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교리공부 > 윤회(輪迴)

윤회(輪迴)

삶의 메커니즘 3)[외입처-경(境)-유식무경](윤회의 진실 170323)

0 941 2017.08.31 10:34
▣ 삶의 메커니즘 3)[외입처-경(境)-유식무경](윤회의 진실 170323)
   [동영상] https://youtu.be/LQBr8NK3P48
 

1차 인식의 이해[수정].png

 
1. 내입처(內入處)와 외입처(外入處)

1차 인식은 지금 삶에서 내입처(內入處)-외입처(外入處)-욕탐(欲貪)의 삼자 간에 이루어지는 인식작용입니다. 내입처[channaṃ ajjhattikānaṃ āyatana]가 욕탐[chandarāga]의 간섭 가운데 외입처[channaṃ bāhirānaṃ āyatana]를 감각하여 분별해 아는 작용을 통해 외입처의 앎인 식(識)[viññāṇa]를 만드는 과정입니다. 이때, 내입처는 식(識)[마음]과 근(根)[몸]이 함께하여 구성된 감각주관 즉 나입니다. 지금 인식되는 감각의 대상에 따라 안처(眼處)-이처(耳處)-비처(鼻處)-설처(舌處)-신처(身處)-의처(意處)인데, 보통은 처(處)를 생략하고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라고 부릅니다. 이때, 의(意) [mano]는 두 가지로 이해해야 합니다. 의식(意識)과 의근(意根)이 함께한 것으로의 의처(意處)의 줄임말이기도 하고, 식(識)이 몸과 함께한 상태[육식(六識)+의근(意根)]이기도 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외입처도 색처(色處)-성처(聲處)-향처(香處)-미처(味處)-촉처(觸處)-법처(法處)인데, 처(處)를 생략하고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으로 부른다고 이해해야 합니다. 그런데 처(處)이면서 처(處)를 생략하여 부르는 외입처와는 별개의 것으로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을 의미하는 개념도 있는데, 경(境)[visaya(*)]입니다. 

(*) Visaya [cp. Sk. viśaya, fr. vi+śī] 1. locality, spot, region; world, realm, province, neighbourhood Sn 977. Often in foll. combns: petti˚; (or pitti˚) and pettika (a) the world of the manes or petas M i.73; S iii.224; v.342 356 sq.; A i.37, 267; ii.126 sq.; iii.211, 339, 414 sq. iv.405 sq.; v.182 sq.; Pv ii.22; ii.79; J i.51; PvA 25 sq. 59 sq., 214. (b) the way of the fathers, native or proper beat or range D iii.58; S v.146 sq.; A iii.67; J ii.59 Yama˚; the realm of Yama or the Dead Pv ii.82 (=petaloka PvA 107).

2. reach, sphere (of the senses) range, scope; object, characteristic, attribute (cp. Cpd. 143 n. 2) S v.218 (gocara˚); Nett 23 (iddhi˚); Miln 186 215, 316; Vism 216 (visayī -- bhūta), 570=VbhA 182 (mahā˚ & appa˚); KhA 17; SnA 22, 154 (buddha˚) 228 (id.); PvA 72, 89. -- avisaya not forming an object a wrong object, indefinable A v.50; J v.117 (so read for ˚ara); PvA 122, 197.

3. object of sense, sensual pleasure SnA 100.

경(境)[visaya]은 보통 육근(六根)과 대응하여 육경(六境)으로 나타나는데, 1차 결집된 공부의 기준에는 이런 용례가 직접 나타나지 않습니다. 다만, 경(境) 가운데 다섯 가지 즉 물질인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은 소유적 사유의 대상[kāmaguṇā]인데, <바라문 경(A9:38)>에 의하면, 불교(佛敎)에서는 이것이 세상[loka]입니다. 

