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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류자-아라한 스스로 앎 & 포괄적 목표(개원법회-부산27-150728)

0 693 2018.04.19 19:06
▣ 예류자-아라한 스스로 앎 & 포괄적 목표(개원법회-부산27-150728)   
[동영상] ☞ https://youtu.be/PARehpa9dxI
예류자와 아라한이 스스로 자기의 성취를 안다는 점을 말하기 위해 다시 올립니다. 그러나 3년 전 자료이고 동영상이라는 점을 감안하고 보시기 바랍니다.
9. 스스로 예류자-아라한인줄 앎
1) 아라한
a) 방법이 있는 가 경(S35:153) -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눈으로 형색을 본 뒤 안으로 탐(貪)과 진(嗔)과 치(癡)가 있으면 '내 안에는 탐(貪)과 진(嗔)과 치(癡)가 있다.'라고 꿰뚫어 안다. 안으로 탐(貪)과 진(嗔)과 치(癡)가 없으면 '내 안에는 탐(貪)과 진(嗔)과 치(癡)가 없다.'라고 꿰뚫어 안다. 비구들이여, 비구가 이렇게 눈으로 형색을 본 뒤 안으로 탐(貪)과 진(嗔)과 치(癡)가 있으면 '내 안에는 탐(貪)과 진(嗔)과 치(癡)가 있다.'라고 꿰뚫어 알고 안으로 탐(貪)과 진(嗔)과 치(癡)가 없으면 '내 안에는 탐(貪)과 진(嗔)과 치(癡)가 없다.'라고 꿰뚫어 아는데도 이러한 법들이 믿음을 통해서 알아져야 하고, 개인적으로 좋아함을 통해서 알아져야 하고, 구전을 통해서 알아져야 하고, 이론적인 생각을 통해서 알아져야 하고, 사색을 통해서 알아져야 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비구들이여, 그러면 이러한 법들은 지혜를 통해서 본 뒤에 알아져야 하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비구들이여, 이것이 바로 믿음과 관계없이, 개인적으로 좋아함과 관계없이, 구전과 관계없이, 이론적인 생각과 관계없이, 사색하여 얻은 견해와 관계없이, 비구가 '태어남은 다했다. 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꿰뚫어 안다고 구경의 지혜를 드러내는 바로 그 방법이다."
b) 산다까 경(M76) - "아난다 존자시여, 비구가 모든 번뇌를 부수었고 삶을 완성했으며 할 바를 다 했고 짐을 내려놓았으며 참된 이상을 실현했고 삶의 족쇄를 끊었으며 바른 구경의 지혜로 해탈한 아라한이 되면 걸어갈 때에도 서 있을 때에도 잠잘 때에도 깰 때에도 언제나 한결같이 '나의 번뇌는 멸했다.'라는 지와 견이 현전해있습니까?"
"산다까여, 이에 대해서는 비유를 들겠습니다. 여기서 어떤 지자들은 비유를 통해 말의 뜻을 완전하게 알 것입니다. 산다까여,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의 팔과 다리가 끊어졌다고 합시다. 그는 걸어갈 때에도 서 있을 때에도 잠잘 때에도 깰 때에도 언제나 한결같이 '나의 팔과 다리는 끊어졌다.'라고 알겠습니까, 아니면 그것을 반조할 때 '나의 팔과 다리는 끊어졌다.'라고 알겠습니까?"
"아난다 존자시여, 그 사람은 언제나 한결같이 '나의 팔과 다리는 끊어졌다.'라고 아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그가 반조할 때 '나의 팔과 다리는 끊어졌다.'라고 압니다."
"산다까여, 그와 같이 비구가 모든 번뇌를 부수었고 삶을 완성했으며 할 바를 다 했고 짐을 내려놓았으며 참된 이상을 실현했고 삶의 족쇄를 끊었으며 바른 구경의 지혜로 해탈한 아라한이 되어도 걸어가거나 서 있거나 잠자거나 깰 때에 언제나 한결같이 '나의 번뇌는 멸했다.'라는 지와 견이 현전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을 반조할 때 '나의 번뇌는 멸했다.'라고 압니다."
c) 그러나 아라한의 성취는 검증을 받습니다. <설명 경(A10:84)>은 「도반들이여, 여기 비구는 구경의 지혜를 설합니다. '태어남은 다했다. 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꿰뚫어 안다.'라고. 그러면 여래나 혹은 선(禪)을 닦고 증득에 능숙하고 남의 마음을 아는데 능숙하고 남의 마음 길을 아는데 능숙한 여래의 제자가 그를 면밀히 조사하고 집요하게 묻고 반복해서 질문합니다. 그러면 그는 사막에 처하고 황무지에 처하고 곤경에 처하고 재난에 처하고 재앙에 처합니다.」라고 하는데, 아라한의 성취를 선언하면 먼저 아라한을 성취한 자에 의해 검증이 행해진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d) 이렇게 검증된 아라한의 삶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정신경(淨信經)(D29)>에 의하면, 아라한이어서 번뇌가 다하고 삶을 완성했으며 할 바를 다했고 짐을 내려놓았으며 참된 이상을 실현했고 삶의 족쇄가 멸진되었으며 바른 구경의 지혜로 해탈한 비구는 아홉 가지 경우들을 범할 수가 없습니다.
