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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보시(布施)

0 696 2018.05.30 13:29

2. 보시(布施)


보시(布施)는 두 개의 빠알리 단어 dāna(다-나)[gift; charity; alms; alms-giving. (nt.)]와 cāga(짜-가)[gift; abandoning; giving up; generosity. (m.)]의 번역입니다. 


dāna는 dadāti(다다-띠)[to give]와, cāga는 cajati(짜자띠)[1. to let loose, to emit, to discharge 2. to abandon to give up, sacrifice]와 연결되는 명사입니다. 그래서 줌, 베풂, 포기, 희생, 관대함 등의 의미를 가집니다.


보시(布施)의 일반적 용례는 dāna이지만 정의는 cāga에서 알려집니다.


1) 보시(布施)는 무엇입니까?


(AN 6.26) 등은 cāga에 대해 이렇게 정의합니다. ㅡ '참으로 나에게 이익 되는 것이다. 참으로 나에게 크게 이익 되는 것이다! 나는 인색(吝嗇)에 오염된 사람들 가운데서 인색의 오염을 떠난 마음으로 자유롭게 보시하고, 손은 깨끗하고, 주기를 좋아하고, 다른 사람의 요구에 응할 준비가 되어있고, 베풂과 나눔을 좋아하며 재가에 산다.’


재가에 사는 사람들의 일반적 성향은 인색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행위가 가지는 과(果)와 보(報)의 법칙성」에 의하면, 인색한 삶은 과(果)도 보(報)도 괴로움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성향에 이끌리지 않고 인색의 오염을 떠난 마음으로 자유롭게 보시하고, 손은 깨끗하고, 주기를 좋아하고, 다른 사람의 요구에 응할 준비가 되어있고, 베풂과 나눔을 좋아하는 삶은 이익 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익 되는 것이기 때문에 보시(布施)는 알려지고 권장되는 것인데, 몇 가지 측면에서 정리하였습니다.


2) 종류 


(AN 2.142-151)은 물질적인 베풂[āmisadāna 또는 āmisacāga]과 가르침의 베풂[dhammadāna 또는 dhammacāga]의 두 가지 보시(布施)를 말하는데, 재시(財施)와 법시(法施)입니다. 그리고 경은 이 중에 법시(法施)가 더 높은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AN 8.39)는 오계(五戒)를 지키는 것도 보시라고 하는데, 두렵지 않음과 증오하지 않음과 묶이지 않음을 주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무외시(無畏施) 즉 두려움 없음을 베풂이라고 부르는 보시가 바로 이것, 오계(五戒)를 지키는 삶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시에는 재시(財施)-법시(法施)-무외시(無畏施)의 세 가지가 있습니다.


3) 보시(布施)의 특성


(AN 4.57)/(AN 4.58)/(AN 4.59)는 음식을 보시하는 것은 하늘과 인간의 수명과 용모와 행복과 힘을 보시하는 것인데 보시 이후에 하늘과 인간의 수명과 용모와 행복과 힘을 나누어 가지게 된다고 합니다. 또한, (AN 5.37)은 지혜를 포함한 다섯 가지를 주고 나누어 가진다고 합니다. 또한, (AN 8.39)는 두렵지 않음과 증오하지 않음과 묶이지 않음을 주고 다시 그것을 나누어 가진다고 합니다.


이렇게 보시 받은 자에게 생겨나는 효과를 보시자가 함께 나누어 가진다는 것을 재시(財施)와 무외시(無畏施)의 경우로 설명하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보시(布施)의 특성입니다. 물론, 재시(財施)와 법시(法施)의 구분 되는 보시에서 재시(財施)에 적용되는 특성은 법시(法施)에도 적용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보시(布施)는 보시 받은 자에게 생겨나는 효과를 보시자가 함께 나누어 가지는 특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부처님은 보시에 대해 '참으로 나에게 이익 되는 것이다. 참으로 나에게 크게 이익 되는 것이다!‘라고 찬탄하는 것입니다.


