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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스님 이야기

자리매김(3-3) ㅡ 부산대학교 불교학생회

0 546 2018.12.30 20:26

2007.07.21. http://cafe.daum.net/happysanga/EizR/25

 

19843. 2학년으로 복학했다. 화공과 최고참이다. 불교학생회에 가입했다. 많은 나이에, 이른 학번에 신입회원이 되었다. 전두환정권하에 대학은 삼민사상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민주,민중,민족의 삼민이었다. 이렇게 당시의 대학을 회고하는 것이 편협하달 수도 있겠지만 불자로서, 불교학생회원으로서 내가 겪은 바 나의 시각으로는 분명히 그렇다. 물론 불교외적으로도 나의 복학후 3년은 파란만장했지만 지금은 불교인생으로서의 기술이기에 불교적 3년만을 언급하고자 한다.

 

불교학생회는 부산대학교 내에서 거의 가장 강력한 써클이었다. 인원도 많았지만 불교교리는 대중을 삼민사상의 기치아래로 흡입하는데 아주 효율적이었다. 민중불교라는 이름으로 보살의 삶을 말했고, 파사현정을 말했으며, 심지어 부처님이 지금 오신다면 어느 곳에 자리하실까 라고까지 했다. 그들중엔 하물며 삼민사상이 불교보다도 우월하다는 견해도 있었다. 써클룸에선 선배들이 열심히 이념교육을 시키고 있었고, 84학번 어린 후배들은 입회후 한두달이면 여지없이 운동권화 되었다. 이 틈바구니에서 나는 부처님 말씀을 올바르게 알자고, 우리는 순수히 불교만 하자고 주장했다. 여자후배들은 나를 이쁜이선배라고 불렀다. 나는 삼민보다도, 이념보다도, 순수하게 불교를 배우고 오직 포교하자 했다. 대중은 운동권이었지만 일부 나와 같은 사고도 있어 불교학생회에는 눈에 보이지 않게 두개의 세력이 공존한다할 수 있었다. 아니, 어쩌면 복학생의 무게에 '이쁜이의 입담'을 가지고 내가 등장하기 이전 즉 83년에는 민중불교를 내세운 운동세력만으로 불교학생회가 존재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선지 불교학생회는 운동권의 중추세력이었다. 운동세력의 핵심이랄 수 있는 써클연합회장도 우리회원이었다. 78학번 아무개, 81학번쯤의 김규생, 이경수 등 쟁쟁한 운동주도세력에 성제도등도 불교학생회의 중심이념세력으로 기억된다. 그 판에 뛰어든 나는 그들로서는 참 애매모호한 존재였을것이다. 저 나이, 저 학번에, 불교를 좀 아는 것 같기도 하고, 대단한 말발까지 갖추었는데, 왜 저 형님은 민중 앞에 나서지 않는 지, 순수불교를 통한 포교를 운운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는 것인지, 등등 그들로서는 인간적 매력과 함께 등장한 강력한 적대세력이었을 것이다. 나는 공개적으로 민중불교라 불리운 그들에게 반대했다.

 

이쯤에서 한가한 기억 하나 얘기해 보자. 초중고에 대학까지 같이 다닌 천주교도 이수영(원주/선인엔지니어링대표)과 복학 후 함께 자취를 했다. 1984년 초파일을 일주일 정도 앞두고 요한바오로2세교황님의 한국 방문이 있었다. 신문이 온통 교황 방문 기사로 가득찼다. 나는 수영에게 '너네 교황님은 하필이면 남의 잔치날에 맞춰 방문을 하시냐. 그렇다고 신문은 온통 그 기사뿐이고... 기분 나뻐! 이 신문 안볼거니 신문 바꾸자'하고 신경질을 부렸다. 수영은 그후 20년이 넘도록 틈틈이 이 기억을 안주삼곤 한다. 물론 세계를 감안하는 교황님이니만큼 음력 사월팔일을 고려해 일정을 맞출 수야 없었겠지만은 불자로서의 불편한 심기를 표현한 일이 나로서는 부끄럽지 않다. 어쩌면 외진 구석 한군데서라도, 누군가라도 해야하는 일을 내가 한 건지도 모르겠다. , 달라이라마님의 한국방문이 성사된다면, 우리측에서는 그 일정에 크리스마스나 부활절 등을 감안하게 될까?

