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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스님 이야기

부처님은 왜 오셔야만 했을까(근본경전연구회 해피법당 190512)

부처님은 왜 오셔야만 했을까(근본경전연구회 해피법당 190512)

[동영상] https://youtu.be/leLZbMPySJY

 

부처님께서는 왜 오셔야만 했을까?

 

죽으면 다시는 태어나지 않겠다고 말하는 어떤 법우님에게 방법은 아시느냐?’고 물었습니다. 답하기 어려운 질문입니다.

 

부처님께서도 전생의 삶에서는 태어나지 않기 위한 방법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어떤 목적을 가지고 선택적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태어나야하는 조건의 상태 즉 태어나지 않기 위한 조건을 갖추지 못해서 태어나야 했다는 측면으로 설명하였습니다.

 

무명(無明)과 갈애라는 태어남으로 이끄는 조건들을 제거하지 못하고 죽으면 몸으로 간다(kāyassa bhedā kāyūpago hoti)(SN 12.19-우현 경)(http://sutta.kr/bbs/board.php?bo_table=nikaya06_02_01&wr_id=19&sca=%C4%81h%C4%81ra)은 말합니다. 그러나 그 조건들을 제거하면 죽음 이후에 몸으로 가지 않습니다. 해탈이고, 열반의 실현이고, 윤회에서 벗어나는 이것이 깨달음입니다.

 

이런 설명의 연장선상에서 깨달음의 의미를 알아보았는데, brahmāyusuttaṃ (MN 91-브라흐미유 경) 등은 이렇게 말합니다.

 

“abhiññeyyaṃ abhiññātaṃ, bhāvetabbañca bhāvitaṃ.

pahātabbaṃ pahīnaṃ me, tasmā buddhosmi brāhmaṇa.

 

실답게 알려져야 할 것은 실답게 알려졌고, 닦아져야 할 것은 닦아졌고

나에게서 버려져야 할 것은 버려졌다. 바라문이여, 그래서 나는 부처[()]이다.

 

()를 알고, 고집(苦集)을 버리기 위해 고멸도(苦滅道)를 닦아서 고멸(苦滅)이 실현을 실현한 나는 부처이다.

 

이런 이야기를

 

한 문장으로 압축한 부처님 가르침

 

사실에 괴리(乖離)된 삶은 괴로움을 만들고[()]

사실에 부합(符合)한 삶은 행복을 만든다[고멸(苦滅)]

 

사실 = 삼법인(三法印)[무상(無常)-()-무아(無我)]

 

불교(佛敎)는 사는 이야기

 

마음이 몸과 함께 세상을 만나는 이야기의 어디어디에 어떤 문제가 있어서 괴로움이 생기는 지의 설명이 연기(緣起) 곧 십이연기(十二緣起)이고, 그 문제의 자리자리에 어떻게 대응해서 문제를 해소함으로써 괴로움을 생기지 않게 하는지의 설명이 고멸(苦滅)도 즉 팔정도(八正道)입니다.

 

를 중심으로 설명하였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의 깨달음이 이렇게 다시 태어나지 않음의 실현정도를 의미한다고 하면 불교가 너무 소박해지는 것은 아닌지의 측면에서도 접근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삶은 심오합니다. 특히, takka[갈애의 형성 또는 자기화 과정]의 발견과 해석 그리고 그 안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존재하는 것들 가운데 가장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이 깨달음은 삶의 심오함의 끝에 닿은 깨달음입니다. 불교가 삶의 현실을 떠나지 않고, 삶의 문제[()]의 해결을 목적으로 하는 한[고멸(苦滅)], 이것은 그 궁극입니다.

 

불교를 형이상학적 관점에서 접근하려 하지 않고, 설하신 그대로의 의미로 접근한다면, 이 깨달음이야말로 최고의 깨달음입니다. 이것 이상의 다른 깨달음은 없습니다. 이런 접근으로 인해 불교가 소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이런 접근의 우수성을 볼 수 있는 눈을 길러야 할 것입니다.

 

이런 이해 위에서 부처님은 왜 오셔야만 했는지의 문제에 대한 대답은 분명합니다. 태어나지 않기 위한 조건을 완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죽음에 의해 강제되어 태어나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태어남의 삶 위에서 태어나지 않기 위한 조건[번뇌의 부서짐-누진(漏盡)]을 완성하여 태어나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그분이 바로 부처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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