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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Ⅳ] 바름 가. 과(果)와 보(報)에 의한 구분 1. 법(法)과 비법(非法) 2. 「행위가 가지는 과(果)와 보(報)의 법칙…

0 682 2018.05.30 13:15

[Ⅳ] 바름


  • 고집(苦集)[괴로움을 생겨나게 하는 삶] ㅡ 바르지 않음

  • 고멸도(苦滅道)[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실천] ㅡ 바름


행위는 이렇게 마음을 뿌리로 하고 행복을 지향합니다. 그러나 지향한다고 해서 모든 행위가 행복을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행복한 과(果)와 보(報)를 가져오는 행위를 할 때 행위는 지향된 대로 행복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행위가 행복을 만듭니까? 어떤 행위가 행복한 과(果)와 보(報)를 가져오는 행위입니까?


어려운 질문입니다. 누가 이 어려운 질문에 바른 답을 줄 수 있습니까? 「행위가 가지는 과(果)와 보(報)의 법칙성」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아서 「업인과보 삼세윤회(業因果報三世輪迴)」하는 삶에서 살아서도 행복하고 죽어서는 더 좋은 삶이 이어질 수 있도록 안내할 수 있는 자는 누구입니까?


(DN 19)는 부처님에 대한 여덟 가지 있는 그대로의 찬탄을 말하는데, 그 중 세 번째는 「그분 세존에 의해 ‘이것은 유익(有益)한 것이다.’라고 잘 선언되었고, ‘이것은 무익(無益)한 것이다.’라고 잘 선언되었고, ‘이것은 결점이 있는 것이고, 이것은 결점이 없는 것이다, 이것은 실천해야 하는 것이고, 이것은 실천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저열한 것이고, 이것은 수승한 것이다. 이것은 악(惡)과 선(善)이 상대가 되어 함께하는 것이다.’라고 잘 선언되었습니다. 이렇게 유익한 것-무익한 것-결점이 있는 것-결점이 없는 것-실천해야 하는 것-실천하지 않아야 하는 것-저열한 것-수승한 것-악(惡)과 선(善)이 상대가 되어 함께하는 것으로 법들을 선언하는 이런 요소를 갖춘 스승을 그분 세존 외에는 과거에도 지금도 우리는 보지 못합니다.」입니다. 이 어려운 질문에 답을 줄 수 있는 바로 그분이라고 부처님을 찬탄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해는 중요합니다. 삶 즉 행위에 기준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만약 기준이 잘못 주어진다면, 기준대로 사는 삶은 지향하는 바의 행복을 만들지 못합니다. 노력한다는 것과 원하는 결과를 만든다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닐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조금의 의심도 없이 신뢰할 수 있는 스승이 있어 온전한 기준이 주어진다면, 그때는 기준대로 살기만 하면 지향하는 바의 행복을 만들 수 있습니다. 노력한다는 것과 원하는 결과를 만든다는 것이 같아지는 경우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경은 부처님이 바로 그런 스승이기에 있는 그대로 찬탄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한편, (DN 29)에 의하면, 부처님은 정등각(正等覺) 즉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한 자이기 때문에 그 가르침은 더할 바 뺄 바 없는 완전함이라고 합니다. 그러기에 (DN 19)의 찬탄은 적절한 찬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스승인 부처님이 주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어떤 기준을 바르게 배워 알고 실천해야 합니까? 실천하기만 하면 가르침이 가지는 위력에 의해 부처님이 제시하는 그런 삶이 나에게서 실현되는 그 기준은 무엇입니까?


가. 과(果)와 보(報)에 의한 구분


1. 법(法)과 비법(非法)


(AN 10.113)/(AN 10.171)은 「비법(非法)과 이익 아님을 알아야 한다. 법(法)과 이익을 알아야 한다. 비법(非法)과 이익 아님을 알고, 법(法)과 이익을 안 뒤에 법에 따르고 이익에 따른 실천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경들은 이어서 비법(非法)과 이익 아님으로 십악업(十惡業)과 십사도(十邪道), 그리고 법(非)과 이익으로 십선업(十善業)과 십정도(十正道)를 말합니다.


