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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가르침의 토대

0 592 2018.05.30 12:54

[Ⅰ] 가르침의 토대


1. 부처님은 「업(業)을 말하는 자[kammavādī]이고 결실 있음[kiriyavādī]을 말하는 자」라고 불립니다. 


「사문 고따마는 업을 말하고 결실 있음을 말하고 바라문들에게 아무런 해악을 도모하지 않습니다.」 DN4/DN5/MN95


우호적인 바라문들이 부처님[사문 고따마]를 설명하는 말입니다. 농사를 지으면 풍작이든 흉작이든 결실이 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는데, 이런 법(法)을 설하는 부처님을 찾아 만나고 가르침을 청하는 것은 도움 된다는 대화에서입니다.


그럴 때 업(業)과 결실 있음이라는 두 가지는 부처님을 대표하는 개념이면서 삶에 대한 바른 이해입니다. 그래서 업을 부정하고 결실 있음을 부정하는 것은 부처님을 거부하는 것이고 삶에 대한 삿된 시각을 가지는 것입니다.


경은 이 두 가지를 부정하면 죽은 뒤에 하늘에 태어날 수 없다고 하는데, 삶을 향상해 하늘에 태어나기 위한 조건을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그러면 사명외도(邪命外道)로서 몸이 무너진 뒤에 천상에 태어난 자가 있습니까?" "왓차여, 지금부터 91겁을 내가 기억해보더라도, 단 한 사람을 제외하면, 천상에 태어난 어떤 사명외도를 실답게 알지 못합니다. 그는 업을 말하고 결실 있음을 말하는 자였습니다.」 MN71


2. 가르침의 토대


과거-미래-현재의 모든 부처님들은 공통되게 ①업(業)을 말하고, ②결실 있음을 말하고, ③노력을 말합니다. 업(業)에는 결실이 있으니 좋은 결실을 얻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농사를 짓는 행위에는 풍작이든 흉작이든 결실이 있고 풍작을 거두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의미입니다.


「비구들이여, 과거세의 아라한·정등각들인 그분 세존들께서는 업을 말하고 결실 있음을 말하고 노력을 말하셨다. 비구들이여, 쓸모없는 인간 막칼리는 그분들께도 그의 교설로써 이렇게 반박한다. ㅡ '업도 없고, 결실도 없고, 노력도 없다.'라고. 


비구들이여, 미래세의 아라한·정등각들인 그분 세존들께서도 업을 말하고 결실 있음을 말하고 노력을 말 할 것이다. 비구들이여, 쓸모없는 인간 막칼리는 그분들께도 그의 교설로써 이렇게 반박한다. ㅡ '업도 없고, 결실도 없고, 노력도 없다.'라고. 


비구들이여, 지금의 아라한-정등각인 나도 업을 말하고 결실 있음을 말하고 노력을 말한다. 비구들이여, 쓸모없는 인간 막칼리는 나에게도 그의 교설로써 이렇게 반박한다. ㅡ '업도 없고, 결실도 없고, 노력도 없다.'라고.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많은 물고기들의 손해와 괴로움과 불행과 고통을 위해 강 입구에 그물을 펼치는 것과 같다. 비구들이여, 생각건대 참으로 이렇게 쓸모없는 자 막칼리는 많은 중생들의 손해와 괴로움과 불행과 고통을 위해 세상에 태어난 자이다.」 (AN 3.138)


부처님을 대표하는 두 가지 개념 위에서 노력을 통해 행복한 삶을 실현하는 것이 모든 부처님들의 가르침 즉 불교(佛敎)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막칼리라는 사람은 이 세 가지를 부정하는 교설을 세우고, 마치 강 입구의 그물처럼 많은 사람들을 괴로움으로 이끈다는 것입니다. 


