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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스님 이야기

해피스님이야기(230901) - 4부 니까야는 부처님의 원음인가?(네, 그렇습니다)(근본경전연구회 해피스님)

해피스님이야기(230901) - 4부 니까야는 부처님의 원음인가?(, 그렇습니다)(근본경전연구회 해피스님)

[동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QTR-ypH2ZYE

 

4부 니까야 등 근본경전연구회의 공부 기준이 부처님 살아서 직접 설한 가르침이라는 점을 설명하였습니다. 초기불교 경전 백선 독송집 별책 수행 경전별책의 보충(10~11)에 속한 내용입니다. http://nikaya.kr/bbs/board.php?bo_table=happy02_13&wr_id=390참조

 

1) 부처님 살아서 직접 설한 가르침인가?

 

한국붇다와다불교 해피법당 근본경전연구회는 부처님 살아서 직접 설한 가르침의 범주로 율장(律藏-vinaya piṭaka)의 마하 위방가와 비구니 위방가 그리고 경장(經藏-sutta piṭaka)4(디가-맛지마-상윳따-앙굿따라) 니까야와 쿳다까 니까야에 속한 법구경과 숫따니빠따를 지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니까야 심지어 이런 범주의 가르침조차도 부처님의 원음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단지, 원음에 가장 가까울 뿐이라고 말합니다.

 

원음에 가장 가까운 가르침은 있어도 원음은 아니다! 그러면 불교는 어디에 있습니까?

 

아닙니다. 가장 가까운 그것이 원음입니다. 그것보다 더 가까운 것이 없다면, 그리고 2600년 전으로 찾아가 부처님의 설법 장면을 동영상으로 촬영해 올 수 없다면, 그것이 원음에 수렴하는 것이고, 그대로 원음인 것입니다.

 

다만, 증명해야 합니다. 이것이 원음이고, 원음에서 부처님은 이렇게 삶을 설명하고[()-연기(緣起)], 이런 방법으로 삶의 문제의 해소를 이끈다고[고멸(苦滅)-팔정도(八正道)] 교리적 체계를 제시해야 하고, 그것이 가르침에 대한 다른 주장이 접근하지 못하는 부처님의 깨달음을 잘 드러내고 있다고 세상에서 인정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그것이 다만 가장 가까운 가르침이 아니라 부처님의 원음 즉 부처님 살아서 직접 설한 가르침이라는 증명이 되는 것입니다.

 

한국붇다와다불교 해피법당 근본경전연구회는 삶에 대한 부처님의 설명으로 삶의 메커니즘, 삶의 문제의 해소를 이끄는 부처님의 방법으로 수행지도(修行地圖)를 교리적 체계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전통보다는 진정이라는 관점에서 니까야를 꿰어서 만든 공부의 성과입니다.

 

; 삶의 메커니즘과 수행지도(修行地圖)참조 191

 

누구든, 삶의 메커니즘수행지도(修行地圖)가 설명하는 깨달음의 길과 다른 방법으로 부처님의 깨달음을 설명할 수 있으면 그 성과를 제시해 주기 바랍니다. 그래서 어떤 성과가 더 타당하게 부처님을 대변할 수 있는지 토론해 보면, 이 가르침이 단지 가장 가까운 가르침인지 아니면 그대로 부처님의 원음인지를 판단하게 될 것입니다.

 

누구든, 공부의 성과를 제시하지 못하면서 그저 아니라고 부정만 하지는 말기를 바랍니다. 공부를 통한 성과를 대안으로 드러내면서 타당성을 가지고 부정할 때, 그 부정이 의미를 가지고 불교를 더 부처님에게로 이끌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공부를 대하는 이 기준은 그대로 부처님 살아서 직접 설한 가르침입니다.

 

2) 제자들이 설한 가르침 (AN 8.8-웃따라 실패 경)

그런데 부처님 살아서 직접 설한 가르침을 공부하다 보면 부처님이 직접 설하지 않은 가르침들이 종종 눈에 띕니다. 제자들이 설하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면 제자들이 설한 가르침을 부처님이 직접 설한 가르침이라고 인정할 수 있을까요?

 

이런 점에서 부처님 살아서 직접 설한 가르침으로의 공부 기준 안에 신() 또는 제자들이 설한 경도 많으니 부처님이 직접 설했다는 주장은 옳지 않다는 지적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습니다. 이때, (AN 8.8-웃따라 실패 경)은 바로 이런 지적을 위해 준비된 답인 듯 이렇게 묻고 답합니다.

 

질문 대덕이시여, 이 말씀은 웃따라 존자 스스로의 이해입니까, 아니면 그분 세존-아라한-정등각의 말씀입니까?”

 

대답 예를 들면, 신들의 왕이여, 마을이나 번화가의 멀지 않은 곳에 큰 곡물 무더기가 있습니다. 그것으로부터 많은 사람이 들통이거나 바구니거나 감는 천이거나 두 손을 모아서 곡물을 가져갈 것입니다. 신들의 왕이여, 어떤 사람이 그 많은 사람에게 가서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그대들은 어디에서 이 곡물을 가져갑니까?’라고. 신들의 왕이여, 어떻게 말하는 것이 그 많은 사람이 바르게 말하는 자로서 말하는 것입니까?”

 

대덕이시여, ‘우리는 이러저러한 곡물 무더기로부터 가져갑니다.’라는 것이 그 많은 사람이 바르게 말하는 자로서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신들의 왕이여, 잘 말해진 모든 것은 어떤 것이든지 그분 세존-아라한-정등각의 말씀입니다. 그것으로부터 거듭 취하여 우리도, 다른 사람들도 말합니다.”

 

잘 말해진 모든 것 즉 부처님이 설한 가르침을 옮겨 말하는 것은 신()이나 제자들이 해야 하는 역할입니다. 그러니 신이나 제자들이 말한 일화로서 니까야에 포함된 경들은 그들의 가르침이 아니라 부처님이 설한 가르침입니다. 다만, 잘 말해진 부처님 가르침의 무더기[무아(無我)] 안에서 거듭 옮겨 말해진 것만이 그 일화 자체로서 니까야에 포함되어 있다고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후대의 제자들이 그 무더기 안에서라는 전제를 달고 새로운 경을 만드는 것에 대해서도 타당성을 부여하자는 의미는 아닙니다. 오직 전승된 범주 안에 있는 옮겨 말해진 경들에 대한 이해의 측면일 뿐입니다.

 

; 그렇다면 우리도 그들처럼 부처님이 설한 가르침을 옮겨 말해야 합니다. 다만, 다른 무더기[()] 안에서 옮겨 말하면 그것은 바르게 말하는 것이 아니고 외도(外道)의 가르침을 전달하는 것이 되니 신중하게 옮겨 말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붇다와다 불교의 공부 기준은 부처님 살아서 직접 설한 가르침입니다. 잘 말해진 부처님 가르침의 무더기[무아(無我)] 안에서 거듭 옮겨 말해진 신()이나 제자들의 대화를 포함하여 1차 결집에서 결집된 공부입니다. 그래서 이 기준 안에서는 교리적 충돌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떤 주제에 대해서든 부처님의 의도에 따르는 확정적 결론을 도출할 수 있습니다. 또한, 아직 잘 이해되지 않는 것은 공부가 성숙하여 이해하게 될 때까지 미뤄 놓으면 됩니다. 섣불리 자기의 몰이해를 근거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부정하지 않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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