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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아 - 나는 누구[오취온-유신-식과 명색] - 삼법인[무상-고-무아] - 연기 - 중도(깨달음 법회 180208)

0 1,451 2018.02.09 22:14

무아 - 나는 누구[오취온-유신-식과 명색] - 삼법인[무상--무아] - 연기 - 중도(깨달음 법회 180208)

[동영상] https://youtu.be/3wqQlIEC-ZQ


삶[나와 세상]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앎과 봄[여실지견(如實知見)] 위에서 실현된 부처님의 깨달음에 의해 선언된 무아(無我)는 내가 없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현존하는 내가 상락아정(常樂我淨)의 특성을 가지는 신적 존재라는 거짓 설정 즉 아(我)[attan – atman – 참된 것]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아(我) 아님 즉 무아(無我)인 것으로의 나는 누구입니까?


부처님은 나를 세 가지로 정의합니다. ①오취온(五取蘊)과 ②유신(有身) 그리고 ③식(識)과 명색(名色)의 서로 조건 됨에 의한 존재입니다. 지난 삶의 누적으로의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 오온(五蘊)에 대한 집착 상태인 오취온(五取蘊)이고, 이 상태는 몸과 함께한 상태여서 유신(有身)이며, 지난 삶의 누적인 오취온(五取蘊)에 의한 지금 삶의 전개[작의(作意)-촉(觸)]까지를 포함하는 식(識)과 명색(名色)의 서로 조건 됨에 의한 존재입니다.


①오취온(五取蘊)이든, ②유신(有身)이든, ③식(識)과 명색(名色)의 서로 조건 됨에 의한 존재이든 중생은 번뇌의 영향을 받는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탐진치(貪嗔癡)와 함께하는 유위(有爲)적 존재인 것입니다. 이렇게 유위적 존재는 행(行)이라고 부르는데 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부정(不淨)의 특성을 가집니다. 이것이 존재들의 실상(實相)이고,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는 것이 있는 그대로의 알고 봄입니다[여실지견(如實知見)]


무아(無我) 즉 참되지 않은 것은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으로 생겨나는 것입니까? 참되지 않다는 것은 조건들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조건들의 결합에 의해 생겨나고 조건들의 변화에 강제되어 변화하는 것인데, 조건[연(緣)]에 의해 생겨남[기(起)] 즉 연기(緣起)입니다. 이렇게 연기(緣起) 즉 조건들의 결합에 의해 생겨나고 조건들의 변화에 강제되어 변화하는 현상을 무상(無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무상(無常)한 것들은 그 조건의 다양함 때문에 완전히 제어되지 않습니다. 원하는 대로 생겨나고 원하는 대로 변화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불만족이 고(苦)입니다. 


이렇게 무아(無我)인 것은 무상(無常)이고 고(苦)입니다. 또한, 무상(無常)하고 고(苦)인 것은 아(我)라고 할 수 없습니다. 무아(無我)인 것입니다. 그래서 무아(無我)의 선언은 연기(緣起)라는 세상의 이치에 의한 것입니다. 이런 방법으로 무아(無我)와 연기(緣起)는 우선  순위 없이 불교를 대표하는 두 가지 중심 개념이 됩니다. 다만, 존재 상태를 직접 말하는 무아(無我)로써 깨달음을 선언하는 것이고, 왜 무아(無我)인지 또는 무아(無我)의 현상의 근거에 연기(緣起)를 두고 있을 뿐입니다.


이렇게 연기(緣起)와 무아(無我)는 부처님 깨달음의 중심입니다. 삶[나와 세상]에 대한 이런 이해 위에서 부처님은 불완전한 것[행(行)]들의 존재 상황[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부정(不淨)]의 문제를 해소하고 열반(涅槃)을 실현하는데, [무상(無常)의 가라앉음]-락(樂)-무아(無我)입니다.


그렇다면 행(行)은 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이고, 열반은 락(樂)-무아(無我)입니다. 그래서 행(行)과 열반을 포괄하는 모든 존재인 법에 대해 제행무상(諸行無常)-제행개고(諸行皆苦)-제법무아(諸法無我)라고 설명하게 되는데, 삼법인(三法印)입니다.


그런데 열반의 실현은 특별한 길이고 실천에 의하는데, 바로 팔정도(八正道)입니다. 팔정도(八正道)[ariyo aṭṭhaṅgiko magga] 바로 그 길의 실천을 통해 열반을 실현하게 되는데, 이런 실천을 중도(中道)[majjhimā paṭipadā]라고 합니다.


이때, 연기(緣起)-무아(無我)는 중도(中道) 곧 팔정도(八正道)와 연결됩니다. 팔정도(八正道)의 첫째 지분인 정견(正見)은 사성제(四聖諦)에 대한 앎으로 정의되는데, 이것은 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 곧 삼법인(三法印)과 연결된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중도(中道) 즉 팔정도(八正道) 바로 그 길의 실천을 통해 [무상(無常)의 가라앉음]-락(樂)-무아(無我)의 열반을 실현하는 것이 부처님 깨달음의 본질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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