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불교입문 > 해피스님 이야기

해피스님 이야기

자리매김(3-1) ㅡ 부처님으로부터 생명과 기쁨과 할 일을 받았습니다.

0 775 2018.12.30 20:06

2006.11.12. http://cafe.daum.net/happysanga/EizR/22

 

자리매김과 자리매김(2)에서 '제자리를 설정하는 것과 설정된 자리에 매김하기 위한 지극한 마음가짐'에 대해 말한 바 있습니다. 이제 (3)에서는 중심에 서지 못한 (제자리매김에 나서지 못한)사람이 곁다리로 붙어선 채 제자리를 그리워하던 역정을 회고해 보려 합니다. 늦게나마 제자리매김에 나서기 위한 마음가짐의 과정이라 할 목적입니다.

 

그랬지요. 아주 어릴 때부터, 최초의 기억으로 치자면 초등학교 3학년쯤이었을 겁니다. 강원도 원주에 있는 포교당 불심사 아랫동네에 사는 덕에 일요일 저녁이면 절에 가 어린이법회에 참석하면서부터 일겁니다. 돌아가신 안병호선생님의 법회에 참석하고 나면 꼭 연필 한자루라도 손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중1때 창립한 법웅사학생회에 잠시 들렀다가 중2때 창립한 불심사학생회에 참여하면서부터가 제 불교인생의 본격적인 시작이라고 할만 할 겁니다.


그때부터도 제가 말로만은 제법 잘 할줄 아는 사람이었던가봅니다. 고등학생으로만 거의 구성된 불심사학생회 창립법회에서 (기억에 의하면)거의 혼자였던 중학생이 형님들 속에서 겉으로는 운영주체의 한사람(감사위원)으로 선출되었으니까요. 이때부터 불심사학생회는 내 어린시절의 전부였다 해야할 겁니다. 죽을 때까지 그리워할 희숙이도 거기 있었고, 경희/병인/인숙 세분 누나도 그랬고, 고교동창생들의 상당수가 불심파로 기억하는가 하면, 원주지역의 여러 선후배들과 비학연지인들이 생긴 것도 거의 그 때문이라고 해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린시절 유일하게 존경했던 어른이신 조종현스님을 뵌 것도 거기였지요. 그분은 당시 국어교과서에 시(나도 방울쇠 되어 살고싶다?)가 실려있는, 나의 기억에 유일한 그런 분이셨지요. 그분이 태백산맥 조정래님의 아버지시라는 사실은 그후에 상당한 나의 자부심이기도 했습니다. 그분은 나를 참 이뻐하셨었기 때문입니다. 그 불심사학생회가 후에 절에서 퇴출당할 때 강상준주지스님께 무릅꿇고 사정하던 기억이며, 우리에게서 법사 데뷔하신 최금한법사님 따라 (당시 태동한 거사림 '성불회'의)성불회관으로 법회를 옮긴 일이며, 현재의 성불원에 가서도 불심이란 이름을 지키려 애쓴 후배들의 수고로움에 이르기까지 14회의 동문을 배출한 불심사학생회는 내 불교인생의 초석이었다고 아니할 수 없겠습니다.


부산대학교에 진학했습니다. 솔직한 기억으로 '불교는 고등학교까지 다녔으니 불교아닌 써클을 찾아보자' 했습니다. 그래서 부산대학교 MRA 제7기에 가입했고, 내 종교가 불교라는 거 외에 불교는 제 관심 밖이 되어 버렸습니다. 절제되지 않는 객지생활 속에 단속받지 않는 술자리가 이어지면서 감당할 수 없는만큼의 부끄러움이 나에게 현실로 닥쳐왔습니다. 그렇게 군입대를 하였습니다.


