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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마음

0 585 2018.05.30 13:02

[Ⅱ] 마음


나는 몸과 마음이 함께하여 구성됩니다. 몸 없이 마음만으로 존재할 수 없고, 마음 없이 몸만으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DN15)는 식(識)과 명색(名色)의 서로 조건 됨을 말하는데, 식(識)은 마음이고 명색(名色)의 색(色)은 몸입니다. 


그리고 식(識)은 삶의 과정에서 몸집을 부풀려 심(心)이 되는데, 심(心)이라고 불리는 이 마음이 행위의 원인입니다. 그래서 행위의 뿌리에 마음[심(心)]이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1. 몸


이때, 몸은 이렇게 정의됩니다. ㅡ 「사람의 몸은 물질이어서 사대(四大)로 구성된 것이고, 부모에 속한 것에서 생겨난 것이고, 밥과 응유가 집적된 것이고, 무상하고 쇠퇴하고 부서지고 해체되고 흩어지는 것이다.」  (SN 55.21)


몸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됩니다. 첫째, 행위의 수단입니다. 행위 즉 업(業)은 심(心)을 원인으로 하는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으로 설명되는데, 몸의 행위는 신업(身業)이고 말의 행위는 구업(口業)이며, 의(意)의 행위는 의업(意業)입니다. 몸과 말과 의(意)는 이렇게 행위의 수단인 것입니다. 


※ (AN 4.171)는 「몸이 있을 때 몸의 의도[행(行)]을 원인으로 안으로 락(樂)과 고(苦)가 일어난다. 말이 있을 때 말의 의도를 원인으로 안으로 락(樂)과 고(苦)가 일어난다. 의(意)가 있을 때 의(意)의 의도를 원인으로 안으로 락(樂)과 고(苦)가 일어난다.」라고 합니다. 몸의 의도 즉 신업(身業)을 위해서는 몸이 있어야 하고, 말의 의도 즉 구업(口業)을 위해서는 말이 있어야 하고, 의(意)의 의도 즉 의업(意業)을 위해서는 의(意)가 있어야 한다고 하는 것인데, 신(身)-구(口)-의(意)가 업(業) 즉 행위의 수단이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둘째, 인식의 수단[물질과의 접점]입니다. 인식은 마음[식(識)]이 몸과 함께 세상을 만나고 분별해 아는 것인데, 몸은 물질적인 세상 즉 색(色)[보이는 것], 성(聲)[들리는 것], 향(香)[냄새 맡아지는 것], 미(味)[맛보아지는 것], 촉(觸)[느껴지는 것]의 인식을 위한 접점입니다. ㅡ 안근(眼根)-이근(耳根)-비근(鼻根)-설근(舌根)-신근(身根).


마음[식(識)] ← 몸 → 물질세상


그런데 몸은 호흡에 의해서 생겨납니다. 들숨날숨 즉 호흡이 몸을 형성하는 작용[신행(身行)]이라고 정의되는데(MN44), 숨 쉬는 동안에는 살아있는 것이어서 몸이라고 불리지만 죽어 숨 쉬지 않으면 몸이 아닌 고깃덩어리에 불과해서 다른 생명들의 먹이가 되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ㅡ 「그것을 여기서 까마귀들이 쪼아 먹고, 독수리들이 쪼아 먹고, 매들이 쪼아 먹고, 개들이 뜯어먹고, 자칼들이 뜯어먹고, 많은 살아있는 벌레 떼가 파먹겠지만~」 (SN 55.21)


2. 마음


반면에 마음은 행위와 인식의 양면에서 주체가 됩니다. 마음[심(心)]이 몸을 수단으로 행위 하는 것이고, 마음[식(識)]이 몸을 접점으로 물질 대상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몸과 말과 의(意)로 행하는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의 뿌리에 마음[심(心)]이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음은 무엇입니까?


마음은 잘 정의되지 않습니다. 아마도 몸처럼 하나의 문장으로 정의할 수 있는 단순한 것이 아니기 때문일 것입니다. 몇 가지 교리적 이해에 의하면, 마음은 몸 없이는 존재 의미를 가지지 못해서 반드시 몸과 함께해야 하지만 몸이 죽어도 따라 죽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참된 것[아(我)-atman]도 아니어서[무아(無我)] 삶의 과정을 누적하며 변화하는 것입니다. 


