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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스님의 십이연기 특강29 - 연기(緣起)의 용례경전 1)(근본경전연구회 190515)

0 603 2019.05.20 10:46

해피스님의 십이연기 특강29 - 연기(緣起)의 용례경전 1)(근본경전연구회 190515)

[동영상] https://youtu.be/-lRWL_kqPEM

 

연기(緣起) paṭiccasamuppāda의 용례 경전들을 모두 모아 정리하였습니다. ㅡ 「연기(緣起)를 보는 것은 법()을 보는 것이고, 법을 보는 것은 연기를 보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증득한 법은 연기에 토대한 법인데, 연기는 참으로 심오한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제자라면 연기를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연기를 철저히 여리(如理)하게 사고(思考)해야 합니다. 연기에 능숙해야 하고, 연기를 검증해야 합니다. 연기(緣起)를 보는 것은 업()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어서 업()과 보()에 숙련된 자가 현명한 사람입니다. 이것이 법()을 보는 사람의 삶입니다.

 

1. 연기(緣起)를 보는 것은 법()을 보는 것

 

‘yo paṭiccasamuppādaṃ passati so dhammaṃ passati; yo dhammaṃ passati so paṭiccasamuppādaṃ passatīti. 연기(緣起)를 보는 자는 법을 본다. ()을 보는 자는 연기(緣起)를 본다.(MN 28-코끼리 발 비유의 큰 경)

 

코끼리의 발자국은 큽니다. 그래서 밀림의 움직이는 생명들의 발자국들은 모두 코끼리 발자국 안에 포함됩니다. 그렇듯이 유익(有益)한 법()들은 모두 사성제(四聖諦)[cattāri ariyasaccaṃ -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 안에 들어 있습니다.

 

사리뿟따 존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도반들이여, 참으로 세존에 의해 이렇게 말해졌습니다. 연기(緣起)를 보는 그는 법을 본다. ()을 보는 그는 연기(緣起)를 본다. 이것이 연기(緣起)된 것들이니 오취온(五取蘊)이다[()]. 이 오취온(五取蘊)에 대한 찬다와 집착의 경향과 호의와 묶임이 괴로움의 일어남[고집(苦集)]이다. 이 오취온에 대한 욕탐(欲貪)의 제어와 욕탐의 버림이 괴로움의 소멸[고멸(苦滅)]이다.’라고. 도반들이여, 이렇게 되면 비구에게 많이 실천된 것입니다.[고멸도(苦滅道)- 고멸(苦滅)로 이끄는 실천]”

 

이렇게 연기(緣起)를 보는 것은 사성제(四聖諦)의 법()을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유익(有益)[kusala] 즉 고멸(苦滅)의 실현을 위한 모든 것을 보는 것입니다.

 

2. 부처님이 증득한 법은 연기에 토대한 법

 

세존에게 이런 심()의 떠오름이 있었다. 내가 성취한 이 법은 심오하고, 보기 어렵고, 깨닫기 어렵고, 평화롭고, 숭고하고, 딱까[갈애의 형성 또는 자기화(自己化) 과정]의 영역을 넘어섰고(atakkāvacaro), 독창적이고, 현자에게만 경험될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집착의 경향(ālaya)을 즐기고 집착의 경향을 좋아하고 집착의 경향을 기뻐한다. 집착의 경향을 즐기고 집착의 경향을 좋아하고 집착의 경향을 기뻐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토대 즉 이것의 조건성인 연기(緣起)(idappaccayatāpaṭiccasamuppādo)는 보여지기 어렵다. 또한 이러한 토대 즉 모든 행()들의 그침이고, 모든 재생을 초래하는 붙잡음을 놓음이고, 갈애의 부숨이고, 이탐(離貪)이고, 소멸(消滅)인 열반(涅槃)을 보기 어렵다. 그러니 내가 이 법을 설한다 해도 저들이 알지 못한다면 그것은 나만 피로하고 나만 불편해질 것이다.’라고.(SN 6.1-범천의 요청 경)

 

부처님이 성취한 법은 이렇게 이것의 조건성인 연기(緣起)를 토대로 하는 심오한 것입니다. 자기화 된[()를 전제한] 시각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로서는 보기 어렵고, 깨닫기 어렵습니다. 딱까[갈애의 형성 또는 자기화(自己化) 과정]의 영역을 넘어섬으로써 자기화가 해소된 평화롭고, 숭고한 것입니다. 오랜 기간 삶을 지배해온 아()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기 위한 독창성을 갖춘 것이어서 오직 현명한 사람들만이 경험할 수 있습니다.

 

특히, 부처님의 깨달음의 중심 개념은 딱까[갈애의 형성 또는 자기화(自己化) 과정]의 영역을 넘어섬(atakkāvacara)’이고 중생을 대표하는 개념은 집착의 경향(ālaya)’인데, 이런 대응관계에 의하면 ālaya는 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유식(唯識)에서 이 ālaya에 식()의 개념을 부여하여 아뢰야식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깨달음과 중생의 삶에 대한 개념적 이해에서 부처님과 차이가 있다는 점은 주목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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