막칼리는 사명외도(邪命外道)의 스승입니다. (AN 1.308-321)에 의하면, 바른 견해를 가져서 올바로 보는 자인 부처님은 많은 사람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많은 사람의 행운을 위해, 신과 인간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세상에 태어난 한 사람입니다. 반면에 삿된 견해를 가져서 거꾸로 보는 자인 막칼리는 많은 사람의 손해와 괴로움을 위해, 많은 사람의 불행을 위해, 신과 인간의 손해와 괴로움을 위해 세상에 태어난 한 사람입니다. 


업(業)과 결실 있음과 노력을 말하는 부처님은 바른 견해를 가져서 올바로 보는 자여서 신과 인간들을 행복으로 이끌고, 업도 없고 결실도 없고 노력도 없다고 말하는 막칼리는 삿된 견해를 가져서 거꾸로 보는 자여서 신과 인간들을 괴로움으로 이끈다는 것입니다.


경은 이런 이해 위에서 더 구체적인 비교를 제시합니다.


부처님의 법은 잘 설해졌기 때문에 이 잘 선언된 법(法)과 율(律)에서는 ①부추기는 자도 부추기는 것을 사실대로 실천하는 부추겨진 사람도 그들 모두는 많은 복(福)을 쌓는다, ②받는 사람에 의해서 양이 알려져야 한다. 주는 사람에 의해서가 아니다, ③게으른 자는 괴롭게 머문다, ④노력을 시작한 자는 행복하게 머문다고 합니다.


그러나 막칼리의 법은 잘못 설해졌기 때문에 ①부추기는 자도 부추기는 것을 사실대로 실천하는 부추겨진 사람도 그들 모두는 많은 비복(非福)을 쌓는다, ②주는 사람에 의해서 양이 알려져야 한다. 받는 사람에 의해서가 아니다, ③노력을 시작한 자는 괴롭게 머문다, ④게으른 자는 행복하게 머문다고 합니다.


또한, (AN 3.62)은 세 가지 외도의 주장[삼종외도(三種外道)]에 대해 그 주장이 사실이라면 ②결실 없음으로 정착된다고 하면서 그럴 경우에는 「①행해야 할 것과 행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해 ③열의와 노력이 없다.」라고 합니다. 즉 바른 견해를 가져서 올바로 보는 자인 부처님에 의해 잘 설해진 법이 아니라 삿된 견해를 가져서 거꾸로 보는 자에 의해 잘못 설해진 법이라는 것입니다.


이때, 세 가지 외도의 주장과 견해는 ‘사람이 즐거움이나 괴로움이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을 경험하는 것은 모두 ①전생의 행위가 원인, ②신(神)의 창조가 원인, ③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음[무인무연(無因無緣)]이다.’입니다. 


그러니 ①전생의 행위가 원인, ②신(神)의 창조가 원인, ③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음[무인무연(無因無緣)]이라는 세 가지는 막칼리에게서와 같이 삿된 견해를 가져서 거꾸로 보는 자에 의해 잘못 설해진 법이라고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바르지 않은 법으로부터 물러나 바른 법에 서야합니다.


이런 이해에 의하면 ①업(業)과 ②결실 있음과 ③노력의 세 가지는 부처님 가르침의 토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3. 바른 견해


불교신자에게는 이런 토대 위에서의 삶이 바른 신행(信行)입니다. 토대를 벗어나 잘못 설해진 법 위에서 살아가면 그것은 바르지 못한 신행(信行)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괴로울 것인지 행복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근본 사유가 되는 것입니다[고(苦)와 고멸(苦滅)].


그러면 이런 토대 위에서의 삶 즉 바른 신행(信行)은 어떻게 시작됩니까?


나와 세상을 보는 시각 즉 견해의 구축입니다. 나란 존재에 대한 그리고 내 삶의 터전인 세상에 대한 바른 앎을 바른 견해[정견(正見)]라고 하는데, 향상으로 이끌리는 삶의 첫 번째 조건입니다.