→ 「상(常)하고 지속되고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식(識)은 없고, 무상(無常)하고 불만족스럽고 변하는 식(識)은 있다.」(SN22.94)


이렇게 마음은 몸의 죽음에서 함께 소멸하는 것[단견(斷見)-단멸론(斷滅論)]도 아니고, 몸 없이도 존재 의미를 가지는 참된 것[상견(常見)-상주론(常住論)]도 아닌 제3의 설명을 필요로 하는 어떤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제3의 존재 상태를 설명하는 것이 부처님 깨달음의 근간이 되는 연기(緣起) 곧 십이연기(十二緣起)입니다.


[참고] 마음 이해의 단초


하지만 마음 이해의 단초를 제공하는 교리는 발견할 수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두 가지를 들 수 있는데, 


1) 「이 사람이란 것은 여섯 가지 요소[육계(六界)]로 이루어진다.」 (MN140)


2) 「심(心)이라고도 의(意)라고도 식(識)이라고도 불리는 이것」 (SN12.61)


입니다. 


여섯 가지 요소[육계(六界)]는 지(地)-수(水)-화(火)-풍(風)-공(空)-식(識)입니다. 물질요소인 지(地)-수(水)-화(火)-풍(風)과 비어 있는 공간인 공(空)이 함께하여 구체적 물질 존재를 구성한 것으로의 몸[색(色)](*)과 대등한 존재 상태여서 몸에 종속되지 않는다고 정의되는 식(識) 즉 마음입니다. 


(*) 벗들이여, 마치 목재를 조건으로, 덩굴을 조건으로, 짚을 조건으로, 진흙을 조건으로, 공간이 둘러싸여 집이란 이름을 얻게 되는 것처럼, 벗이여, 뼈를 조건으로, 근육을 조건으로, 살을 조건으로, 피부를 조건으로, 공간이 둘러싸여 몸[색(色)]이란 이름을 얻게 됩니다. (MN 28)


그래서 마음은 몸이 죽어도 따라 죽지 않습니다. 다만, 함께해서 나를 구성하는 것이기 때문에 죽는 순간 새로운 몸을 만나 다음 생을 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때, 식(識)은 인식하는 마음입니다. 지난 삶의 누적인 식(識)은 몸과 함께 세상을 만나는 인식과정을 통해 새로운 식(識)을 새끼칩니다. 새끼쳐진 식(識)은 몸 안에서 이어지는 독립된 인식과정을 통해 몸집을 부풀려 심(心)이 되는데, 심(心)은 행위 하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식(識)이든 심(心)이든 몸과 함께 작용하는 영역에서는 의(意)라고 불리는데, 행위와 인식의 양면에 적용됩니다. 


그런데 새끼쳐진 식(識)에 의한 독립된 인식과정은 상(想)의 간섭 가운데 수(受)를 인식하는 상(想)과 수(受)의 과정입니다. 그래서 (MN44) 등은 상(想)과 수(受)가 심(心)을 생겨나게 하는 작용[심행(心行) = 상(想)-수(受)]라고 정의합니다. 


※ 마음[심(心)]이 어떻게 생겨나는지의 이해는 중요합니다. 삶의 중심에 대한 부처님의 설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불교(佛敎) 안에서 오랫동안 이 설명이 상실되어 왔습니다. 마음이 무엇인지. 어떻게 생겨나서 어떤 존재 상태를 가지는 것인지 그리고 마음을 중심에 둔 나는 누구인지에 대한 부처님의 설명이 감춰져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수행자들은 오랜 세월 ‘마음은 무얼까?’의 문제를 직접 풀기 위해서 노력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어렵습니다. 아마도 부처님의 깨달음에 의하지 않고는 풀어지지 않는 문제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근본경전연구회 해피법당은 경전의 가르침을 직접 꿰는 공부 방법[니까야로 푸는 니까야]에 의해 이 문제에 대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되살려 내었습니다.