4) 출가자에게 하는 보시(布施)


한편, 보시(布施)를 말하는 또 하나의 단어가 있는데 dakkhiṇa(닥키나)입니다. (AN 5.39)에서는 죽은 조상들을 위한 보시(布施)[망자공양(亡者供養)](*)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대개의 경우[(DN 2)/(DN 26)/(SN 3.19)/(AN 4.61)/(AN 5.41)/(AN 5.227)] 사문-바라문 즉 출가자에게 하는 보시로 나타납니다.


(*)  (AN 10.177)에서는 dāna가 쓰임.


이 보시는 「고귀한 죽음을 겨냥하고, 하늘에 연결되고, 행복한 보(報)를 가져오고, 천상으로 이끄는 것인, 사문-바라문들에 대한 보시」라고 정의됩니다. 위의 경들은 대개 재물을 얻으면 ①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만족하게 하고 바르게 행복을 보호하기 위해, ②부모와 아들-아내-하인-직원들과 친구-사람들을 행복하게 하고 만족하게 하고 바르게 행복을 보호하기 위해, ③재난들 즉 불과 물과 왕과 도둑과 마음에 들지 않는 상속인으로부터 자신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④친척-손님-조상-왕-신에 대한 종교적 헌금/기부/세금 등으로 사용할 것을 종용하면서 다섯 번째 사용처로 이런 사문-바라문들에 대한 보시를 제시합니다. 살아있는 동안 나 그리고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의 행복을 위한 용도 등으로의 사용에 이어 죽음 이후의 삶을 위해 사용할 것을 말하는 것인데, 살아서도 행복하고 죽어서는 더 좋은 삶을 이어지게 하기 위한 불교신자의 신행(信行)을 단적으로 알려주고 있습니다.


dakkhiṇa 즉 이런 보시는 상대방을 필요로 합니다. 죽음 이후의 삶을 위한(*) 보시의 성과를 생겨나게 하는 대상 즉 보시 받을만한 사람[dakkhiṇeyya(닥키네이야)]입니다. (AN 3.41)은 많은 공덕(功德)을 쌓기 위한 세 가지 조건을 말하는데, 믿음과 보시할 것과 보시 받을만한 사람입니다. 또한, 이어지는 경인 (AN 3.42)은 확실한 믿음을 세 가지 측면에서 제시하는데 ①계(戒)를 중시하는 자 보기를 좋아하고, ②바른 법(法) 듣기를 좋아하고, ③인색(吝嗇)에 오염된 사람들 가운데서 인색의 오염을 떠난 마음으로 자유롭게 보시하고, 손은 깨끗하고, 주기를 좋아하고, 다른 사람의 요구에 응할 준비가 되어있고, 베풂과 나눔을 좋아하며 재가에 사는 것입니다.


(*) 물론 dakkhiṇa가 꼭 죽음 이후를 위한 것만은 아닙니다. dakkhiṇa도 행복한 보(報)를 가져온다는 정의를 포함하는데, 보(報)의 시기는 금생(今生)과 내생(來生)으로 설명되기 때문입니다.


이때, 보시 받을만한 사람[dakkhiṇeyya]은 상가[승보(僧寶)]의 정의[33쪽 참조]에서 말하듯이 사쌍팔배(四雙八輩)[네 쌍의 대장부요, 여덟 무리의 성자들]인데, 유위(有爲)의 삶에서 벗어나 무위(無爲)의 삶의 실현과정에 들어선 또는 실현한 분들입니다. 


그런데 dakkhiṇa 즉 이런 보시와 dakkhiṇeyya[보시 받을만한 사람]은 주목해야 합니다. 경들은 ‘누구에게 보시해야 하는가? 누구에게 하는 보시가 커다란 과(果)를 가져오는가?’의 질문에 dakkhiṇeyya[보시 받을만한 사람]이라고 답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AN 9.20)은 부처님의 전생 이야기를 통해 사쌍팔배의 성자가 없던 그 시절에 웰라마 바라문이 매우매우 큰 보시를 하였지만 부처님의 깨달음에 의해 생겨난 부처님과 그 제자들인 보시 받을만한 사람이 없어서 아무도 그의 보시를 청정하게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보시 받을만한 사람[dakkhiṇeyya]인 상가[승보(僧寶)]는 이 세상에서 위없는 복을 심는 대상[복전(福田)]이라고 정의되는 것입니다.


