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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본27 - 법에 머무는 자 경 & 아라까 경(서울 저녁 161222) [바라문의 정의 & manta]

0 534 2017.09.25 22:01

▣ 교본27 - 법에 머무는 자 경 & 아라까 경(서울 저녁 161222)

   [동영상] https://youtu.be/lPk0tASbagU


1. 공부[교학+수행]하는 비구가 '법에 머무는 자'라고 말하는 두 개의 <법에 머무는 자 경[답글]>은 ①내적인 마음의 사마타와 ②법의 위빳사나를 수행으로 제시합니다. 이때, 내적인 마음의 사마타와 법의 위빳사나는 삼매 위에서 법을 드러나게 하여 법의 관찰을 통해 여실지견으로 연결하는 과정의 수행입니다.
 
수행지도(修行地圖) 참조 ☞ http://cafe.naver.com/happybupdang/12973

2. <아라까 경[답글]>은 「사람들의 생명이란 사소하고 짧고 빠르고 괴로움이 많고 절망이 많아서 지혜[’참고참조]로써 깨달아야 하고 선()을 행해야 하고 범행을 실천해야 한다. 태어난 자에게 불사(不死)란 없다.」라는 주제를 여러 가지 비유를 통해 설합니다.

이때, 바라문과 manta[만뜨라-진언]라는 두 용어의 의미는 주의해야 합니다. 바라문의 본분을 감당하지 못하는 수행자들의 세속화된 삶에 따른 용어의 의미 변화가 현재의 바라문이란 의미를 만들었고, 마찬가지 개념으로 지혜를 의미하는 manta가 만뜨라[진언]으로 의미 변환이 일어났다는 이해입니다. 이런 이해가 필요한 이유는 manta를 만뜨라[진언]으로 이해할 경우 부처님 가르침의 근본이 진언을 통해 깨달으라는 의미가 되기 때문입니다.

바라문의 정의
 
<세기 경(D27)(http://cafe.naver.com/happybupdang/5969)>은 바라문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ㅡ 「와셋타여, 사악하고 해로운 법들을 없앤다고 해서 '바라문, 바라문'이라는 단어가 첫 번째로 생겨났다.
 
pāpake akusale dhamme vāhentīti kho, vāseṭṭha, ‘brāhmaṇā, brāhmaṇā’ tveva paṭhamaṃ akkharaṃ upanibbattaṃ.
 
그들은 숲 속에서 초막을 짓고 초막에서 참선을 하였다. 그들은 숯불을 피우지 않았고 연기를 내지 않았고 절굿공이를 내려놓았으며 저녁에는 저녁식사를 위하고 아침에는 아침식사를 위해서 마을과 읍과 수도로 내려가서 걸식을 하였다. 그들은 식사를 마친 뒤 다시 숲 속의 초막으로 가서 참선을 하였다. 사람들이 이런 그들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여보시오. 이 중생들은 숲 속에서 초막을 짓고 초막에서 참선을 합니다. 그들은 숯불을 피우지 않았고 연기를 내지 않았고 절굿공이를 내려놓았으며 저녁에는 저녁식사를 위하고 아침에는 아침식사를 위해서 마을과 읍과 수도로 내려가서 걸식을 합니다. 그들은 식사를 마친 뒤 다시 숲 속의 초막으로 가서 참선을 합니다.'라고. 와셋타여, 참선을 한다고 해서 '자야까, 자야까[‘jhāyakā, jhāyakā’]'라는 두 번째 단어가 생겨났다." jhāyaka: one who meditates. (m.)

"와셋타여, 그 중생들 가운데 어떤 중생들은 숲 속의 초막에서 참선을 하는 것을 감당할 수 없게 되자 마을의 경계나 읍의 경계로 내려와서 책을 만들면서 정착을 하였다. 인간들은 이런 그들을 보자 이렇게 말했다. '이 중생들은 숲 속의 초막에서 참선을 하는 것을 감당할 수 없어서 마을의 경계나 읍의 경계로 내려와서 베다를 만들면서 정착을 하였다. 이들은 이제 참선을 하지 않는다.'라고. 와셋타여, 이제 참선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앗자야까, 앗자야까(베다를 공부하는 자)[‘ajjhāyakā ajjhāyakā’]'라는 세 번째 단어가 생겨났다. 와셋타여, 그 시절에는 이들이 저열한 것으로 간주되었지만 지금 이 시대에는 최상으로 간주된다. ajjhāyaka: an instructor; teacher. (m.)
 
와셋타여, 이와 같이 이러한 바라문의 일원이 이와 같은 태고적 세상의 기원과 관계된 단어에 의해서 형성되었다. 그들은 중생들로부터 생겨났으며 다른 것들로부터 생겨난 것이 아니다. 그들은 같은 자들에 의해서 생겨났으며 다른 자들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 아니다. 그들은 법에 의해서 생겨났으며 비법에 의해서가 아니다. 와셋타여, 왜냐하면 지금여기에서도 내세에서도 법이 이 세상에서 최상이기 때문이다." 
 
삼명경(D13)(http://cafe.naver.com/happybupdang/5979)은 바라문과 삼베다에 능통한 바라문[tevijjā brāhmaṇā]을 구분하여 설하고 있는데, 이 경전의 내용을 통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와셋타여, 그와 마찬가지로 삼 베다에 능통한 바라문[tevijjā brāhmaṇā]들은 바라문들이 행하는 법들을 버려버리고 바라문들이 행하지 않는 법들을 받아 지니면서[ye dhammā brāhmaṇakārakā te dhamme pahāya vattamānā, ye dhammā abrāhmaṇakārakā te dhamme samādāya vattamānā] 이렇게 말한다. '인드라를 소청(所請)하나이다. 소마를 소청하나이다. 와루라를 소청하나이다. 이사나를 소청하나이다. 빠자빠띠를 소청하나이다. 범천을 소청하나이다. 마힛디를 소청하나이다. 야마를 소청하나이다.'라고. 와셋타여, 삼베다에 능통한 바라문들은 바라문들이 행하는 법들을 버려버리고 바라문들이 행하지 않는 법들을 받아 지니면서 소청한다고 해서, 빈다고 해서, 원한다고 해서, 기뻐한다고 해서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범천의 일원이 될 것이라는 이런 경우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깟사빠 사자후 경(D8)(http://cafe.naver.com/happybupdang/8432)>

ㅡ 「깟사빠여, 참으로 비구가 적의가 없고 진에(瞋恚)가 없는 자애의 마음을 닦고, 번뇌들을 부수어 번뇌가 없는 심해탈(心解脫)과 혜해탈(慧解脫)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실다운 지혜로 실현하고 성취하여 머문다. 깟사빠여, 이를 두고 비구는 사문이라고도 바라문이라고도 불린다.
 
yato kho, kassapa, bhikkhu averaṃ abyāpajjaṃ mettacittaṃ bhāveti, āsavānañca khayā anāsavaṃ cetovimuttiṃ paññāvimuttiṃ diṭṭheva dhamme sayaṃ abhiññā sacchikatvā upasampajja viharati. ayaṃ vuccati, kassapa, bhikkhu samaṇo itipi brāhmaṇo itipi.
  
라고 하여, 발전적인 정의를 제시합니다.
 
manta
 
mantamantra인데, 바라문의 정의가 브라만교에서 세속화되었듯이 mantra의 의미도 지혜를 말하는 원래의 의미가 브라만교의 세속화의 과정에서 만뜨라[주문]으로 변형되었다고 이해할 수 있음. 이 경에서는 이런 이해를 감안해 지혜로 해석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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