“pañcime, brāhmaṇā, kāmaguṇā ariyassa vinaye lokoti vuccati. katame pañca? cakkhuviññeyyā rūpā iṭṭhā kantā manāpā piyarūpā kāmūpasaṃhitā rajanīyā; sotaviññeyyā saddā ... pe ... ghānaviññeyyā gandhā... jivhāviññeyyā rasā... kāyaviññeyyā phoṭṭhabbā iṭṭhā kantā manāpā piyarūpā kāmūpasaṃhitā rajanīyā; ime kho, brāhmaṇā, pañca kāmaguṇā ariyassa vinaye lokoti vuccati.

바라문들이여, 다섯 가지 소유적 사유의 대상을 성스러운 율에서는 세상이라고 부른다. 무엇이 다섯인가? 눈[안(眼)]으로 인식되는, 원하는 것이고 사랑스럽고 마음에 들고 아름답고 소유적 사유를 동반하며 유혹적인, 형상[색(色)]이 있다. 귀[이(耳)]로 인식되는, … 소리[성(聲)]이 있다. 코[비(鼻)]로 인식되는, … 냄새[향(香)]이 있다. 혀[설(舌)]로 인식되는, … 맛[미(味)]가 있다. 몸[신(身)]으로 인식되는, … 느낌[촉(觸)]이 있다. 바라문들이여, 이 다섯 가지 소유적 사유의 대상을 성스러운 율에서는 세상[loka]이라고 부른다. <바라문 경(A9:38)>

또한, <꿰뚫음 경(A6:63)>은 이런 세상은 인간의 사유와 무관하게 저대로의 상태로 존재하고 있을 뿐이라고 합니다.

Api ca kho, bhikkhave, nete kāmā kāmaguṇā nāmete ariyassa vinaye vuccanti —  

          Saṅkapparāgo purisassa kāmo,
          Nete kāmā yāni citrāni loke;
          Saṅkapparāgo purisassa kāmo,
          Tiṭṭhanti citrāni tatheva loke;
          Athettha dhīrā vinayanti chandanti.

비구들이여, 비록 이들이 소유적 사유는 아니지만 성스러운 율에서는 소유적 사유의 대상이라고 부른다. ㅡ

          탐(貪)과 함께한 사유가 인간의 소유적 사유이니
          세상에서 다양한 것들은 소유적 사유가 아니다.
          탐(貪)과 함께한 사유가 인간의 소유적 사유이니
          세상에서 다양한 것들은 있는 그대로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지혜로운 자들은 욕(欲)을 제어한다.“

[참고] 이 게송을 통해 욕(欲)[chanda]-욕(慾)[kāma]-욕탐(欲貪)[chandarāga]-욕탐(慾貪) [kāmarāga] 등 중요한 용어들을 설명하였습니다. 특히, 고멸(苦滅)은 대상의 교체를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욕(欲)[chanda]를 제어하는 수행에 의해 얻어집니다. 욕(欲)[chanda]에 실려 1차 인식에 간섭하는 탐(貪)을 「욕탐(慾貪)→색탐(色貪)→무색탐(無色貪) → 무탐(無貪)」의 순으로 줄여나가는 것이 수행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takka 안에서 멸(滅)[번뇌를 부숨으로써 무명(無明)이 버려지고 명(明)이 일어남]의 과정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한문 불교에서는 욕(欲)과 욕(慾)을 같은 의미로 사용하는 것 같은데, 이럴 경우 chanda와 kāma라는 삶을 설명하는 두 가지 중요한 용어가 구분되지 않아 삶을 바르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교리의 왜곡이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경들의 가르침을 연결하면, 외입처와 다른, 외입처로 선택되기 이전의 것으로의 세상을 의미하는 개념이 경(境)[visaya]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외입처의 다섯 가지 즉 색처(色處)-성처(聲處)-향처(香處)-미처(味處)-촉처(觸處)의 줄임말로서의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은 지금 삶의 과정에서 내가 세상을 감각하고 분별하는 대상으로 선택[작의(作意)]된 상태입니다. 세상[loka]이 안근(眼根)-이근(耳根)-비근(鼻根)-설근(舌根)-신근(身根)에 매개를 통하거나 직접 닿음을 통해 안근(眼根)-이근(耳根)-비근(鼻根)-설근(舌根)-신근(身根)에 생겨나는 현상[느낌](*)인 것입니다.