이 가르침에 의하면, 삶은 심(心)의 형성과정과 형성된 심(心)의 행위과정으로 구분됩니다. 대략적 표현으로는 심(心)의 행위과정에서 괴로움이 생겨나는 조건관계를 설명하면 십지연기(十支緣起)이고, 심(心)의 형성과정까지를 포함한 삶의 전체과정에서 괴로움이 생겨나는 조건관계를 설명하면 십이연기(十二緣起)입니다.


또한, 심(心)의 행위과정에서 괴로움을 야기하는 문제를 해소하는 수행(修行)은 사념처(四念處)이고, 심(心)의 형성과정의 문제를 해소하는 수행은 사마타와 위빳사나입니다.


그래서 불교수행의 큰 틀은 「사념처 → 사마타-위빳사나」인 것입니다.


삶과 수행 - 심(心).png


한편, 심(心)의 형성과정의 상실은 그 자리의 문제를 해소하는 방법으로의 사마타와 위빳사나의 본질의 훼손으로 이어집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을 재현(再現)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에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바로 잡아야 할 것입니다.


중생들에게 상(想)은 병들어 있는데, 병든 상(想)은 번뇌[루(漏)]라고 불립니다. 그래서 중생들에게 심(心)은 번뇌의 영향을 받아 무명(無明)과 탐(貪) 또는 진(嗔)의 오염 상태로 생겨납니다[유위(有爲)]. 오염된 심(心)은 신구의(身口意)로 오염된 행위를 하고[행(行)], 오염의 정도에 따라 욕계(慾界)-색계(色界)-무색계(無色界)의 중생 세상에 식(識)으로 머뭅니다. 그리고 머문 식(識)은 이전 삶의 과정을 통해 누적된 식(識)의 무더기[식온(識蘊)]에 더해져 쌓임으로써 식온(識蘊)을 바꿉니다.


이렇게 지난 삶의 누적인 식(識)에 의해 새끼쳐진 식(識)이 지금 순간을 살고, 그 결과로 머물고, 다시 식(識)에 더해져 식(識)의 누적 상태를 바꾸는 것이 마음의 입장에서 진행되는 삶의 골격이 됩니다[자기증식에 의한 변화].


3. 나


이런 몸과 이런 마음이 만나 나를 이룹니다. 마음이 몸과 함께한 상태여서 유신(有身)이라고도, 마음 이해의 단초에서 나타나는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 오온(五蘊)에 집착된 상태여서 오취온(五取蘊)이라고도, 식(識)과 명색(名色)의 서로 조건 됨에 의한 존재 상태여서 유(有)라고도 불리는 나는 몸과 마음의 생존기간의 불균형 때문에 윤회(輪迴)합니다.


물질이어서 100년 안팎을 사는 몸이 죽어도 생존 기간이 특정되지 않는 마음은 함께 소멸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삶은 이 몸으로의 삶과 다음 몸으로의 삶으로 구분되어 알려져야 하고, 현명한 사람이라면 이 두 가지 삶 모두에서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금생(今生)과 내생(來生) 모두에서 행복한 과(果)와 보(報)를 가져오는 업(業) 즉 행위로써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앞에 소개한 (SN55.21)은 「두려워하지 말라, 마하나마여. 두려워하지 말라, 마하나마여. 그대의 죽음은 나쁘지 않을 것이다. 임종은 나쁘지 않을 것이다. 마하나마여, 누구든지 오랜 세월 믿음을 닦은 마음과 계를 닦은 마음과 배움을 닦은 마음과 보시를 닦은 마음과 지혜를 닦은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 몸은 물질이어서 사대(四大)로 구성된 것이고, 부모에 속한 것에서 생겨난 것이고, 밥과 응유가 집적된 것이고, 무상하고 쇠퇴하고 부서지고 해체되고 흩어지는 것이다. 그것을 여기서 까마귀들이 쪼아 먹고, 독수리들이 쪼아 먹고, 매들이 쪼아 먹고, 개들이 뜯어먹고, 자칼들이 뜯어먹고, 많은 살아있는 벌레 떼가 파먹겠지만, 오랜 세월 믿음을 닦고 계를 닦고 배움을 닦고 보시를 닦고 지혜를 닦은 이 마음은 위로 올라가고 특별한 곳으로 가게 된다.」 라고 합니다.