경들은 다양한 관점에서 바른 견해를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 중 가장 원초적 형태의 바른 견해는 (DN23)을 말할 수 있는데, 「①저 세상은 있다, ②화생(化生)하는 중생은 있다, ③업(業)에는 과(果)와 보(報)가 따른다.」의 세 가지입니다.


1) 저 세상은 있다 → 윤회(輪迴)


나는 몸과 마음이 함께하여 구성됩니다. 그런데 몸은 100년 안팎을 삽니다. 그러면 몸의 기능이 다해 버려짐 즉 죽으면 마음은 어떻게 됩니까? 몸과 함께 버려지고 마는 것입니까, 아니면 새로운 몸을 만나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까?


몸으로의 삶은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사건들의 전개를 의심할 바 없이 직접 압니다. 그러나 마음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어쨌든 생겨나는 것이고 몸과 함께 유지되는 것일 텐데, 몸이 죽은 뒤에는 어떻게 되는지 직접 보아 알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마음은 몸보다 훨씬 더 나의 삶의 중심이 됩니다. 죽음 이후에 마음이 어떻게 되는 것인지 알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부처님은 이 질문에 답을 줍니다. ㅡ ‘저 세상은 있다.’라고.


마음은 몸 따라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서 몸이 죽으면 새로운 몸을 만나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 때문에 새로운 몸으로 사는 세상 즉 저 세상은 있다고 단언적인 답을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질문에는 세 가지 경우의 답이 있습니다. 첫째, 몸이 죽으면 마음도 몸과 함께 버려진다는 답인데, 단견(斷見) 또는 단멸론(斷滅論)입니다. 둘째, 몸이 죽어도 따라 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기 상태를 유지하는 참된 것 즉 아(我)라는 답인데, 상견(常見) 또는 상주론(常住論)입니다. 셋째, 몸이 죽어도 따라 죽지 않지만 자기 상태를 유지하는 참된 것이 아니어서 삶의 과정을 누적하며 매 순간 변화한다는 답인데, 연기(緣起)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부처님의 단언적인 답변 즉 ‘저 세상은 있다.’는 세 번째 경우 즉 연기(緣起)하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마음이 연기(緣起) 즉 조건에 의해 생겨나는 것인지의 규명이 십이연기(十二緣起)인데 부처님 깨달음의 중심입니다. 


2) 화생(化生)하는 중생은 있다 → 오도윤회(五道輪廻)


저 세상이 있다는 것은 몸의 죽음 이후에 마음은 새로운 몸과 함께 다시 태어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다시 태어나는 곳은 어떤 세상입니까? 사람 몸을 가지고 인간 세상에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까, 아니면 다른 세상도 있는 것입니까?


(MN12)에서 부처님은 중생들이 윤회하는 세상을 다섯 갈래로 설명하는데 지옥(地獄), 축생(畜生), 아귀(餓鬼), 인간(人間), 천상(天上)입니다. 이렇게 세상은 다섯 갈래로 구분되기 때문에 죽은 뒤 다시 태어나는 자리도 이 다섯 갈래 가운데 한 곳인 것입니다.


 [첨부] 오도윤회(五道輪廻) 


또한, 같은 경은 네 가지 태어남 즉 존재의 영역을 설명하는데 난생(卵生), 태생(胎生), 습생(濕生), 화생(化生)입니다. 이때, 생명체가 그 껍질을 깨고 태어나면 난생이고, 생명체가 태의 막을 벗고 태어나면 태생, 생명체가 썩은 물고기, 부패한 시체, 부패한 굳은 우유에서나 물웅덩이나 연못에서 태어나면 습생, 천인(天人)들이나 지옥에 태어난 자들이나 어떤 인간들이나 죽은 뒤에 벌을 받아야 하는 어떤 존재들이 화생이라고 정의됩니다.