(*) 저대로의 상태로 존재하고 있는 것들로서의 경(境) 가운데 지금 삶에서 내입처에 의해 능동적이던 수동적이던 선택된 대상 자체가 외입처가 아니라 선택된 대상에 닿아서 생긴 현상 즉 느낌이 외입처라는 이해가 오늘 공부의 핵심입니다.

말하자면, 보이는 것으로의 세상의 일부[색(色)-모습]이 안근(眼根)에 닿고 여기에 작의(作意)하면 색(色)의 느낌[이미지]가 생겨나는데 이것이 안(眼)[안처(眼處)]의 분별의 대상이 되는 색처(色處)이고 줄여서 색(色)이라고 부른다는 것입니다.

들리는 것으로의 세상의 일부[성(聲)-소리]가 이근(耳根)에 닿고 여기에 작의(作意)하면 성(聲)의 느낌이 생겨나는데 이것이 이(耳)[이처(耳處)]의 분별의 대상이 되는 성처(聲處)이고 줄여서 성(聲)이라고 부른다는 것입니다.

냄새 맡아지는 것으로의 세상의 일부[향(香)-냄새]가 비근(鼻根)에 닿고 여기에 작의(作意)하면 향(香)의 느낌이 생겨나는데 이것이 비(鼻)[비처(鼻處)]의 분별의 대상이 되는 향처(香處)이고 줄여서 향(香)이라고 부른다는 것입니다.

맛보아지는 것으로의 세상의 일부[미(味)-맛]가 설근(舌根)에 닿고 여기에 작의(作意)하면 미(味)의 느낌이 생겨나는데 이것이 설(舌)[설처(舌處)]의 분별의 대상이 되는 미처(味處)이고 줄여서 미(味)이라고 부른다는 것입니다.

느껴지는 것으로의 세상의 일부[촉(觸)-느낌]이 신근(身根)에 닿고 여기에 작의(作意)하면 촉(觸)의 느낌이 생겨나는데 이것이 신(身)[신처(身處)]의 분별의 대상이 되는 촉처(觸處)이고 줄여서 촉(觸)이라고 부른다는 것입니다.

물론,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은 모두 느껴지는 것입니다. 다만, 삶의 필요에 의해 색(色)-성(聲)-향(香)-미(味)는 특화하여 그 성질에 맡게 보이는 것-들리는 것-냄새 맡아지는 것-맛보아지는 것이라고 다르게 나타내고, 색(色)-성(聲)-향(香)-미(味)를 제외한 나머지만을 느껴지는 것이라고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때, 느낌이란 말의 의미는 이렇게 정의됩니다.

● 느낌 ㅡ [명사] 몸의 감각이나 마음으로 깨달아 아는 기운이나 감정.

● 느끼다 ㅡ [동사] 

1. 감각 기관을 통하여 어떤 자극을 깨닫다.
2. 마음속으로 어떤 감정 따위를 체험하고 맛보다.
3. 어떤 사실, 책임, 필요성 따위를 체험하여 깨닫다.

유의어 : 감각하다2, 감동하다1, 감격하다 

한편, 외입처는 무명(無明)의 요소인 욕탐(欲貪)의 간섭에 의해 변질됩니다. 이렇게 왜곡된 외입처를 상(相)[nimitta]라고 하는데 색상(色相)-성상(聲相)-향상(香相)-미상(味相)-촉상(觸相)-법상(法相)의 육상(六相)입니다. 이때 왜곡되는 것은 육경(六境)이 아니라 육외입처입니다. 내적인 것인 무명(無明)의 요소가 세상을 변질시키는 것이 아니라 작의(作意)되어 느껴진 것으로의 외입처를 변질시키는 것입니다. 물론 욕탐(欲貪)의 간섭은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식과정에서 세상이 왜곡되기 때문이 아니라 외입처의 왜곡에 뒤따르는 오염된 행위에 의한 것입니다. 그래서 행위의 제어를 위해서 바르게 인식[여리작의(如理作意)]해야 하는 필요성이 제기되는 것입니다.