(MN 142)는 dakkhiṇa에 대한 분석을 설한 경인데, 이 주제의 중심을 알려줍니다.


「아난다여, 이런 네 가지 청정한 보시(布施)가 있다. 무엇이 넷인가? 아난다여, 주는 자 때문에 청정해지고 받는 자 때문은 아닌 보시들이 있다. 아난다여, 받는 자 때문에 청정해지고 주는 자 때문은 아닌 보시들이 있다. 아난다여, 주는 자 때문에도 받는 자 때문에도 청정해지지 않는 보시들이 있다. 아난다여, 주는 자 때문에도 받는 자 때문에도 청정해지는 보시들이 있다.   


아난다여, 어떻게 주는 자 때문에 청정해지고 받는 자 때문은 아닌 보시들이 있는가? 아난다여, 여기 계를 중시하고 선한 성품을 지닌 주는 자가 있고, 계를 경시하고 악한 성품을 지닌 받는 자들이 있다. ㅡ 아난다여, 이렇게 주는 자 때문에 청정해지고 받는 자 때문은 아닌 보시들이 있다.


아난다여, 어떻게 받는 자 때문에 청정해지고 주는 자 때문은 아닌 보시들이 있는가? 아난다여, 여기 계를 경시하고 악한 성품을 지닌 주는 자가 있고, 계를 중시하고 선한 성품을 지닌 받는 자들이 있다. ㅡ 아난다여, 이렇게 받는 자 때문에 청정해지고 주는 자 때문은 아닌 보시들이 있다.


아난다여, 어떻게 주는 자 때문에도 받는 자 때문에도 청정해지지 않는 보시들이 있는가? 아난다여, 여기 계를 경시하고 악한 성품을 지닌 주는 자가 있고, 계를 경시하고 악한 성품을 지닌 받는 자들이 있다. ㅡ 아난다여, 이렇게 주는 자 때문에도 받는 자 때문에도 청정해지지 않는 보시들이 있다.


아난다여, 어떻게 주는 자 때문에도 받는 자 때문에도 청정해지는 보시들이 있는가? 아난다여, 여기 계를 중시하고 선한 성품을 지닌 주는 자가 있고, 계를 중시하고 선한 성품을 지닌 받는 자들이 있다. ㅡ 아난다여, 이렇게 주는 자 때문에도 받는 자 때문에도 청정해지는 보시들이 있다. 아난다여, 이런 네 가지 청정한 보시(布施)가 있다.


세존은 이렇게 말했다. 스승인 선서(善逝)는 이것을 말한 뒤에 다시 이것을 말했다. ㅡ


계를 중시하는 자가 계를 경시하는 자들에 대해 보시를 한다. 

아주 순수한 마음을 가진 자가 법답게 얻어진 것을.

업(業)의 결실이 크다는 확고한 믿음을 가진 자가,

그 보시는 주는 자 때문에 청정해진다.


계를 경시하는 자가 계를 중시하는 자들에 대해 보시를 한다. 

순수하지 않은 마음을 가진 자가 법답지 않게 얻어진 것을. 

업(業)의 결실이 크다는 확고한 믿음을 갖지 않은 자가, 그 보시는 받는 자 때문에 청정해진다.


계를 경시하는 자가 계를 경시하는 자들에 대해 보시를 한다. 

순수하지 않은 마음을 가진 자가 법답지 않게 얻어진 것을. 

업(業)의 결실이 크다는 확고한 믿음을 갖지 않은 자가, 그 보시는 큰 결실을 맺지 못한다고 나는 말한다.


계를 중시하는 자가 계를 중시하는 자들에 대해 보시를 한다. 

순수한 마음을 가진 자가 법답게 얻어진 것을.

업(業)의 결실이 크다는 확고한 믿음을 가진 자가,

그 보시는 참으로 큰 결실을 맺는다고 나는 말한다.


탐(貪)을 떠난 자가 탐(貪)을 떠난 자들에 대해 보시를 한다. 

순수한 마음을 가진 자가 법답게 얻어진 것을.

업(業)의 결실이 크다는 확고한 믿음을 가진 자가,

그 보시는 참으로 물질적인 보시 가운데 으뜸이다.」.


