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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회(輪迴)

윤회의 진실 - 리허설(서울 161201

0 401 2017.08.30 22:04

▣ 윤회의 진실 - 리허설(서울 161201)

   [동영상] https://youtu.be/9Iw6L6kaJ4U


세미나 리허설로 운영하였습니다. 교재의 '선행하는 공부'를 위주로 설명하였는데 1)사람의 정의. 2)중(中)과 중도(中道), 3)atakka와 ponabbhavika가 중심주제가 되었습니다.

교재 ☞ http://cafe.naver.com/happybupdang/12921 에 첨부 


윤회의 진실 - 리허설


1. 사람의 정의 → 단견(斷見)의 극복


육사외도 중 한 사람인 아지따 께사깜발리는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사람을 정의하고 부처님은 지수화풍공식(地水火風空識)의 육계(六界)로 사람이 구성된다고 정의합니다.


사람이 물질인 몸으로 구성된다는 주장과 물질인 몸과 물질 아닌 것인 마음[식(識)]이 함께하여 구성된다는 두 가지 주장입니다. 그러면 아지따 께사깜발리는 사람에게 마음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마음 없이 몸만 가지고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요소적인 측면에서 마음은 몸 특히 뇌(腦)의 작용에 의해 생겨나는 2차적 존재라는 견해입니다. 그래서 몸의 작용에 의해 생겨나기 때문에 몸에 종속된 것인 마음이 몸과 함께 한 평생을 살아가다가 몸이 죽으면 토대의 상실로 인해 소멸되고 만다는 주장인데, 단견(斷見) 또는 단멸론(斷滅論)이고 유물론(唯物論)입니다. 반면에 부처님은 마음 즉 식(識)이 2차적인 존재가 아니고 몸과 대등한 1차적 존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몸에 종속되지 않는 그래서 몸과 대등한 마음이 몸과 함께 사람 즉 나를 이루어 살아 가다가 몸이 죽으면 몸 따라 죽지 않고 새로운 몸과 만나 다음 생을 이어 간다는 주장입니다.


그런데 두 가지 주장 중에 누구의 주장이 참이고, 누구의 주장은 거짓일까요?


부처님은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한 스승입니다. 그래서 그의 가르침은 완전한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아지따 께사깜발리는 완전한 깨달음에 도달하지 못한 외도(外道)의 스승입니다. 그래서 그의 가르침은 완전한 가르침이 아닙니다. 


사람에 대한 정의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완전한 깨달음에 의한 완전한 가르침이 말하는 육계(六界)가 사람에 대한 참의 정의입니다. 그리고 완전하지 못한 깨달음에 의한 완전하지 못한 가르침이 말하는 사대(四大)는 사람에 대한 거짓의 정의입니다.


그러므로 불교신자라면 당연히 「사람은 육계(六界)로 구성되었고, 그래서 마음[식(識)]은 몸이 죽어도 따라 죽지 않고 새로운 몸과 함께 다음 생을 이어 살아간다.」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가르침에 의거한 바른 삶의 실천으로 삶을 향상해야 할 것입니다. 


육계(六界)의 가르침은 이렇게 단견(斷見)을 극복합니다.


2. 중(中)과 중도(中道) → 상견(常見)의 극복 & 윤회에서 벗어남


단견(斷見)도 상견(常見)도 삶에 대한 정확한 해석이 아닙니다. 부처님에 의해 제시된 삶에 대한 정확한 해석은 십이연기(十二緣起)입니다. 그리고 삶에 대한 정확한 해석 즉 삶의 중심(中心)을 꿰는 것으로의 십이연기를 부처님은 중(中)이라고 부릅니다. 

 

※ 육계(六界)로 구성되어 윤회하는 사람에게 중생의 삶 즉 고(苦)가 생겨나는 삶의 과정[사성제(四聖諦)의 고집성제(苦集聖諦)]를 있는 그대로 설명하는 것이 중(中)이고, 곧 십이연기(十二緣起)라는 해석입니다. 


그런데 십이연기는 상견(常見)[고정된 존재 즉 아(我)의 윤회]가 아닙니다. 매 순간 삶의 과정에서 생기고 부풀리고 머물고 쌓이는 과정을 통해 변화하는 식(識)[무아(無我)]에 의한 윤회(輪迴)를 설명하는데, 「연기(緣起)하는 식(識)의 윤회(輪迴)」입니다.


중(中)인 십이연기(十二緣起)는 이렇게 상견(常見)을 극복합니다.

 

이렇게 중(中)인 십이연기 즉 삶의 과정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설명이 알려지면 그 위에서 실제적인(*) 고멸(苦滅)의 방법이 제시되는데, 팔정도(八正道)입니다. 그러나 방법은 실천되어야 성과를 거둘 수 있습니다. 그래서 팔정도는 실천되어야 하는데, 그 실천을 중도(中道)라고 합니다[사성제(四聖諦)의 고멸도성제(苦滅道聖諦)]. 


(*) 단견(斷見)-상견(常見) 등 삶에 대한 잘못된 해석 위에서 제시되는 방법으로는 고멸(苦滅)이 실제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실제적으로 고멸(苦滅)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삶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해석이 전제되어야 하고, 그때 그 위에서 제시되는 방법이 실제적으로 고멸(苦滅)로 이끈다는 의미입니다.


중도(中道)인 팔정도(八正道)의 실천은 이렇게 윤회에서의 벗어남으로 이끕니다. 


즉 고(苦)를 초래하는 삶의 과정인 중(中)[십이연기]의 문제를 해소하여 고멸(苦滅)을 실현하는 방법은 팔정도(八正道)이고, 직접 고멸을 실현하는 팔정도의 실천은 중도(中道)입니다.


; 고(苦)와 고멸(苦滅) ⇒ 중(中)[고집(苦集)]과 중도(中道)[고멸도(苦滅道)]


3. atakka와 ponobbhavika


부처님의 깨달음을 대표하는 개념은 atakka[takka를 넘어섬]이고 중생을 대표하는 개념은 ālaya[집착의 경향]입니다. 이때, takka는 갈애의 형성과정인데 다시 존재로 이끄는 중생의 삶입니다.


중생의 삶 즉 윤회는 존재[유(有)]의 삶으로 설명됩니다. 오취온(五取蘊)이고 유신(有身)으로 불리는 '나'이고, 이런 존재인 내가 이 몸이 유지되는 동안은 무아(無我)적인 삶을 살다가 이 몸이 무너지면 윤회하여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때, '다시 존재로 이끎'이란 용어가 있는데 ponobbhavika입니다. 몇 가지 불선법(不善法)이 다시 존재로 이끄는 그것으로 제시되는데, 그 중 근본이 되는 것은 번뇌[루(漏)]입니다.


그래서 불교 수행은 번뇌의 부숨으로 완성됩니다. 누진(漏盡)이라는 용어인데, 누진명(漏盡明), 누진통(漏盡通), 누진지(漏盡知) 등의 형태로써 깨달음의 완성을 설명합니다. 


즉 ponobbhavika인 번뇌를 완전히 부수면 다시 존재로 이끌리지 않아서 takka[갈애의 형성-중생의 삶]을 넘어선 atakka[갈애의 소멸-해탈된 삶]이 실현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교수행의 근본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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