사실 중고교시절의 나는 많이 아팠습니다. 키 작고, 가난하고, 못생겼기 때문입니다. 그 이쁜 희숙이를 짝사랑밖에 못하게 된 것도 거기서 생겨난 열등감 때문입니다. 차라리 머리마저 따라 나빴더라면 열등감보다는 그러려니~ 하고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교과서 마저 제대로 못 살 정도의 형편으로 고교를 다녔으면서도 특수반으로 졸업하고 부산대학교에 합격한 것은 어쩌면 개천에서 용났다할 일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런 것은 그후 지금까지도 내 정서상에 이중성으로 작용하는게 아닌가 하고 혼자 생각케 합니다.


죽음을 생각하는 경험이 여러번 있었습니다. 아마도 최초의 경험은 1979년 2월 14일로 기억하는 설 다음날일 겁니다. 원래는 설날 밤에 죽으려 했는 데 두려움에 밀려서 (지금은 회촌마을에서 흙집학교를 운영하는 철학박사)고제순네집에서 하루를 넘긴 거였습니다. '저~기 가서 죽으리라'고 어둠속 먼길을 걸었습니다. 멈추지도 않고 뒤돌아보지도 않으며 걸었습니다, 오직 '저~기'를 향해! 그리고 거기에 도달했을 때 나는 불꽃처럼 타오르는 빛을 보았습니다. 환희로움으로 나도 불타올랐습니다. 부처님이 떠올랐습니다. 아! 부처님은 죽음의 문턱에서 나에게 삶을 일러주셨습니다. 멈추지도 말고 뒤돌아보지도 말고 굳세게 나아가라 하심입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부처님께서 나에게 생명과 기쁨과 할 일을 주셨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 중 이 경험이 부처님께서 나에게 생명을 주신, 죽음을 극복하게 한 사건입니다. 후후~, 때는 광주를 문턱에 두고 있던 계엄시절! 새생명의 기쁨에 들떠 돌아오던 길에 통금 위반으로 헌병차에 실려 원주경찰서 유치장에서 하룻밤을 보냈지요. 거기서 처음 만난  두 친구가 있으니 아직도 잘 사귀고 있는 최종남(오촌고모부의 형님)과 장홍련이지요. 홍련과는 며칠전에도 만나서 나의 새로운 인생시도에 대하여 말씀 나눴으니 참 귀한 인연이라 하겠습니다.


이 사건 이후로 나는 스스로 철학자다움(시절언어로 '개똥철학')을 자주 생각했습니다. 중고교 동창인 (세명대교수 공학박사)권준식이 이 시절 나의 가장 강력한 대화자였습니다. 여러가지 많이 고맙고 가장 깊은 나의 친구지요. 나는 늘 그가 내 불알친구와 동등하게 소중한 친구라고 표현했지요. 가난이 싫어 장래 돈을 벌겠다는 나에게 차라리 돈은 지가 벌테니 공부나 하라고, 나 같은 사람은 돈 벌 사람이 아니라고 했는 데 그 친구 말이 사실로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이제서야 아는 거지만 자리매김에 현명한 것이 어려우면서도 중요한 거지요.


