 업에서 태어났고, 업이 권속이고, 업이 의지처이다.’라고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와셋타 경>은 이렇게 업이 중심이 되는 삶에서 연기(緣起)를 보아 업(業)과 보(報)에 능통한 사람을 현명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현명한 사람에게서 업(業)은 그 행함의 조건을 보는 일과 행위를 뒤따르는 보(報)에 대한 이해로 확장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업(業)은 몸으로 하는 행위인 신업(身業)과 말로 하는 행위인 구업(口業) 그리고 마음으로 하는 행위인 의업(意業)이 있다는 것은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실입니다. 보통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이라는 부르는 것이지요. 이때, 현명한 사람이라면 단순히 몸과 말과 마음으로 행위 하는 데에만 집중하지 않고 그 행위의 조건을 보는 일과 행위를 뒤따르는 보(報)를 감시하는 일에까지 삶의 외연을 확장해야 한다고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꿰뚫음 경>이 답을 줍니다. 업과 업의 원인, 업의 구별 그리고 업의 보에 대해 정의해 주고 있는데요, 함께 들어보겠습니다.


비구들이여, '의도가 업이라고 나는 말하니, 의도하는 동안 몸과 말과 마음으로 업을 짓는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업들의 원인이고 출산인가? 비구들이여, [삼사화합(三事和合)] 촉(觸)이 업들의 원인이고 출산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업들의 구별인가? 비구들이여, 지옥에서 경험해야 하는 업이 있다. 축생의 모태에서 경험해야 하는 업이 있다. 아귀계에서 경험해야 하는 업이 있다. 인간 세계에서 경험해야 하는 업이 있다. 천상 세계에서 경험해야 하는 업이 있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업들의 구별이라 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업의 보(報)인가? 비구들이여, 업의 보(報)는 세 가지라고 나는 말하나니 그것은 지금여기에서 경험하거나 금생의 미래에 경험하거나 혹은 다음 생들의 미래에 경험하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업(業)의 보(報)라 한다. 


의도(意圖)의 확장이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이고, 십이연기(十二緣起)적으로 삼사화합(三事和合) 촉(觸)이 업의 원인이면서 업을 출산하는 것입니다. 업(業)은 지옥-축생-아귀-인간-천상에서 경험되는 보(報)를 초래하는데, 그 보(報)는 지금여기거나 살아서의 미래 그리고 다음 생들의 미래에 경험된다고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것입니다.


삼사화합(三事和合) 촉(觸)을 원인으로 생겨나는 업(業)을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으로, 업(業)에 따라 경험해야 하는 보(報)의 구성을 시간적 공간적으로 구분하여 설명해 주는 것입니다.


부산불교방송 주말특집 해피스님의 마음이야기 다섯 번째 시간의 주제인 업(業)은 이렇게 조건으로부터 결과에 이르는 전체 영역에 대한 설명으로 확장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업(業)의 조건에 대해서는 좀 더 구체적이고 상세한 가르침을 설해주는 경전이 있는데요, 음악 듣고 와서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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