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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행복으로 더 큰 행복을 일구는 가르침

0 642 2018.05.30 13:10

나. 행복으로 더 큰 행복을 일구는 가르침


고(苦)와 고멸(苦滅)로 설해진 부처님 가르침은 이렇게 다양한 종류의 불만족과 그 불만족의 해소 정도에 대응하는 행복의 실현을 말해줍니다.


그렇다면 불만족의 해소 방법 또는 그 과정은 어떻게 설명됩니까? 가난의 실천을 통해 소유적인 불만족을 해소하고, 괴로움의 과정 즉 고행(苦行)을 통해 더 높은 삶으로의 향상을 추구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소유의 불만족에 대해 부처님은 법다운 재물 즉 정당한 방법에 최선의 노력을 얹어서 얻는 재물로써 만족을 실현하라고 합니다[25쪽, 장님 경 눈① 참조]. 소유의 일방적 포기가 아니라 긍정적이고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삶을 통해 소유의 불만족을 해소하는 것입니다. 


「장자여,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지만 세상에서 얻기 어려운 네 가지 법이 있다. 무엇이 넷인가?


① ‘나에게 법과 함께한 재물이 생기기를!’ 이것이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지만 세상에서 얻기 어려운 첫 번째 법이다.


② ‘법과 함께한 재물을 얻은 뒤, 친척들과 함께하고 스승들과 함께한 명성이 나에게 오기를! 이것이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지만 세상에서 얻기 어려운 두 번째 법이다.


③ ‘법과 함께한 재물을 얻은 뒤, 친척들과 함께하고 스승들과 함께한 명성을 얻은 뒤, 나는 오래 살고 긴 수명을 유지하기를!’ 이것이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지만 세상에서 얻기 어려운 세 번째 법이다.


④ ‘법과 함께한 재물을 얻은 뒤, 친척들과 함께하고 스승들과 함께한 명성을 얻은 뒤, 나는 오래 살고 긴 수명을 유지한 뒤, 죽어서 몸이 무너진 뒤에는 좋은 곳 천상 세계에 태어나기를!’ 이것이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지만 세상에서 얻기 어려운 네 번째 법이다.


장자여, 이러한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지만 세상에서 얻기 어려운 네 가지 법이 있다.


장자여, 네 가지 법은 이러한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지만 세상에서 얻기 어려운 네 가지 법의 얻음을 위해 이끈다. 무엇이 넷인가? 믿음의 구족, 계의 구족, 보시의 구족, 지혜[25쪽, 장님 경 눈② 참조]의 구족이다.」 (AN 4.61)


또한, 더 높은 삶의 추구 또한 괴로움의 과정이 아닌 즐거움의 과정으로 제시됩니다. 소유의 삶을 넘어서서 존재를 오롯이 드러낸[삼매의 성취] 이후에는 괴로움의 과정 즉 고행(苦行)이 아니라 행복의 과정 즉 팔정도(八正道)[사념처 → 사마타-위빳사나]로써 완전한 행복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왕자여, 나도 깨달음 이전, 깨닫지 못한 보살이었을 때 ‘행복에 의해 행복으로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니다. 괴로움에 의해 행복으로 가져야 하는 것이다.’라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


왕자여, 그런 나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과거의 어떤 사문들이나 바라문들이 느꼈던 격렬하고 괴롭고 혹독하고 사무치고 호된 느낌 중에서 이것을 능가하는 다른 것이 더 있지 않았다. 미래의 어떤 사문들이나 바라문들이 느낄 격렬하고 괴롭고 혹독하고 사무치고 호된 느낌 중에서 이것을 능가하는 다른 것이 더 있지 않을 것이다. 현재의 어떤 사문들이나 바라문들이 느끼는 격렬하고 괴롭고 혹독하고 사무치고 호된 느낌 중에서 이것을 능가하는 다른 것이 더 있지 않다. 그러나 나는 이 극심한 고행으로도 인간의 법을 넘어선 성자들에게 적합한 지와 견의 성취를 증득하지 못했다. 깨달음을 위한 다른 길이 없을까?'라고.