1980년 10월 10일 춘천에서 입영열차를 타고 논산훈련소로 입대했습니다. 희숙이 얘기 또해서 부끄럽지만 전날밤 강원대 다니는 희숙이에게 당시 유행하던 캪팀큐-럼 큰거 한병 얻어먹었습니다. 입영전야다보니 희숙이는 큰 거부감없이 함께 해 주었지요. 지금 다시 회상해보아도 그날이 희숙이와의 마지막 만남이었습니다. 나에게는 잊을 수 없는 사건이라할 밤이었지요. 곽형근(몇년전에는 교사였는데)이 같이 있었고 자기 집에서 재워주었지요. 당시 훈련소 수용연대의 법당은 사병막사를 개조해 만들었다고 했는 데 참 초라했습니다. 그래도 그 법당에서 아버지 생각하면서 울기도 했지요. 훈련소에서도 법회 참석을 계속했습니다. 한동안 잊고 있었다해도 과언이 아닐 불자로서의 생활이 군인이 되니 자연스럽게 되살아나더군요. 그런데, 잊고 있었다 해도 나에게는 불자다운 티를 내는 무언가가 있었나봅니다. 수용연대시절 내무반장은 고참병장으로서 기독교도였는데(어렴풋하기로는 군종병 역할을 담당했던 것 같기도 해요) 불교도인 나와의 어떤 교감으로 인해 마음을 나눴고, 휴가기간에 서울인지 가서 만나뵌 기억이 있어요. 기왕에 재밌는 기억 하나 얘기할게요. 군대가기 전 준식과 함께 치악산에 올랐는 데, 산에서 만난 부산누님들이 있었어요. 나보고 교인이냐 해서 아니라고 했더니 거짓말 말라해요. 이마에 '교인!'하고 씌어 있는 데 왜 아니라 하냐구요. 나는 불자라고 말했어요. 많이 의아해 하더라구요. 후반기교육을 진해 육군수송학교에서 받았는데, 거기서도 보초 같이 서던 동기병이 교인이라 해서, 아니라, 불자라 했더니 '다시보니 정말 부처님 같다!' 하더라구요. 살면서 많이 들은 얘기가 목회활동 하시느냐는 거였어요. 그때마다 나는 내가 설 자리가 불법을 전하는 자리라는 생각에 씁쓸했지요. 아마도 나는 내가 자리매김할 곳이 어딘지 진즉이 알고 있었던 겁니다. 세속적 유희에 빠져 실현치 못한 바보였던 거겠지요.


1981년 2월 28일 자대배치를 받았습니다. 육군제78수송회전익항공기정비지원근무대였는 데 그냥은 78항공이라고 불렸지요. 위치는요, 놀랍게도 제가 졸업한 원주중학교와 담장을 같이한 부대였어요. 입대후 5개월만에 우리동네가 보이는 곳으로 자대배치를 받은 거지요. 사실은, 내 주특기로 배치될 수 있는 부대가 3곳 있었는 데, 후반기 교육 내내 내가 너무 이뻐서 고향으로 보내주었다는 것이 우리 동기들 다 수긍하는 이유였습니다. 기왕에 조금 더 이쁜 이야기를 하자면, 자대배치 얼마 후 한기수 고참인 이득환(별명이 '된장'이었고 레슬링선수였던)이 불러서 왈, 못생긴 게 와서 부대 망신 시킨다더니, 1년쯤 뒤에는 보면 볼수록 이쁘다고 '이쁜이'하라고 하더군요. 그후로 작고, 못생긴 김희섭, '이쁜이' 되었지요. 복학 후에는 '이쁜이선배'로 불렸었구요, 입사후 워커힐에서 연수받을 때도 '이쁜이'라는 별명이 번호와 함께 배를 가리고 있었습니다. 득환형 정말 보고싶은 선배시지요.


우리부대 불교환자들(법회참석자를 보통 그렇게 불렀죠)은 제1군사령부법당인 법웅사의 법회에 참석하였습니다. 일요일 오전의 민군합동법회와 목요일저녁의 사병법회가 있었지요. 일요일법회는 주로 장교들이 운영했고, 사병법회는 우리끼리 운영하는 법회였습니다. 어쩌면 나의 불교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법회가 이 사병법회가 아닌가 싶습니다. 법회 사회자 경력 또한 이 법회에서 시작되었구요.