 ① 번뇌 다한 비구는 고의로 산 생명의 목숨을 빼앗을 수가 없습니다.
 ② 번뇌 다한 비구는 도둑질인 주지 않은 것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③ 번뇌 다한 비구는 성행위를 할 수가 없습니다.
 ④ 번뇌 다한 비구는 고의로 거짓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⑤ 번뇌 다한 비구는 전에 재가자였을 때처럼 비축해 두고 소유적 사유를 가지고 즐길 수가 없습니다.
 ⑥ 번뇌 다한 비구는 열의 때문에 잘못된 길을 갈 수가 없습니다.
 ⑦ 번뇌 다한 비구는 성냄 때문에 잘못된 길을 갈 수가 없습니다.
 ⑧ 번뇌 다한 비구는 어리석음 때문에 잘못된 길을 갈 수가 없습니다.
 ⑨ 번뇌 다한 비구는 두려움 때문에 잘못된 길을 갈 수가 없습니다.
2) 예류자
<꼬삼비 경(M48)>은 「성스럽고, 출리(出離)로 인도하는 견해는 그것을 실천하는 자를 어떻게 바르게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가?」라고 묻고서 일곱 가지 앎으로 답합니다.
• 성스럽고 출세간적이고 범부들과 함께하지 않는 앎① - 나에게 묶임덮힘에 의해 묶인감춰진 citta가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알지 못하게 하고 보지 못하게 하는, 안으로 제거되지 않은 그런 묶임덮힘이 있는가? → [묶임덮힘 : 욕탐(慾貪)-진에-해태혼침-들뜸후회-의심 - 이 세상에 대한 사색에 몰두 - 저 세상에 대한 사색에 몰두 - 논쟁을 하고 말다툼을 하고 분쟁하면서 혀를 무기 삼아 서로를 찌름] → 나에게 묶임덮힘에 의해 묶인감춰진 citta가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알지 못하게 하고 보지 못하게 하는, 안으로 제거되지 않은 그런 묶임덮힘이 없다. 나의 mano는 진리의 깨달음을 위해 잘 지향되어 있다.
• 성스럽고 출세간적이고 범부들과 함께하지 않는 앎② - ‘내가 이런 견해를 받들어 행하고 닦고 거듭하면 스스로 사마타[止]를 얻고 스스로 적멸을 얻게 되는가?’ → ‘내가 이런 견해를 받들어 행하고 닦고 거듭하면 스스로 사마타[止]를 얻고 스스로 적멸을 얻게 된다.’라고.
• 성스럽고 출세간적이고 범부들과 함께하지 않는 앎③ - ‘우리 교단 외부에 내 견해와 동일한 견해를 가진 사문-바라문이 있는가?’ → ‘우리 교단 외부에 내 견해와 동일한 견해를 가진 사문-바라문이 없다.’라고.
• 성스럽고 출세간적이고 범부들과 함께하지 않는 앎④ - (견해를 구족한 사람의 성품 1) 그는 복권이 제정된 그런 계를 범하더라도 즉시에 스승이나 지자들이나 동료 수행자들에게 고하고 드러내고 공개한다. 고하고 드러내고 공개하여 미래를 단속한다.
• 성스럽고 출세간적이고 범부들과 함께하지 않는 앎⑤ - (견해를 구족한 사람의 성품 2) 그는 동료 수행자들을 위해 해야 할 크고 작은 여러 가지 일들을 열심히 하면서도 높은 계와 높은 마음과 높은 지혜를 공부 짓기 위해 큰 뜻을 품는다.
• 성스럽고 출세간적이고 범부들과 함께하지 않는 앎⑥ - (견해를 구족한 사람의 힘 1) 여래가 선언한 법과 율이 설해지면 그는 정신을 기울이고 작의하고 온 마음을 쏟고 귀 기울여 법을 배운다.
• 성스럽고 출세간적이고 범부들과 함께하지 않는 앎⑦ - (견해를 구족한 사람의 힘 2) 여래가 선언한 법과 율이 설해지면 뜻에서 영감을 얻고 법에서 영감을 얻고 법과 관계된 환희를 얻는다.
경전은 「이와 같이 일곱 가지 요소를 갖춘 성스러운 제자의 성품은 예류과를 실현함으로써 잘 검증된다. 이와 같이 일곱 가지 요소를 갖춘 성스러운 제자는 예류과(預流果)를 갖춘 것이다.」로 마무리 됩니다.
