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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메커니즘1[식과 명색으로부터 심(心)의 형성까지](깨달음 법회 180315)

0 1,755 2018.03.17 09:07

삶의 메커니즘1[식과 명색으로부터 심()의 형성까지](깨달음 법회 180315)

[동영상] https://youtu.be/vMNmaIH-U9Y

 

삶의 메커니즘을 현재시점에서 다시 정리하는 수업인데 식(識)과 명색(名色)에서 출발해 심(心)의 형성까지를 설명하였습니다.


메커니즘은 인식과 행위의 연결 관계로부터 시작되는데, 이것이 가르침의 중심입니다. 행위를 인식으로 직접 연결하는 찬다[chanda – 욕(欲)]과 인식(認識)을 가공하여 행위로 연결하는 딱까[takka – 갈애의 형성 또는 자기화 과정]으로의 구성입니다.

 

가르침의 중심 - [인식-행위-인식의 가공].png

 

인식은 육내입처(六內入處)가 무명(無明)의 요소인 욕탐(欲貪)의 간섭 위에 육외입처(六外入處)를 분별해 아는 것입니다. 이때, 육내입처 즉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는 식(識)과 근(根)이 함께한 상태입니다. 그리고 육외입처 즉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은 세상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몸과 함께 세상을 만나는 이야기이고 여기에 욕탐이 간섭하는 것입니다.


이때, 인식을 주도하는 자는 마음 즉 식(識)인데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식(意識)으로 배분됩니다. 그리고 대상인 세상과의 접점을 이루는 것은 근(根)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색성향미촉(色聲香味觸)의 물질세상과 물질 아닌 것으로의 법(法)입니다. 이때, 물질세상과의 접점은 몸이어서 안근(眼根)-이근(耳根)-비근(鼻根)-설근(舌根)-신근(身根)으로 구성됩니다[물질의 인식은 몸을 필요로 함]. 그러나 물질 아닌 것인 법(法)의 인식은 몸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의식(意識)이 직접 접점인 의근(意根)의 역할까지를 겸합니다. 이렇게 식(識)은 안식(眼識)~의식(意識)과 의근(意根)으로 배분되어 몸과 함께함으로써 의(意)라고 불리게 됩니다. 


※ 식(識) - 인식하는 마음, 심(心) - 행위 하는 마음, 의(意) - 식(識) 또는 심(心)이 몸과 함께한 상태


그런데 이렇게 함께하여 인식을 구성하는 마음과 몸 그리고 세상은 어디에서 온 것입니다. 어디서 와서 마음이 몸과 함께, 지금, 세상을 인식하는 것입니까?


식(識)과 명색(名色)은 서로 조건 되는 관계에 의해 오온(五蘊)과 촉(觸)-작의(作意)라고 정의됩니다. 이때, 오온(五蘊)은 지난 삶의 누적입니다. 그리고 오온(五蘊)의 집착[취(取)] 상태는 오취온(五取蘊)이라 불리는 ‘나’입니다. 물론 색(色)은 몸이기도 하지만 물질이기도 해서 몸인 색(色)으로 구성된 나와 물질세상을 포괄해서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런 이해에 의하면, 지난 삶의 누적인 식(識)과 명색(名色) 중 오온(五蘊)이 배분되어 육내입처(六內入處)와 육외입처(六外入處)를 이루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오온(五蘊) 중 수(受)-상(想)-행(行)은 물질 아닌 것인 법(法)과 대응합니다.


식(識)과 명색(名色) 중 오온(五蘊)을 제외하면 촉(觸)과 작의(作意)가 남습니다. 이때, 작의(作意)는 의(意)의 작용인데, 의(意)는 안식(眼識)~의식(意識)과 의근(意根)입니다. 즉 의(意)가 물질 접점인 몸과 함께 육외입처(六外入處)를 주목하면 새로운 식(識)을 새끼치는데, 이렇게 주목하는 의(意)의 작용이 작의(作意)입니다. 이런 과정으로 작의(作意)는 외입처에 대한 앎을 몸통으로 하고 자기 활동성을 가지는 마음인 식(識)을 만듭니다. 


인식은 다시 내입처(內入處)와 외입처(外入處) 그리고 새끼쳐진 식(識)이 함께하는 과정에 의해 외입처(外入處)를 락(樂)-고(苦)-불고불락(不苦不樂)의 느낌으로 경험하는데 수(受)입니다. 이 과정에서 내입처(內入處)-외입처(外入處)-식(識)이 함께하는 현상을 촉(觸)이라고 하는데, 삼사화합(三事和合)입니다. 이런 과정으로 촉(觸)은 외입처를 경험합니다.


이렇게 인식은 육내입처가 욕탐과 함께 육외입처를 인식하여 식(識)과 수(受)를 만드는 과정입니다. 또한, 지난 삶의 누적인 내가 지금 삶을 통해 세상을 만나면서 다시 세상을 알고[식(識)] 세상을 경험하는[수(受)] 과정입니다.