군대시절 이야기 몇개는 빼놓을 수가 없겠습니다. 첫째, 첫번째 스승이랄 수 있는 본원스님과의 만남입니다. 김영채일병이었습니다. 1군사령부 군종사병이었는 데 알고보니 승려생활 중에 입대하셨더군요. 그것도 통도사로 출가하시고, 전 조계종 종정 월하스님의 손상좌시고, 청하스님의 상좌시더라구요. 공부하시던 말씀 가끔 들려주시는 데 정말이지 우리같은 이는 엄두도 못낼 공부를 하셨더라구요. 나보다 몇개월 졸병이고 나이도 한살이 아래셨는 데, 참 좋았지요. 1군지사 군종사병이었던 한살 많은 전재하와 셋이서 참 친하고, 2년 가까운 기간동안 법회운영 잘했습니다. 스님이 처음 우리법회에서 말씀하신 날, 설법은 할줄 모르니 목탁만 치겠다 하셨었는데 약간의 시간이 지나니 스님은 천상 대강백의 자질이시라, 아마도 대중 앞에서 설법 시작하는 일은 스님한테도 어려움이었나 봅니다. 지금 이분이 누구신가 하면, 김해 다보선원을 중심으로 반냐라마선원과 sati-school을 창건, 운영하시는 붓다빠-라스님이십니다. 1983년 언젠가 먼저 전역한 내가 스님의 전역 직전에 뵈었을 때, '죽어도 먹물옷은 벗지 않겠소'라시며, 나 어쩌냐니 '잘 먹고 잘 사시오'라고 작은 종이에 적어주신 기억이 새롭습니다.


두번째, 법웅사에서 원주불교청년회가 개최한 불교교양대학에서 였습니다. 첫날 선진규포교사님께서 부처님의 일생에 대한 설법을 하셨는 데 너무 감명깊었습니다. 나는 아직도 '고행을 버리고 우유죽을 받아드심은 두번째 출가요, 성불 후 법바퀴를 굴리심은 세번째 출가이다'라는 말씀을 종종 써먹습니다.


득환형만큼 친했던 한기수 고참이자 독실한 기독교인인 조규성(전역후 숭실대 도서관에서 만나본 후 보고픈 마음만 있다)을 둘쨋날 모시고 같는 데, 이영무교수님의 설법이었습니다. 지금 같으면 그분의 말씀이 무척 귀했을텐데 그 나이로는 전날 같은 접근은 오지 않았고 규성형도 흔쾌해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해였는지 다음해였는지 교양대학 교재에서 '부산불교연구원장 고순호법사의 불교학개관중 발췌내용'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 때까지 나는 이런 책을 본적이 없었습니다. 불교가 이렇듯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는 것이 그저 눈이 번쩍 뜨일 뿐이었습니다. 불교교양대학은 나에게 불교학개관의 저자 고순호법사의 함자 석자를 새겨주었습니다. 고법사님과는 몇년후 부산에서 만나 오래고 깊은 인연을 맺게되고 나로서는 두번째 스승이랄 분이 되셨습니다.


세번째, 어느날 사병법회에서 였습니다. 늘 하는 반야심경 독송 순서에 문득 듣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법당 가득한 독경소리 속에 그윽한 눈매로 부처님을 올려보았습니다. 나를 바라보며 싱긋 웃으셨습니다. 부처님도 웃네! 기분이 좋아지면서 더 부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부처님은 함박웃음으로 나를 바라보셨습니다. 기분이 너무 좋았습니다. 부처님은 영화배우 정윤희보다도 예쁘게 웃고 계셨습니다. 무어라 표현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냥 좋았습니다. 눈물이 맺히도록 그냥 좋았습니다. 부처님은 세살박이 조카 재우의 모두가 기뻐하는 천진한 웃음으로도 비교할 수 없는 그런 모습으로 나를 바라보셨습니다. 아무런 말도,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그저 부처님의 웃음을 맞이했을 뿐입니다.


나는 작고 못생기고 가난했습니다. 열등감으로 가득한 나의 심정은 그 무렵 '자학적 우울증'이라고 스스로 표현했을 정도로 많이 아팠습니다. '이쁜이'라고 불리우던 나의 다른 측면, 이중성이었을 겁니다. 부처님은 그 한번의 웃음으로 나의 '자학적 우울증'을 치료하셨습니다. 그리고, 나는 부처님에게서 '기쁨'을 선물받았습니다. 아! 만일 내가 그때의 그 기쁨을 잊지않고 충만하게 살았다면 지금 나는 참으로 모범적이고 쓸모 많은 불제자로 살고 있을 겁니다. 