그런데 난생(卵生), 태생(胎生), 습생(濕生)은 일반적으로 눈에 보이는 존재의 영역이어서 세상의 다섯 갈래 중 인간과 축생에 해당됩니다. 반면에 화생(化生)은 일반적으로는 보이지 않는 존재의 영역입니다. 세상의 다섯 갈래 가운데 지옥과 아귀와 천상에 해당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보이는 것은 잘 압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보이는 것만 믿으라고 권장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특히, 태어남 즉 존재의 영역은 지금 내 삶의 터전이고 죽음 이후에 다시 태어나 살아가야 하는 그 자리이기 때문에 정말 없는 것인지 아니면 보는 능력의 부족 때문에 보지 못하지만 사실은 있는 것인지 알아야 합니다. 


부처님은 이 질문에도 답을 줍니다. ㅡ ‘화생(化生)하는 중생은 있다.’라고.


인간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깨달음 즉 완성된 지혜의 눈에는 보이는 존재의 영역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주제는 중요합니다. 비록 인간으로 태어나 살고 있지만 죽음 이후를 담보할 수 없는 현실 위에서 지금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없다고 결정하기에는 너무 무거운 주제인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에게서 완성된 지혜의 눈을 빌려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인데 부처님은 화생(化生)하는 중생의 존재를 이렇게 단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알아야 합니다. ㅡ ‘내가 죽은 뒤 다시 태어나는 자리는 눈에 보이는 존재 영역인 난생-태생-습생의 인간과 축생 그리고 보이지 않는 존재 영역인 화생의 지옥-아귀 천상의 다섯 갈래가 있다. 나는 이 몸으로의 삶을 마친 뒤에는 다섯 갈래 중 어느 한 자리에 태어날 것이다.’라고.


3) 업(業)에는 과(果)와 보(報)가 따른다 → 태어남의 선택


이렇게 저 세상이 있어서 윤회(輪廻)하고, 다시 태어나는 자리는 지옥(地獄)-축생(畜生)-아귀(餓鬼)-인간(人間)-천상(天上)의 다섯 갈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나는 죽은 뒤 어디에 태어나야 할 것입니까?


당연히 지옥-축생-아귀의 세상에는 태어나면 안 됩니다. 되도록 하늘에 태어나야 하고, 부족하더라도 인간으로는 태어나야 합니다. 스스로 괴로운 삶을 선택하는 것은 어리석음입니다.


그래서 이 주제는 어떻게 하면 윤회(輪廻)의 과정에서 하늘에 태어나 오래토록 행복하게 살 것인지로 귀결됩니다.


그리고 부처님은 이 질문에도 답을 줍니다. ㅡ ‘업(業)에는 과(果)와 보(報)가 따른다.’라고.


업(業) 즉 행위는 과(果) 즉 결실과 보(報) 즉 실제적 경험을 초래한다는 사실의 선언입니다. 이런 행위에는 이런 과(果)와 보(報)가 따라오고, 저런 행위에는 저런 과(果)와 보(報)가 따라온다는 법칙의 제시입니다. → 「행위가 가지는 과(果)와 보(報)의 법칙성」 → 「업인과보 삼세윤회(業因果報三世輪迴)」


경은 많은 곳에서 고(苦)의 과(果)-보(報)를 초래하는 업(業)과 락(樂)의 과(果)-보(報)를 초래하는 업(業)을 설명하는데, 살아서의 행복과 죽은 뒤에 더 좋은 삶을 이어지게 하는 방법의 제시입니다.


다시 말하면, 살아서 행복하기 위해서는 락(樂)의 과(果)-보(報)를 초래하는 업(業)을 지으면 되고, 죽어서 더 좋은 삶을 이어지게 하기 위해서도 락(樂)의 과(果)-보(報)를 초래하는 업(業)을 지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업(業)이 고(苦)의 과(果)-보(報)를 초래하는 것인지 락(樂)의 과(果)-보(報)를 초래하는 것인지는, 부처님에 의하면, 예외를 인정하지 않는 법칙성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①저 세상은 있다, ②화생(化生)하는 중생은 있다, ③업(業)에는 과(果)와 보(報)가 따른다.」의 세 가지는 우리 삶의 현실 위에서 ①윤회(輪迴)와 ②윤회하는 세상의 구성과 ③금생(今生)과 내생(來生)에 걸친 행복의 방법에 대한 시각을 제시해 줍니다. 즉 바른 견해입니다.