죽으면 다른 생명의 먹이가 되고 마는 이 몸과 달리 믿음-계-배움-보시-지혜를 닦은 마음은 하늘세상이라는 특별한 곳으로 가게 된다고 말하는데, 금생(今生)과 내생(來生) 모두에서 행복한 과(果)와 보(報)를 가져오는 업(業)에 대한 예시입니다.


또한, (SN 42.6)은 「“촌장이여,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크고 넓은 돌을 깊은 물속으로 던질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군중이 함께 모여 절하고 기도하고 합장하고 주위를 돌면서 말할 것입니다. ㅡ ‘올라오라, 크고 넓은 돌이여. 떠오르라, 크고 넓은 돌이여. 뭍으로 나오라, 크고 넓은 돌이여.’라고. 촌장이여, 이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러면 그 크고 넓은 돌이 많은 군중이 함께 모여 절하고 기도하고 합장하고 그의 주위를 돈 것을 원인으로 올라오고 떠오르고 뭍으로 나오겠습니까?” “아닙니다, 대덕이시여.” “촌장이여, 그와 같이 여기 어떤 사람은 생명을 해치고, 주지 않은 것을 가지고, 삿된 음행을 하고, 거짓말을 하고, 이간질을 하고, 욕설을 하고, 잡담을 하고, 간탐(慳貪)하고, 진에(瞋恚)하고, 삿된 견해를 가진 자입니다. 그런데 많은 군중이 함께 모여 절하고 기도하고 합장하고 주위를 돌면서 말할 것입니다. ㅡ ‘이 사람은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좋은 곳 하늘 세상에 태어나라.’라고. 그러나 그 사람은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상실과 비탄의 상태, 비참한 존재, 벌 받는 상태, 지옥에 태어날 것입니다.”」라고 하여 열 가지 악한 업[십악업(十惡業)]에 따르는 과(果)와 보(報)에 의해 죽은 뒤 지옥에 태어남을 설명합니다.


다시 「“촌장이여,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버터 단지나 기름 단지를 깊은 호수물속에 들어가서 깰 것입니다. 그러면 파편이나 조각은 아래로 가라앉을 것이고 버터나 기름은 위로 떠오를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군중이 함께 모여 절하고 기도하고 합장하고 주위를 돌면서 말할 것입니다. ㅡ ‘내려가라, 버터와 기름이여. 가라앉아라, 버터와 기름이여. 아래로 내려가라, 버터와 기름이여.’라고. 촌장이여, 이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러면 그 버터와 기름이 많은 군중이 함께 모여 절하고 기도하고 합장하고 주위를 돈 것을 원인으로 내려가고 가라앉고 아래로 내려가겠습니까?” “아닙니다, 대덕이시여.” “촌장이여, 그와 같이 여기 어떤 사람은 생명을 해치는 것을 삼가고, 주어지지 않은 것을 가지는 것을 삼가고, 삿된 음행을 삼가고, 거짓말을 삼가고, 이간질을 삼가고, 욕설을 삼가고, 잡담을 삼가고, 간탐(慳貪)하지 않고, 진에(瞋恚)하지 않고, 바른 견해를 가진 자입니다. 그런데 많은 군중이 함께 모여 절하고 기도하고 합장하고 주위를 돌면서 말할 것입니다. ㅡ ‘이 사람은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상실과 비탄의 상태, 비참한 존재, 벌 받는 상태, 지옥에 태어나라.’라고. 그러나 그 사람은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좋은 곳 하늘 세상에 태어날 것입니다.”」라고 하여 열 가지 착한 업[십선업(十善業)]에 따르는 과(果)와 보(報)에 의해 죽은 뒤 하늘 세상에 태어남을 설명합니다.


• 「행위가 가지는 과(果)와 보(報)의 법칙성」 → 「업인과보 삼세윤회(業因果報三世輪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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