2. 식(識)

이렇게 설명되는 외입처 즉 감각적 느낌을 분별해 아는 것[vijānāti]이 1차 인식입니다. 그래서 외입처에 대한 앎이 생겨나는데, 식(識)입니다. 느껴진 외입처가 어떤 것인지 분별된 앎을 몸통으로 하는 마음입니다.

3. 촉(觸)

이런 인식과정에는 조건으로의 내입처와 외입처 그리고 결과로의 식이 설명되는데, 이 세 가지는 동시입니다. 즉 지금 작의(作意)된 외입처에 대한 앎으로의 식(識)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내입처-외입처-식(識)이 동시여서 함께 만나는 현상 즉 삼사화합(三事和合)을 촉(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촉(觸)은 외입처의 촉(觸)과는 다른 것입니다. 원어로는 삼사화합(三事和合) 촉(觸)은 phassa이고, 외입처의 촉(觸)은 phoṭṭhabba입니다.

4. 수(受)

삼사화합(三事和合) 촉(觸)은 내입처에게 인식과정에서 생겨나는 락(樂)-고(苦)-불고불락(不苦不樂)의 느낌을 경험하게 하는데, 수(受)입니다.

즉 1차 인식은 내입처가 욕탐의 간섭 가운데 외입처 즉 1차적 느낌[감각적 느낌]을 분별해서 외입처의 앎인 식(識)을 생겨나게 하고, 다시 삼사화합(三事和合)하여 외입처와 관련해 생겨나는 락(樂)-고(苦)-불고불락(不苦不樂)의 2차적 느낌[감정적 느낌]을 경험하는 과정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2차 인식은 지금 경험하고 있는 2차적 느낌을 분별하는 작용입니다.

그래서 인식작용[vijānāti]는 감각적 느낌에 이어 감정적 느낌을 인식하는 과정입니다. 즉 두 단계로 진행되는 인식의 대상은 각각의 느낌인 것입니다.
 

[참고] 유식무경(唯識無境) 

오직 인식 작용만 있고, 인식 작용이 분별하여 지어낸 대상은 없다는 뜻. 오직 인식 작용만 있고, 인식 작용이 분별하여 상정한 대상은 허구라는 뜻. 분별로써 지어낸 대상은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인식의 작용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

→ [동의어] 유식무진(唯識無塵) 

유식무경(唯識無境)에서 무경(無境)의 의미가 ①감각된 것은 경(境)이 아니라 외입처라는 의미인지 아니면 ②식(識)이 만들어낸 허구의 것이어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만약 ②의 경우라면 삶[나와 세상의 관계]에 대한 타당한 해석이 아니라고 해야 합니다. 부처님은 구체적이고 실제(實際)적인 나[오취온(五取蘊)-유신(有身)]이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세상[경(境)-소유적 사유의 대상]과 관계하며 살아가는 중생의 삶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나는 삶의 과정을 누적해가면서 매 순간 변화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무아(無我)인 것이고, 세상은 삼법인(三法印[제행무상(諸行無常)-제행개고(諸行皆苦)-제법무아(諸法無我)]의 원리-이치에 따라 전개될 뿐입니다.

ㅡ 「부처님은 이 세상을 허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무아(無我)적인 존재로서 나도 구체적으로 실제하고, 내가 살아가는 토대로서의 세상도 느껴지는 것으로 제법무아(諸法無我)인 것이지만 구체적으로 실제 하는 것입니다. 나도 세상도 허구적이지 않습니다. 무아(無我)라는 특성 위에서 나도 세상도 구체적으로 실제 합니다. 그런 실제성 위에서 사실[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을 모르면 사실에 괴리된 삶을 통해 고(苦)를 만들고, 가르침을 배워 알고 실천하면 사실에 부합한 삶을 통해 락(樂)을 만듭니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