4. 눈


이렇게 바른 견해는 행복을 담보하는 시각 즉 눈입니다. 어쩌면 불교신자(佛敎信者)가 되는 이유를 이런 눈을 가지기 위해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눈으로 살아가면 행복한 삶이 보장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눈에 대한 중요한 관점을 알려주는 경이 있습니다.


(AN 3.29)은 장님 경[andhasuttaṃ]이라는 이름의 경입니다. 


경은 두 개의 눈을 소개하는데, ①얻어지지 않은 재물을 얻을 것이고 또는 얻어진 재물을 늘릴 것이라는 하나의 눈과 ②유익(有益)과 무익(無益)의 법들을 알 것이고, 결점이 있고 결점이 없는 법들을 알 것이고, 저열하고 수승한 법들을 알 것이고, 악(惡)과 선(善)이 상대가 되어 함께하는 법들을 알 것이라는 다른 하나의 눈입니다.


경은 다시 세상에는 세 가지 사람이 있다고 하는데, 장님과 외눈인 사람과 두 눈을 가진 사람입니다.


장님은 두 가지 눈을 모두 갖지 못한 사람입니다. 비록 육체적 눈을 가지고 세상을 보며 살아간다 해도 세간적 부(富)의 창출과 향상된 삶의 추구라는 두 가지 모두가 배제된 사람입니다.


외눈인 사람은 세간적 부(富)를 얻는 능력을 가졌지만 소유에 중심을 둔 낮은 삶을 넘어 더 큰 행복이 담보된 향상된 삶을 추구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두 눈을 가진 사람은 세간적 부(富)를 얻는 능력에 더해 소유에 중심을 둔 낮은 삶을 넘어 더 큰 행복이 담보된 향상된 삶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장님은 재물도 얻지 못하고, 공덕(功德)도 쌓지 못한 탓에 양쪽[이 세상과 저 세상]에서 불행을 얻게 됩니다. 외눈인 사람은 도둑질과 사기와 거짓 등 정당하지 않은 방법까지 동원해서 재물을 얻는 탓에 죽은 뒤에는 지옥에 가서 고통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 눈을 가진 사람은 정당한 방법으로 재물을 얻고 그 깨끗한 재물로 베풂을 실천하는 까닭에 죽은 뒤에는 좋은 곳에 태어나 슬픔 없이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경은 장님과 외눈인 사람을 멀리하고, 두 눈을 가진 훌륭한 사람과 교류하라고 가르칩니다.


불교신자는 두 눈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세간적 부(富)를 가질 수 있는지 부처님 가르침 안에서 배워 알고 실천하고, 어떻게 더 큰 행복이 담보된 향상된 삶을 추구해야 하는지 부처님 가르침 안에서 배워 알고 실천해야 합니다. 그러면 갈수록 괴로움은 줄어들고 행복은 늘어나게 됩니다. 살아서도 행복하고 죽어서는 더 좋은 삶이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5. 불교신자(佛敎信者) 되기


이렇게 부처님에 의해 설해진 가르침의 토대 위에서 바른 견해, 바른 눈을 가진 삶이 바른 신행(身行)입니다. 그리고 이런 신행(身行)을 실천하는 사람을 불교신자(佛敎信者)라고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불교신자가 됩니까? 어떤 기준 위에서 스스로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까? 어떻게 남들과 함께 행복한 삶을 실현해야 합니까?


(AN 8.25)는 이 문제에 답을 줍니다.


“대덕이시여, 어떻게 재가신자가 됩니까?”

“마하나마여, 의지처인 불(佛)에게로 가고, 의지처인 법(法)에게로 가고, 의지처인 승(僧)에게로 간다. 그만큼 재가신자가 된다.” → 「삼귀의(三歸依)」 - 30 쪽 참조.