그렇다면 예류자를 성취한 사람은 스스로 예류자인 줄 압니다. 다만, 스스로 예류자라고 알기 위해서는 이 경에서 제시하는 일곱 가지 요소를 바르게 갖추고 있는지 자기 안에서 잘 관찰해야 할 것입니다. 혹시라도 자기 안에서 이러한 요소들을 관찰해내지 못한 상태에서 스스로 예류자임을 선언한다면, 바른 견해를 갖추지 못한 자의 오해일 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니 신중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일곱 가지 요소 중 첫 번째 요소는 욕탐(慾貪)[kāmarāga]을 필두로 하는 다섯 장애 없음을 포함합니다. 이때, 욕탐(慾貪)[kāmarāga] 없음은 욕계를 벗어나 색계에 들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예류자는 삼매에 들지 않고 이르는 길[믿음을 따르는 자]도 있습니다. 불법승 삼보에 대한 아주 정확한 믿음과 계를 지킴에 의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경의 내용은 법을 따르는 자의 길에 의한 예류자만을 제한적으로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삼매에 의하지 않고도 믿음을 따르는 길에 의해 색계에 들 수 있다는 것인지 잘 해석되지 않습니다. 연구해야 할 주제입니다.
10. 유학(有學)에 이르지 못한 제자들 - 불교의 포괄적 목표
그렇다고 불교 공부가 벗어남만을 영역으로 하는 것은 아닙니다. 벗어나기 위한 존재의 확립 또한 벗어남을 위한 중요한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존재의 확립이 벗어남을 지향하지 못하고 존재에 안주해 버리면 벗어남으로의 공부는 시작되지 않는 것입니다.
※ '팔정도(八正道)를 닦기 위한 조건 7가지' 참조 ☞ http://cafe.naver.com/happybupdang/11522 
그래서 부처님은 벗어남 이전의 과정을 벗어남으로 연결하는 예비적 공부에 대해서도 강조합니다. <법의 걸음 경(A4:29)[dhammapadasuttaṃ])>은 「이것은 최초의 것으로 인정되었고, 오랜 세월 동안 유지되어 왔고, 계보라고 알려졌고, 오래된 것이다. 그것은 거부하면 안 되는 것이고 과거에도 거부되지 않았고 현재에도 거부되지 않으며 미래에도 거부되지 않을 것이며 지혜로운 사문들과 바라문들에 의해 비난받지 않는 것이다.」
aggaññaṃ rattaññaṃ vaṃsaññaṃ porāṇaṃ asaṃkiṇṇaṃ asaṃkiṇṇapubbaṃ, na saṃkīyati na saṃkīyissati, appaṭikuṭṭhaṃ samaṇehi brāhmaṇehi viññūhi.
라는 드문 찬사를 동원하여 네 가지 '법의 걸음[dhammapada]'을 설명하고 있는데, 의업(意業)에 속하는 두 가지의 제어[anabhijjhā-abyāpāda ⇒ 보시(布施)와 자비(慈悲)]에 이어 사념처에 의한 바른 삼매의 비중을 드러내 주는 것입니다.
※ 네 가지 법의 걸음
• anabhijjhā[간탐(慳貪) 않음] ⇒ 보시(布施)
• abyāpāda[진에(嗔恚) 않음] ⇒ 자비(慈悲)
• sammāsati[정념(正念)] ⇒ 사념처(四念處)
• sammāsamādhi[정정(正定)] ⇒ 사선(四禪)
또한, <넘쳐흐름 경(A8:39)>는 오계(五戒)를 지킴이 보시(布施)라고 알려주면서 법의 걸음과 동일한 찬사를 말합니다. 의업(意業) 이전에 신업(身業)과 구업(口業)이 제어되어야 하는 필요성을 나타내 주는 것입니다.
결국 신구의(身口意) 삼업과 정념(正念)[사념처(四念處)]-정정(正定)[사선(四禪)]의 전체 과정의 찬탄을 통해 바르게 벗어남[사마타-위빳사나]로 연결될 수 있는 존재의 확립을 설명한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은 팔정도(八正道)입니다. 팔정도는 정정(正定)과 정정을 위한 필수품의 과정으로 구성되는데, 업(業)의 제어[→ 신구의 삼업] 위에서 삼매를 성취[→ 사념처]하는 두 가지 필수품을 갖춘 삼매로 설명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부처님의 제자는 공부의 영역[사마타-위빳사나]에 있는 사람들로서의 사쌍팔배(四雙八輩)와 그 준비 과정에서 팔정도를 수행하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이해 위에서 부처님은 다시 팔정도의 영역을 확장해 줍니다. 팔정도를 닦고 많이 행하는 것으로서 사마타-위빳사나를 설명하는데, 그럼으로써 불만족의 해소를 위한 특별한 길[고멸도(苦滅道)]을 포괄하여 팔정도(八正道)라고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한편, 앞[불교는 무엇인가? - 사성제로의 접근]에서 알아보았지만, 불교신자는 오계를 통해 살아서의 인간다운 삶과 죽어서는 인간으로의 태어남을 확보하고, 보시를 통해 살아서의 욕계하늘다운 삶과 죽어서는 욕계하늘에의 태어남을 확보하며, 사념처(四念處) 수행을 통해 삼매를 성취함으로써 욕계(慾界)에서 벗어나 색계(色界)-무색계(無色界) 하늘로 향상합니다. 불교 공부 즉 팔정도가 불만족의 완전한 해소인 해탈-열반의 실현만을 목표로 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의 포괄적인 목표는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 「존재로서의 행복에 토대한 존재의 소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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