(AN 8.35)는 사문-바라문에게 보시한 공덕으로의 태어남을 말합니다. 부유한 바라문이나 장자로 태어나고 싶은 바람을 보시에 대한 기대로 삼아 마음에 받아들이고 확고히 하고 닦으면 거기에 태어납니다. 다만, 이것은 계를 중시하는 자에게 해당하는 것이지 계를 경시하는 자의 경우는 아닙니다. 계를 중시하는 자에게 마음의 지향은 청정함 때문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또한, 마음의 기대를 사왕천(四王天)-삼십삼천(三十三天)-야마천(夜摩天)-도솔천(都率天)-화락천(化樂天)-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의 욕계(慾界)에 속한 여섯 하늘이거나 욕계를 넘어 색계의 시작인 범신천(梵身天)에 두고 계를 중시하는 삶을 살면 마찬가지 경우로 기대하는 거기에 태어나게 됩니다. 


이 내용은 (AN 8.36)이 말하는 보시와 계의 비범함에 따른 단계적 태어남과 연결해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보시하는 마음의 단계적인 향상을 보시의 비범의 단계인 것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5) 어떻게 보시해야 합니까? 


(SN 3.24)는 보시의 대상에 대해 두 가지 질문을 합니다.


• 올바른 보시의 대상 

 

한 곁에 앉은 빠세나디 꼬살라 왕은 부처님께 이렇게 여쭈었다. 

"부처님이시여, 어디에 보시해야 합니까?” 

"대왕이여, 마음이 밝아지는 곳입니다.

 

• 큰 결실을 가져오는 보시의 대상


"부처님이시여, 그러면 어디에 한 보시가 큰 결실을 가져옵니까? 


"대왕이여, ‘어디에 보시를 해야 합니까?’라는 질문과 ‘어디에 한 보시가 큰 결실을 가져옵니까?’라는 질문은 다른 것입니다. 대왕이여, 계를 중시하는 자에게 하는 보시는 큰 결실을 가져오지만 계를 경시하는 자에게 한 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대왕이여, 그와 같이 어느 가문 출신의 사람이든 집에서 나와 출가하여 다섯 가지로 구성된 것을 버렸고 다섯 가지로 구성된 것을 갖추었다면 그에게 하는 보시는 큰 결실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는 어떤 다섯 가지로 구성된 것을 버렸습니까? 소유의 찬다를 버렸고, 진에를 버렸고, 해태와 혼침을 버렸고, 들뜸과 후회를 버렸고, 의심을 버렸습니다. 그는 이런 다섯 가지로 구성된 것을 버렸습니다.


그러면 그는 어떤 다섯 가지로 구성된 것을 갖추었습니까? 그는 무학(無學)의 계의 무더기[계온(戒蘊)]를 갖췄고, 무학의 삼매의 무더기[정온(定蘊)]를 갖췄고, 무학의 지혜의 무더기[혜온(慧蘊)]를 갖췄고, 무학의 해탈의 무더기[해탈온(解脫蘊)]를 갖췄고, 무학의 해탈지견의 무더기[해탈지견온(解脫知見蘊)]를 갖췄습니다. 그는 이런 다섯 가지로 구성된 것을 갖추었습니다[오법온(五法蘊)].


한편, (M6)은 「만일 비구가 ‘내가 의(衣), 식(食), 주(住)와 병구완을 위한 약품을 얻게 되기를.’하고 원한다면, 그는 계를 원만히 하고, 안으로 마음의 사마타를 닦는 자로서, 선(禪)을 외면하지 않는 자로서, 위빳사나를 구족한 자로서 빈집에서 수행해야 한다. 만일 비구가 ‘내게 의(衣), 식(食), 주(住)와 병구완을 위한 약품을 보시해준 사람들에게 큰 결실과 큰 공덕이 있기를.’하고 원한다면, 그는 계를 원만히 하고, 안으로 마음의 사마타를 닦는 자로서, 선(禪)을 외면하지 않는 자로서, 위빳사나를 구족한 자로서 빈집에서 수행해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보시 받는 자인 비구의 자세입니다. 그리고 이 경에 의하면,


1) 계를 원만히 하고, 안으로 마음의 사마타를 닦는 자로서, 선(禪)을 외면하지 않는 자로서, 위빳사나를 구족한 자로서 빈집에서 수행하는 비구에게 보시해야 하고,


