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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스님 이야기

자리매김(3-4) ㅡ 정진회 창립까지/바라밀회 창립 과정은 담지 못했습니다.

0 557 2018.12.30 20:39

2007.07.26. http://cafe.daum.net/happysanga/EizR/26

 

그렇게 불교학생회장이 되었다. 대학생불교연합회 부산지부 부산대학교지회장이다. 부산지부의 법회는 부산역 맞은편의 소림사에서 개최되었다.어느 법회날, 아마도 나를 위한 바람으로의 과 남들을 위한 바람으로의 이 흑판에 적혀있던 날이었을 거다. 법사님을 우리 법회에 꼭 모시고 싶다는 청을 드리려고 여쭙다보니, ! 이분이 고순호법사님이셨다.(법회참석이 늦어서 설법중인 분의 소개를 놓쳤었음). 이날 처음 뵌 고법사님은 불교에 대한 나의 실질적인 스승이시다. 법사님의 도움으로 향후 부산대학교불교바라밀회를 창립 운영한 일이거나, 부산불교연구원 법회에 참석하여 근본교리를 배운 것 등은 내가 한번도 불자임을 부정치 않고 현재까지 살아올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불교학생회장이던 기간 동안 학교 밖으로는 두가지 기억이 있다. 하나는, 명진홍이란 자와 유사하게 훼법행위를 하던 김용화(?)란 자에 대한 호법활동에 부산대학교지회장으로서 동참한 일이다. 그는 어느 종단에선가 대덕 칭호를 받은 승려였다고 하며, '극락의 불나비'란 책을 지어 불자들이 저 죽을 곳인 줄 모르고 극락을 찾아 뛰어드는 것이 마치 불 속으로 날아드는 불나비와 같다는 강연을 하던 자였다. 스님들을 중심한 불자들의 강력한 호법의지로 중단시킨 이 사건에 동참하면서, 세상에는 훼법행위가 참으로 많고 불자인 나는 참으로 해얄 일이 많다는 것을 다시 알게 되었다.

 

또 하나는 최석호법사님과의 만남이다. 부산역 앞 새마당예식장에서 최석호법사초청법회가 열렸다. 부산지부장이던 법우님의 가장 존경하는 분이라는 추천에 법회에 참석했다. 훌륭하셨다. 근데 한가지! 걸리는게 있다. 법사님을 뵈러 대기실로 가니 짜장면을 드시는 중이다. '설법내용에 상당히 운동권적인, 민중불교를 설하시는 것 같은 느낌이 있습니다'하고 여쭈었더니, '요즘 젊은 불자들을 포용하고 전망을 제시하려면 그렇게 접근할 수 밖에 없습니다'라는 취지의 대답을 주셨다.(오랜 얘기라 기억이 정확치 않을 수 있습니다. 다만, 그런 요점의 대화를 나누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1학기를 민중불교와 대립하며 넘겼기 때문이겠지만, 법사님의 그 대답은 탐탁치 않았다. 기대에 부합치 못했다는 얘기다. 후에 법사님과는 몇 번의 만남이 더 있었다. 서울불교청년회 법회에 오신 법사님께서 불교의 핵심이 무엇이냐고 질문했을 때, '연기'라는 대답을 내가 했다. 그러면서 '민중불교적인 설법으로 젊은 불자를 만나려 않고 연기법을 열심히 설법하셨다면 궂이 내가 '연기'를 답하지 않았어도 됐을텐데...'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 이후 법사님의 설법은 정말 매력적이셨다. 나 혼자만의 느낌이겠지만, 어떻게 이렇게 변하실 수가 있을까 의아할 정도였다. 특히, 출가 후 모셨던 '원주불교신행단체연합회 창립3주년 및 원주불교청년회 창립21주년 기념 법륜스님초청대법회'(2001.12.3. KBS원주방송국 공개홀)에서 보여주신 스님의 미소는 정말 잊을 수 없는 큰 스승의 모습이었다. 정토회의 법륜스님, 바로 그 분 이시다.