“대덕이시여, 어떻게 계(戒)를 지닌 재가신자가 됩니까?”

“마하나마여, 재가 신자는 생명을 해치는 것을 멀리 여의고, 주지 않은 것을 가지는 것을 멀리 여의고, 삿된 음행을 멀리 여의고, 거짓말하는 것을 멀리 여의고, 방일의 원인이 되는 술과 중독성 물질을 멀리 여읜다. 마하나마여, 이렇게 계를 지닌 재가신자가 된다.” → 「오계(五戒)」 - 101 쪽 참조.


“대덕이시여, 어떻게 재가신자가 자기의 이익은 위하지만 남의 이익은 위하지 않는 실천을 하는 자가 됩니까?”

“마하나마여, 재가 신자가 ①자기만 믿음을 갖추고 남에게는 믿음을 갖추도록 부추기지 않는다. ②자기만 계를 갖추고 남에게는 계를 갖추도록 부추기지 않는다. ③자기만 보시를 갖추고 남에게는 보시를 갖추도록 부추기지 않는다. ④-1)자기만 비구를 만나기를 좋아하고 남에게는 비구를 만날 것을 부추기지 않는다. ④-2)자기만 정법을 듣기를 좋아하고 남에게는 정법을 바라도록 부추기지 않는다. ④-3)자기만 들은 법을 마음에 새기고 남에게는 법을 마음에 새기도록 부추기지 않는다. ④-4)자기만 들은 법의 의미를 검증하고 남에게는 의미를 검증하도록 부추기지 않는다. ④-5)자기만 의미와 법을 이해한 뒤에 열반으로 이끄는 가르침을 실천하고 남에게는 열반으로 이끄는 가르침을 실천하도록 부추기지 않는다. 마하나마여, 이렇게 재가신자가 자기의 이익은 위하지만 남의 이익은 위하지 않는 실천을 하는 자가 된다.” → 「믿음-계(戒)-보시(布施)-지혜(智慧)①」


“대덕이시여, 어떻게 재가신자가 자기의 이익도 위하고 남의 이익도 위하는 실천을 하는 자가 됩니까?”

“마하나마여, 재가 신자가 ①자기도 믿음을 갖추고 남에게도 믿음을 갖추도록 부추긴다. ②자기도 계를 갖추고 남에게도 계를 갖추도록 부추긴다. ③자기도 보시를 갖추고 남에게도 보시를 갖추도록 부추긴다. ④-1)자기도 비구를 만나기를 좋아하고 남에게도 비구를 만날 것을 부추긴다. ④-2)자기도 정법을 듣기를 좋아하고 남에게도 정법을 바라도록 부추긴다. ④-3)자기도 들은 법을 마음에 새기고 남에게도 법을 마음에 새기도록 부추긴다. ④-4)자기도 들은 법의 의미를 검증하고 남에게도 의미를 검증하도록 부추긴다. ④-5)자기도 의미와 법을 이해한 뒤에 열반으로 이끄는 가르침을 실천하고 남에게도 열반으로 이끄는 가르침을 실천하도록 부추긴다. 마하난마여, 이렇게 재가신자가 자기의 이익도 위하고 남의 이익도 위하는 실천을 하는 자가 된다.”

→ 「믿음-계(戒)-보시(布施)-지혜(智慧)②」


이렇게 삼보귀의(三寶歸依)로써 불교신자가 되고, 오계(五戒)의 기준 위에서 스스로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도 믿음-계(戒)-보시(布施)의 갖춤 위에서 배워 실천하고, 남들에게도 믿음-계(戒)-보시(布施)의 갖춤 위에서 배워 실천하도록 부추길 때 남들과 함께 행복한 삶을 실현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불교신자가 되고, 이렇게 자기의 삶을 향상하고, 이렇게 세상의 많은 중생들을 구제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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