2) 계를 원만히 하고, 안으로 마음의 사마타를 닦는 자로서, 선(禪)을 외면하지 않는 자로서, 위빳사나를 구족한 자로서 빈집에서 수행하는 비구에게 하는 보시가 큰 결실을 가져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6) 지금여기서 스스로 보아 알 수 있는 보시의 결실과 내생의 보시의 결실


(AN 5.34)는 지금여기서 스스로 보아 알 수 있는 보시의 결실을 묻는 시하 대장군과 부처님의 대화로 이루어지는데, 부처님은 지금여기서 스스로 보아 알 수 있는 보시의 결실 네 가지와 내생의 보시의 결실 한 가지로 답합니다. 


• 지금여기서 스스로 보아 알 수 있는 보시의 결실


①보시를 행하는 보시의 주인을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고 마음에 들어 한다.

②보시를 행하는 보시의 주인을 선하고 참된 사람들이 가까이한다.

③보시를 행하는 보시의 주인에게는 좋은 명성이 따른다.

④보시를 행하는 보시의 주인은 어떠한 무리에 들어가더라도 두려움 없고 당당하게 들어간다.


• 내생의 보시의 결실


보시를 행하는 보시의 주인은 몸이 무너져 죽은 뒤 좋은 곳 히늘 세상에 태어난다.


부처님의 답변을 들은 시하대장군은 이렇게 화답합니다. 


부처님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지금 여기서 스스로 보아 알 수 있는 네 가지 보시의 결실에 대해서는 단지 부처님에 대한 믿음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저 자신도 또한 이 네 가지를 알고 있습니다. 


부처님이시여, 보시를 행하는 보시의 주인인 저를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고 마음에 들어 합니다. 부처님이시여, 보시를 행하는 보시의 주인인 저를 선하고 참된 사람들이 가까이합니다. 부처님이시여, 보시를 행하는 보시의 주인인 제겐 좋은 명성이 따릅니다. 부처님이시여, 보시를 행하는 보시의 주인인 저는 그 어떠한 무리에 다가가더라도 담대하고 기죽지 않고 다가갑니다. 부처님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지금여기서 스스로 보아 알 수 있는 네 가지 보시의 결실에 대해서는 단지 부처님에 대한 믿음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저 자신도 또한 이 네 가지를 알고 있습니다.


부처님이시여, 그러나 부처님께서 '시하여, 보시를 행하는 보시의 주인은 몸이 무너져 죽은 뒤 좋은 곳에 태어난다.'라고 말씀하신 것에 대해서는 제가 알지 못합니다. 이 점에 대해서 저는 부처님에 대한 믿음으로 받아들입니다.


또한, (AN 7.57)는 동일한 주제를 설하는데, 지금 여기서 스스로 보아 알 수 있는 보시의 결실이 여섯 가지로 나타나는 점만이 다릅니다.


① 아라한들은 믿음이 있고 보시의 주인이고 끊임없이 베푸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을 먼저 연민함.

② 아라한들은 믿음이 있고 보시의 주인이고 끊임없이 베푸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을 먼저 방문함. 

③ 아라한들은 믿음이 있고 보시의 주인이고 끊임없이 베푸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의 보시를 먼저 받음. 

④ 아라한들은 믿음이 있고 보시의 주인이고 끊임없이 베푸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먼저 법을 설해줌. 

⑤ 좋은 명성이 따름. 

⑥ 어떤 무리에 들어가더라도 두려움 없고 당당하게 들어감.


7) 큰 결실과 큰 이익이 없는 보시와 큰 결실과 큰 이익이 있는 보시


(AN 7.52)는 큰 결실과 큰 이익이 없는 보시와 큰 결실과 큰 이익이 있는 보시를 묻는 질문에 대해 일곱 단계의 보시하는 마음[심(心)]에 따른 태어남의 자리로 답변하는데, 욕계(慾界)의 여섯 하늘에 태어남으로 이끄는 보시하는 마음과 색계(色界)의 첫 하늘인 범신천(梵身天)에 태어남으로 이끄는 보시하는 마음입니다. 