이때, 십정도(十正道)는 팔정도(八正道)의 확장입니다. 팔정도는 정견(正見)-정사유(正思惟)-정어(正語)-정업(正業)-정명(正命)-정정진(正精進)-정념(正念)-정정(正定)입니다. 여기서 정정(正定) 즉 바른 삼매는 앞의 일곱 가지를 필수품으로 하여 성취되는 삼매이면서, 이 삼매 위에서 삼매를 닦아서 깨달음을 실현하는 전체 과정을 말합니다. 때로 정정(正定)을 토대로서의 삼매[정(定)]과 토대 위에서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삼매수행(三昧修行)의 과정으로 상세히 설명하기도 하는데, 정정(正定)[바른 삼매]-정지(正知)[바른 앎]-정해탈(正解脫)[바른 해탈]로의 구분입니다. 이렇게 팔정도(八正道)의 상세한 설명으로의 십정도(十正道)가 있습니다.


• 이 내용은 근본경전연구회 홈페이지 http://nikaya.kr 의 ‘팔정도 특강’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교리공부 → 팔정도 → 28번 글과 27번 글]


십사도(十邪道)는 십정도(十正道)의 반대입니다. 팔정도(八正道)의 반대인 팔사도(八邪道)[여덟 가지 삿된 길]이 확장되어 삿된 앎과 삿된 해탈로 상세히 설명된 것입니다.


십악업(十惡業)은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의 상세한 설명인데, 살생(殺生), 투도(偸盜), 사음(邪淫), 망어(妄語), 양설(兩舌), 악구(惡口), 기어(綺語), 간탐(慳貪), 진에(瞋恚), 사견(邪見)입니다. 또한, 십선업(十善業)은 불살생(不殺生), 불투도(不偸盜), 불사음(不邪婬), 불망어(不妄語), 불양설(不兩舌), 불악구(不惡口), 불기어(不綺語), 불간탐(不慳貪), 부진에(不瞋恚), 정견(正見)입니다. → 「첨부. (MN 41)」 참조.


2. 「행위가 가지는 과(果)와 보(報)의 법칙성」


(A10:143)/(A10:187)은 괴로움을 초래하는 법[고과(苦果)]으로 십사도(十邪道)와 십악업(十惡業)을 말하고, 행복을 초래하는 법[락과(樂果)]로 십정도(十正道)와 십선업(十善業)을 말합니다.


또한, (A10:144)/(A10:188)은 보(報)가 괴로움인 법[고보(苦報)]으로 십사도(十邪道)와 십악업(十惡業)을 말하고, 보(報)가 행복인 법[락보(樂報)]로 십정도(十正道)와 십선업(十善業)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십사도(十邪道)와 십악업(十惡業)은 과(果)도 보(報)도 괴로움이고, 십정도(十正道)와 십선업(十善業)은 과(果)도 보(報)도 행복이라는 정의인 것입니다. 역으로 말하면 괴로움의 과(果)와 보(報)를 가져오는 행위[법(法)]은 십사도(十邪道)와 십악업(十惡業)이고, 행복의 과(果)와 보(報)를 가져오는 행위[법(法)]은 십정도(十正道)와 십선업(十善業)인 것입니다. 


한편, 이런 포괄적인 기준과는 달리 좀 더 구체적 기준을 알려주는 경전도 있습니다. (AN2.181~200)는 과(果)도 보(報)도 괴로움인 법으로 ①화-원한, ②모욕-얕봄, ③질투-인색, ④사기-거짓, ⑤자책(自責)에 대한 두려움 없음-남의 책망에 대한 두려움 없음의 열 가지를 제시하고, 과(果)도 보(報)도 행복인 법으로 ①화 없음-원한 없음, ②모욕 없음-얕봄 없음, ③질투 없음-인색 없음, ④사기 없음-거짓 없음, ⑤자책(自責)에 대한 두려움-남의 책망에 대한 두려움의 열 가지를 제시합니다.


이것이 업인과보(業因果報) 또는 「행위가 가지는 과(果)와 보(報)의 법칙성」에 대한 부처님의 기준입니다. 그러니 이런 기준을 바르게 배워 알고 실천해야 합니다. 실천하기만 하면 가르침이 가지는 위력에 의해 부처님이 제시하는 그런 삶이 나에게서 실현되는 그 기준이 바로 이것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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