 

학교 안에서는 대단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강력한 카리스마로 이념화 불교학생회를 운동전면에 세우려던 의지가 선거패배로 좌절되자 이들은 법회에 비협조적이기 시작했다. 법회는 제대로 참석치 않고 써클룸 등에서 이념화교육에만 치중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불교학생회는 목적이 아니라 삼민주의세상 구현을 위한 민중확보 수단에 불과하다고 판단되고 있었다.

 

불교학생회장 자격으로 써클연합회에 참석했다. '대학은 실현을 위한 장소이기보다는 미래의 실현을 위한 준비의 장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불교학생회는 삼민주의이념보다는 불교가 목적이며, 우선입니다'라는 요지의 발언을 했다. 많은 인원의 각 써클 대표들은 놀라운 표정들이 역력했다. 그러나 나는 우리의 입장을 명확히 해야한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발언했다.

 

그들은 집요했다. 부처님의 정법을 근거로 하는 우리의 행보가 이성적이었다고 치자면 군사독재 후유 의 사회현상에 터전한 그들의 행보는 감성적이었다. 우리가 우리의 힘만으로 회를 운영하고 회원을 관리했다면 그들은 학교내 운동권 모두의 세력으로 우리와 상대했을 것이다. 최경수라는 법동생이 2학기 써클연합회장을 맡았고, 써클연합회에서의 불교학생회는 우리 차지가 아니었다. 그는 곧 수배령을 피해 잠적했다. 이념의 차이(그는 삼민, 나는 불교)를 비켜놓은 우리(규생이 그랬듯이 경수와도)는 참 좋은, 소위 '말발이 통하는' 형 동생이었는데, 불교내에서의 불교아님(또는 불교인 척)이 초래한 세력간 대립은 (감성적으로 민감할 또래인 회원들의 흔들림과 수적열세, 그리고 적극적인 이념화 세력에 의해 우리의)존재의 당위성을 위협받는 지경으로까지 내닿고 있었다.

 

어쩌면 두려움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대로 조금의 시간이 더 지나면 부산대학교 내에 순수불교를 지향하는 젊음은 더 이상 존재치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을 거다. 결국, 우리는 우리를 지키기로 결정했다. 더이상 그들과의 대립으로 수행을 삼는 허비적인 생활에 머무르지 말자고 했다. 그러나 그들을 가라하기에는 우리는 이미 소수였다. 불교학생회란 이름의 기득권을 포기하고 우리가 나오기로 했다. 1984년도 2학기가 끝나갈 무렵, 금강사 법회에는 비장함이 감돌고 있었다. 회장은 말했다. '우리 회원중에 회를 떠나고자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 회를 떠나고자 하시는 회원님들께서는 한 분씩 차례로 나오셔서 인사하시기 바랍니다.' 20여명의 회원들이, 혹은 울면서,불교학생회와의 작별을 인사했다. 마지막으로 나도 인사했다. '오늘 여러 회원들의 탈회에 대한 책임으로 저는 회장직을 사임합니다. 또한, 회원의 자격으로 저도 불교학생회를 탈회합니다.'

 

금정산 초입에 자리한 부산대학교 맨 위에 범어사 말사인 달마사가 있다. 정기법회는 금강사에서 열리지만 학교에서 쉬 닿는 곳에 있는 달마사는 우리들이 늘 찾아 기도하는 또하나의 모임터였다. 산만한 몸집의 성곤스님은 우리들 차 대접하시느라 공부에 지장이 많으셨을 거다. 불교학생회를 탈퇴한 우리들은 달마사로 향했다. 우리법회는 부산대학교불교정진회로 이름하였다. 그날 정진회의 창립이 달마사법당에서 선포되었고, 초대회장으로 조성래씨가 선출되었다. '지키기 위해 떠났음'을 잊지 않기로, 그에 걸맞는 정진회를 만들어 가기로 우리들은 궂게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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