①대가를 바라고 보시를 하고, 묶인 마음으로 보시를 하고, 쌓이기를 바라고 보시를 하고, '이것을 다음 생에 내가 사용할 것이다.'라고 보시를 하는 사람 ⇒ 사대왕천(四大王天)에 태어남.

 

①을 넘어서서 ②'보시는 좋은 것이다.'라고 보시하는 사람. ⇒ 삼십삼천(三十三天)에 태어남.

 

②를 넘어서서 ③'나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들에 의해 옛날부터 주어졌고 옛날부터 행해진 오래된 가문의 전통을 내가 중단하는 것은 옳지 않다.'라고 보시하는 사람. ⇒ 야마천(夜摩天)에 태어남.

 

③을 넘어서서 ④'나는 음식을 만들지만 이들은 만들지 않는다. 음식을 만드는 자가 만들지 않는 자들에게 보시하지 않는 것은 옳지 않다.'라고 보시하는 사람. ⇒ 도솔천(兜率天)에 태어남.

 

④를 넘어서서 ⑤'앗타까, 와마까, 와마데와, 웻사미따, 야마딱기, 앙기라사, 바라드와자, 와셋타, 깟사빠, 바구 등 이전의 선인(仙人)들에게는 큰 제사가 있었다. 이렇게 나에게도 보시에 의한 나눔이 있을 것이다.'라고 보시하는 사람. ⇒ 화락천(化樂天)에 태어남.

 

⑤를 넘어서서 ⑥'보시할 때 나의 마음은 밝아진다. 기쁨과 만족이 생긴다.'라고 보시 하는 사람. ⇒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에 태어남.

 

⑦마음의 장식이고 마음의 필수품인 보시를 하는 사람. ⇒ 범신천(梵身天)에 태어남.


이때, 욕계(慾界)의 여섯 하늘에 태어남으로 이끄는 보시하는 마음은 그 업(業)과 행운과 축복과 힘이 다 소비되면 돌아오는 자여서 지금의 상태로 되돌아오게 되는 작은 결실과 작은 이익을 가져오고, 범신천(梵身天)에 태어남으로 이끄는 보시하는 마음은 그 업(業)과 행운과 축복과 힘이 다 소비되어도 돌아오지 않는 자여서 지금의 상태로 되돌아오지 않게 되는 큰 결실과 큰 이익을 가져옵니다. 


특히, 큰 결실과 큰 이익을 가져오는 보시를 마음[심(心)의 장식이고 마음의 필수품인 보시라고 합니다. 심(心)은 행위 하는 마음이어서, 행위의 뿌리입니다. 보시는 좋은 것이고 행복한 과(果)와 보(報)를 가져오는 것이지만, 그 뿌리에 이런 저런 소유에 속하는 것들이 함께하면 결실[과(果)]와 이익을 줄어들게 하여 큰 결실과 큰 이익이 없는 보시가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그 뿌리에 이런 저런 소유에 속하는 것들이 함께하지 않으면 결실[과(果)]와 이익을 줄어들게 하지 않아 큰 결실과 큰 이익이 있는 보시가 되는 것입니다.


8) 올바른 보시행(布施行)


올바른 보시행(布施行)


재시(財施)-법시(法施)-무외시(無畏施)의 세 가지 보시(布施)는 생겨나는 효과를 나누어 가지는 특성이 있어서, 살아서는 행복하고 죽어서는 하늘에 태어나는 힘이 됩니다. 스스로 계(戒)를 중시하는 자 되어, 행위의 결실이 분명함을 믿으면서 법답게 얻어진 것을 밝은 마음으로 보시할 때, 청정한 그 보시는 커다란 결실을 가져옵니다. 


그러므로 공손하게 보시하고, 마음을 다하여 보시하고, 자기 손으로 직접 보시하고, 선물하듯이 보시하고, 결실이 있다는 견해를 가지고 보시해야 합니다. 마음이, 보시하기 전에 즐겁고 보시할 때 깨끗하고 보시한 뒤 기쁘다면, 그것이 보시의 성취(成就)입니다. 그리고 탐(貪)과 진(嗔)과 치(癡)를 여의었거나, 길들이는 실천을 하는 자에게 보시해야 합니다[복전(福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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