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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스님 이야기

자리매김(3-2) ㅡ 전역후 복학까지

0 458 2018.12.30 20:13

2007.07.21. http://cafe.daum.net/happysanga/EizR/24

 

1983413일 전역. 전역이래야 부대에서 집까지 중학교 때 등교하던 속도로도 20분이면 되는 거리를 걸은 것이 고작이다. 그 길을 예비군복 입고 1시간은 걸려 걸었다. 중간에 군대봉급 남은 돈으로 영어사전 한권을 샀다. 전역의 기쁨보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앞섰다. 기어가는 듯한 속도로 터벅터벅 걸었다. 예비군이 되었다. 군대가기 전 성적부진 이유로 휴학을 했었는 데, 전역시기가 애매해서 다시 1년을 쉬게 됐다. 나는 결국 2학년이 되기까지 6년이 걸렸다.

 

고교 때 이과반이었다. 그것만이 판단근거가 되어 자연스레 공대에 진학했다. 후에 나는 교사가 되지 않을 것을 많이 후회했다. 내가 사범대에 진학했어도 이렇게 공부 못하는, 남보다 2년이나 늦게 대학을 졸업하는 드문 경우의 주인공일 수 있을까 하고 자문하곤 했다. 하지만 그것은 대학졸업 때 출가했으면 지금 나는 어떨까 하는 것과 같은 문제일 거라고 생각한다. 다만, 내가 교사거나 스님에 잘맞는 성향인 사람인 것만은 사실이다.

 

어쨌든, 4월에 전역했으니 복학까지는 거의 1년을 꼬박 기다려야 한다. 이 기간에도 꼭 기억할 일이 두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불심사학생회가 불심사에서 쫒겨난 것이다. 스님 말씀인즉, 학생들이 시끄럽고 모여서는 연애질이나 한다는 거다. 누구나 아는 거지만 그 또래 아이들이 모여서 시끄럽지 않다면 아이들이 아니다. 구르는 낙엽만 봐도 배꼽을 잡는다는 그 시기이니 말이다. 그 시기의 아이들이 모여 사랑의 감정이 싹트지 않는다면 그런 아이들을 가르쳐 무엇할 것인가. , 주지스님은 동진출가하셔서 이 또래 아이들의 애틋한 사랑감정을 겪어보지 못하셨을까, 아니면, 다가온 그 감정을 마구니로 바로 보아 물치려 내셨을까. 나는 스님께 무릎꿇고 빌었다. 아이들없는 불심사가 어디로 가겠느냐고, 저희들(선배)이 함께하며 아이들을 다스리겠다고, 제발 아이들이 절없이 헤매이게 하지 말아달라고! 그래도 결국 우리는 불심사에서 법회하지 못하게 되었다. 명진홍이란 자 이후 거사님들이 신행단체 성불회를 결성하셨다. 우리 지도법사이신 최금한법사님께서 초대회장이셨다. 그분들은 시내 중심지 중국집 2층을 빌어 법회를 하셨고 성불회관이라 이름하였다. 불심사학생회는 성불회관으로 옮겼다. 훗날, 불심사학생회는 폐회되었고, 불심사는 황량해졌다. 원주불교에 있어 포교의 중심이던 불심사는 이렇게 원주불교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말았다.

 

두번째는, 인생계획표를 짰다. 19841월초. 성불회관에서 후배들과 함께 있었다. 연초 분위기에 맞는 얘기중에 그해가 쥐띠해인게 생각났다. 그래서 한갑자를 살아보자고 했다. 나는 내 나이에 맞춰 이렇게 계획표를 짰다. 첫번째 12(나이 26~37)은 준비기, 두번째 12(나이 38~49)은 활동기, 세번째 12(나이 50~61)은 성취기, 네번째 12(나이 62~73)은 정리기, 마지막 12(나이 74~85)은 음미기다. 그때만 해도 85세까지 살기나 하겠냐고들 했지만 나로서는 의미있는 인생계획표를 짰다. 어느새 두번째 12년이 올해로서 마감된다. 아무것도 해놓은 것 없이 헤매이기만 했다. 이제서야 실행하려 하는 출가의 길을 위해 겪을 것은 다 겪어보는 고통의 과정이었을까? 그래도 의미를 주려한다. 세상은 고통이다. 불교는 이 고통을 떠난 행복의 세계, 열반(해탈)을 추구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고의 진실을 올바르게 보라 하셨다. 사성제이다. 그러기 위해 나는 온갖 고통을 모질게도 경험했나보다. 그냥두면 겪은 것일 뿐이다. 그러나, 이제 출가의 길에 들어서고, 한갑자를 새로이 시작한다면 그것은 다시 얻을 수 없는 값진 경험으로 대중을 위해 쓰이게될 것이다.

 

(3-3)에 계속/2007.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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