여기까지 진행되면 삶은 새로운 국면을 맞습니다. 지난 삶의 누적인 식(識)이 주도하던 삶에서 새로 생겨난 식(識)의 주도로 전환되는 것인데, 식(識)이 함께 생겨난 수(受)를 상(想)의 간섭 가운데 인식하는 과정입니다. 두 번이 인식 과정이 이어지기 때문에 먼저의 인식은 1차 인식, 나중의 인식은 2차 인식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상(想)은 경향이어서 삶의 질을 결정합니다. 부처님에 의해 선언된 존재하는 것들[열반(涅槃) 제외]의 실상은 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부정(不淨)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처럼 보지 못하는 중생들은 나와 세상을 거꾸로 보는 경향이 있는데, 상(想)이 병든 것이고 번뇌[루(漏)]입니다.


상(想)은 상락아정(常樂我淨)의 거꾸로 된 경향 위에 삶의 수준[질(質)]에 따라 욕상(慾想)-색상(色想)-무색상(無色想)으로 구성됩니다. 그리고 이런 병든 상태는 무명루(無明漏)-욕루(慾漏)-유루(有漏)의 세 가지 번뇌로 불립니다.


2차 인식은 1차 인식에서 외입처의 앎을 몸통으로 생겨난 마음인 식(識)이 함께 생겨난 수(受)를 이런 상(想) 즉 번뇌의 영향 위에서 인식하는 활동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지금 경험하는 느낌[락(樂)-고(苦)-불고불락(不苦不樂)]을 ①지속되는 것이라고 아는 왜곡된 앎[사실을 모름]으로의 무명(無明)과 그 위에서 잘못 알았기 때문에 ②붙잡아야 하는 즐거운 느낌[락(樂)]이라고 아는 왜곡된 앎으로의 탐(貪) 또는 ③밀쳐내야 하는 괴로운 느낌[고(苦)]이라고 아는 왜곡된 앎으로의 진(嗔)이 생겨납니다. 


이렇게 번뇌의 간섭 위에서 식(識)은 수(受)를 분별하여 무명(無明)과 탐(貪) 또는 진(嗔)을 만드는 과정이 2차인식인 것입니다. 이때, 조건인 번뇌와 결과인 무명(無明)을 합해서 치(癡)라고 합니다. 이렇게 삼독(三毒)이라고 불리는 탐(貪)-진(嗔)-치(癡)가 생겨납니다.


그런데 무명(無明)과 탐(貪) 또는 진(嗔)은 수(受)의 앎입니다. 그리고 1차 인식과 2차 인식을 포괄한 인식의 결과는 [외입처(外入處)의 앎+수(受)의 앎]입니다. 외입처(外入處)의 앎인 식(識)의 몸통이 수(受)의 앎만큼 커진 것입니다. 이렇게 부풀린 상태를 포괄적 의미로 앎[지(知)]이라고 합니다. 또한, 이렇게 몸집을 부풀린 식(識)에게는 심(心)이라는 이름이 붙여집니다.


이런 방법으로 행위 하는 마음인 심(心)이 생겨납니다. 1차 인식의 결과로 생겨난 식(識)이 2차 인식 즉 상(想)과 수(受)의 과정으로 몸집을 부풀려 심(心)이 되는 것입니다. 경(經)은 십이연기(十二緣起)의 행(行)의 정의에서 이 과정을 「심행(心行) = 상(想)-수(受)」라고 정의하는데, 심(心)을 형성하는 작용이 상(想)과 수(受)라는 의미입니다.[상(想)-수(受)의 과정을 형성 작용으로 하여 생겨나는 심(心)]. 


심(心)은 삶의 중심입니다. 그래서 심(心)이 무아(無我) 즉 생겨나는 것이라는 이해 또는 어떻게 생겨나는 것인지의 설명은 불교 안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라고 해야 합니다. 바로 이 주제에 대해 부처님은 식(識)이 상(想)-수(受)의 과정을 통해 몸집을 부풀리는 방법으로 생겨나는 것이라는 확정적인 가르침을 주신 것입니다. 만약 이 주제에서 흔들림이 있으면 불교는 흔들립니다. 중심으로부터 완전히 흔들려 더 이상 불교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불교의 중심을 세우는 주목해야 하는 가르침입니다.


특히, 이 주제는 심(心)을 중심으로 행위의 영역과 생겨나는 영역으로 삶을 구분해 줍니다. 그리고 행위 영역의 문제를 해소하는 방법으로의 사념처(四念處)와 생겨나는 영역의 문제를 해소하는 방법으로의 사마타-위빳사나가 정의됩니다.

 

삶과 수행 - 심(心).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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