 

내가 순수불교를 주장하는 동안 이념화에 밀려 멀어졌던 몇몇 동조회원들이 돌아왔다. 79학번 조성래씨가 그 대표다. 그는 영문학과(?)였던걸로 기억하는데, 재학중에 동아대 주최 어떤 학술대회에 '금강경 해설'로 참가하여 수상하기도 했던 사람이다. 이 사람을 만난 이후 불교학생회 내의 순수불교 움직임은 힘이 생겼다. 그는 우리 회원 모두들 중에 공부가 가장 깊었다. 나는 그에게 의존했다. 그도 나에게서 필요한 점을 찾았을 거다. 그와 내가 만나니 순수불교진영은 순식간에 민중불교세력과 대등한 무게를 가지게 되었다. 그가 전지 여러장에 민중불교세력의 주장이 교리적으로 옳지 않음을 신랄하게 파헤쳐 써클룸 벽면을 한바퀴 돌린 사건은 순수불교세력의 도약에 있어 백미라 할 것이었다(어쩌면 그가 아니고 민중불교진영에서 순수불교진영을 비판하는 글이었는 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민중불교와 순수불교간 비판의 글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양 진영간에 교리적 타당성을 놓고 상당횟수의 토론회가 열렸던 것은 격동의 세월을 살아간 젊은 불자들만이 경험한 소중한 기억이 되었다. 복학 첫해 1학기는 이렇게 민중불교 속에서 순수불교의 싹을 되살리는 가운데 지나갔다.

 

그때 불교학생회 회장은 불문과(?)였는지 허씨 성의 여학생이었다. 다소곳하고 차분하면서도 성향은 운동권세력쪽이었다(하긴, 그시절은 아니라고 공개적으로 표현하지 않으면 거의 그런 성향이었이었다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유신은 지나갔어도, 최소한 대학에서만큼은 군사독재의 연장선상으로 파악되던 시절이었으니 말이다). 2학기가 시작되었는데, 갑자기 허회장이 사퇴를 했다. 한학기용 회장을 새로 선출해야 했다. 4학년 2학기가 된 김규생이 회장후보로 나섰다. 법대생이었을거다. 참 잘나고, 똑똑하고, 인간적 매력도 넘치며, 나하고는 견해는 달라도 많이 가까웠던 법동생이다. 몇년전엔가 들으니 같은 회원이었던 성제도형의 부산불교교육원에서 강의한다고 들었는데 잘하고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어쨌든, 기억이 맞다면, 또는 김규생이 허락한다면, 불교학생회의 이념적 역량을 삼민주의의 실현에 오로지 활용키 위해서는 강력한 회장을 내세워, 나로부터 비롯된 회원장악력의 문제를 해소해야할 필요성 때문이었다는 것이 그때의 분석이었다. 아마도 조성래씨와 나를 위시한 순수불교진영의 무게가 불교학생회의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치게되고, 그로 인해 운동권내에서 불교학생회의 입지가 약해진다고 판단하였던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조성래, 이준연 등 순수불교진영에서도 회장후보를 내기로 했다. 김규생과 맞설만해야 하고, 세력적 열세를 역전시킬 수 있어야 했다. 나였다. 입회가 늦어 자격시비가 약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지만 그래도 김규생과 맞설 이로는 이쁜이선배가 최적이었다.

 

금정산자락, 온천장에 접해 있는 금강공원 안에 금강사가 있다. 학교에서 20분 채 안걸리는 거리는 회원들이 재잘거리며 걷기에 적당한 거리였고 추억도 많다. 절에는 서경보스님이 주지소임을 하셨다. 워낙 바쁘신 분이라 드물게 계시긴 했어도, 시골 할아버지 같앗던 인자한 모습을 살아계실 제 몇번 뵌 적이 있다.

 

 

회장선거가 치뤄졌다. 이슈가 있는 선거라설까, 많은 회원들이 참석했다. '민중불교 vs 순수불교'의 치열한 유세전이 펼쳐졌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평등에 대하여' 견해를 말해야 했다. 대략 요약하면, '모두가 동일한 소득을 갖는 것이 평등이라고 생각치 않음. 일한 만큼, 수익에 기여한 만큼 소득을 나누는 것이 평등임'이라고 했는데 큰 호응을 받았다. 이 얘기는 후에 ()유공 입사시 면접시험 3speech에서 인용한 바 있는데, 거기서도 좋은 점수를 받는 발표내용이 되었다. 지금만 같아도 '생명으로서의 평등'을 말할 수 있었을텐데 그 때는 거기에 미치지 못했든가 보다. 52:49(혹은 52:47)로 내가 당선되었다. 기대하기 힘든 결과였는데 우리가 이뤄낸 것이다. 그리하여, 대학생불교연합회 부산지부 부산대학교지회장이 되었다.

 

(3-4)에 계속... 2007.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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