네번째, 두번째 휴가기간이었고 아마도 1982년 5월이나 6월이었을 겁니다. 원주천 변의 남산교회에서 개최하는 부흥회가 있었는 데, 전봇대 마다 '목사가 된 스님'이란 내용의 전단지가 붙었습니다. 명진홍목사라는 자가 있었습니다. '스님이던 내가 왜 목사가 되었는가?'라는 설교로 전국을 휩쓸던 자가 마침내 호법의 고장 원주까지 발을 들여 놓은 것입니다. 원주의 불자들은 얌전하지 않았습니다. 부흥회 첫날 여러 불자님들이 탐색전 삼아 남산교회에 참석했습니다. 나도 그 중에 하나였습니다. '중질하던 명진홍이를 때려잡아 목사 만드신 주님의 뜻은 중놈! 때려잡아라~ 하는 것입니다'하니 '할렐루야~'를 외치는 교인들의 환호소리를 맨정신으로는 차마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날의 그 아픔은 지금까지도 차마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원주불교에서는 정중히 불교비방을 삼가해 달라고 요청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러나 둘쨋날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셋째날은 전쟁이었습니다. 다음날 신문에서도 기독교 전래 이후 불교와의 최초의 물리적 충돌이 원주에서 발생했다고, 이것은 종교전쟁이라고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남산교회 안밖에서 불자들이 대응했습니다. 나는 불심사학생회 후배들과 함께 교회앞 방둑에 있었습니다. 법웅사학생회도 함께 했습니다. 스님들과 어른불자님들의 지시에 따라 나는 학생들의 앞에 서서 목탁을 치며 '석가모니불'을 목청껏 외쳤습니다. 한순간 교회 안에서 소란이 일었습니다. 상지대학교불교학생회 이춘수(이름은 정확하지 않을 듯)회장이 명진홍이란 자 앞에서 칼을 꺼내 자기 가슴을 다섯번이나 찌른 순교행위를 했던 것입니다. 명진홍이란 자는 짐싸들고 도망치고 부흥회는 중단되었습니다. 호법의 고장 원주는 명진홍이란 자의 훼법행위에 일침을 가해 쫓아보내고 훼법행위에 대한 해법을 극명히 제시했던 것입니다. 우리들은 원주 시가지를 행진해 법웅사로 갔습니다. 저는 줄곧 목탁을 치며 후배들과 함께 했습니다. 가는 도중 불심사학생회 황선후(지금은 관설동 하나로마트내 초밥코너를 운영하지요)가 물었습니다. '오빠, 군복입고 괜찮아요?' 결연히 말했습니다. '살아가면서 무엇보다도 소중한 일이 있을 수 있어. 나는 지금 그래.' 그랬습니다! 모든 것을 다 잃더라도 나는 지금 이순간 내가 해야할 최선의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죽어도 좋았습니다. 법웅사에 도착하니 군법사님께서 '너냐?'하셨습니다. 현장에 현역사병이 목탁치면서 앞장서 있다고 군관계기관으로 통보가 갔고, 군법당 법웅사로 득달같은 조치가 이루어진 거지요. '어린 후배들이 과격해질까 싶어 통제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법당에서 나는 마이크를 잡고 '부처님!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하고 목놓았고 가득찬 불자님들도 다 같이 쓰러져 통곡했습니다. 피하라고 하더군요. 밤열차 타고 부산으로 갔지요. 법사님께서 뒷일을 책임져  주셨습니다. 휴가 마치고 복귀했을 때, 부대장님께서는 원주역까지 나를 잡으러 출동하셨답니다. 그때 잡혔으면 남한산성이었다고 하시더군요. 그 후 법사님의 강력한 보호의지로 마무리지어졌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으로 인해 나는 평생을 두고 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이렇게 군대생활까지를 통해 나는 부처님으로부터 생명과 기쁨과 할 일을 받았습니다.


(3-2)에 계속.... 2007.07.21.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