왕자여, 그런 나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나는 아버님이 삭꺄족의 의식을 거행하실 때 시원한 잠부 나무 그늘에 앉아서 소유적 사유들로부터 벗어나고, 불선법들로부터 벗어나서, 위딱까가 있고 위짜라가 있고 떨침에서 생긴 기쁨과 즐거움으로 초선(初禪)을 성취하여 머물렀던 것을 기억한다. 그런데 이것이 깨달음을 위한 길이 될까?'라고. 왕자여, 그런 나에게 그 기억을 따라서 이런 식(識)이 생겨났다. '이것은 깨달음을 위한 길이다.'라고.


왕자여, 그런 나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나는 왜 이런 행복을 두려워하는가? 이런 행복은 소유적 사유들과도 다르고 불선법(不善法)들과도 다르지 않은가?'라고. 왕자여, 그런 나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소유적 사유들과도 다르고 불선법(不善法)들과도 다른 이런 행복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라고.」 (MN85)


부처님의 깨달음의 과정을 통해 ‘괴로움에 의해 접근되는 것이 아니라 행복에 의해 접근되는’ 행복의 길이 최초로 발견된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이 길만이 모든 불만족이 해소된 완전한 행복으로 이끄는 유일한 방법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완성된 불교는 「행복으로 더 큰 행복을 일구는 공부[교학+수행]」 과정인 것입니다.


다. 행복의 두 자리 ㅡ 유위(有爲)의 삶과 무위(無爲)의 삶


그런데 고(苦)도 고멸(苦滅) 즉 락(樂)도 느낌이고 삶의 과정에서 경험되는 것[수(受)]입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삶의 과정이란 말은 윤회(輪迴)하는 중생에게 적용되는 말입니다. 번뇌의 영향을 받는 삶이고, 탐진치(貪嗔癡)와 함께하는 유위(有爲)의 삶입니다. 


그래서 락(樂)[즐거움], 고(苦)[괴로움], 불고불락(不苦不樂)[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으로 분류되는 느낌 또는 그 느낌의 경험[수(受)]이라는 말은 중생의 영역을 넘어서 해탈한 아라한에게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아라한 즉 번뇌를 부수어 그 영향에서 벗어난 성자, 탐진치(貪嗔癡)와 함께하지 않는 무위(無爲)의 삶을 사는 그 분들은 어떤 느낌을 경험합니까? 아무런 느낌의 경험 없이 목석같은 상태로 살아가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번뇌의 영향을 받지 않는, 탐진치(貪嗔癡)와 함께하지 않는 무위(無爲)의 삶은 불만족을 일으키는 모든 불길이 꺼진 상태여서 열반(涅槃)이라고 불리는데, 모든 괴로움의 소멸 즉 완전한 고멸(苦滅)의 실현입니다. 고멸(苦滅)은 곧 행복이기 때문에 완전한 고멸(苦滅)은 완전한 행복입니다. 그리고 이런 행복을 해탈락(解脫樂)[vimuttisukha]이라고 합니다.


• 「한때 왕기사 존자가 사왓티에서 제따와나의 아나타삔디까 사원에 머물렀다. 그때 왕기사 존자는 최근에 아라한을 성취하여 해탈락(解脫樂)을 경험하는 자였다. 그는 이때 이 게송들을 읊었다. ㅡ」 (SN 8.12)


• 「아난다여, 여기 비구는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를 완전히 초월하고 상수멸(想受滅)을 성취하여 머문다. 아난다여, 이것이 참으로 이 즐거움보다 훨씬 훌륭하고 탁월한 다른 즐거움이다. 아난다여, 그런데 다른 외도 유행승들이 이렇게 말하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ㅡ '사문 고따마는 상수멸(想受滅)을 설하고서는 그것을 다시 즐거움이라고 천명한다. 그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그러하단 말인가?'라고. 아난다여, 이와 같이 말하는 다른 외도 유행승들에게 이렇게 말해줘야 한다. '도반들이여, 세존께서는 즐거움의 경험[수(受)] 부분에 대해서만 즐거움을 가르친 것이 아닙니다. 도반들이여, 여래는 어디든지(*) 즐거움이 있으면, 그것을 즐거움이라고 말합니다.'라고.」  (MN 59)/(SN 36.19)/(SN 36.20)


(*) 어디든지 ㅡ 「상(常)하고 지속되고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수(受)는 없고, 무상(無常)하고 불만족스럽고 변하는 수(受)는 있다.」 (SN22.94) → ‘번뇌의 영향을 받는 유위(有爲)적인 삶의 영역[중생]이든지 번뇌의 영향에서 벗어난 무위(無爲)적인 삶의 영역[아라한]이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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