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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회(輪迴)

윤회의 진실 - 윤회에서 벗어난 상태를 설명하는 방법들(부산 윤회 161011)

0 776 2017.08.30 21:28
▣ 윤회의 진실 - 윤회에서 벗어난 상태를 설명하는 방법들(부산 윤회 161011)
   [동영상] https://youtu.be/GN4lGPN0V6s 

윤회에서 벗어난 상태는 어떻게 묘사되는 것인지 경전에 입각해서 알아보았습니다. 무(無)[단멸(斷滅)]의 상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소멸하고 사라진다고 설명됩니다. 그래서 소멸과 사라짐의 의미를 알아보았습니다. 번뇌를 부수어 무명이 버려지고 명이 일어남[소멸]으로써 오온을 대상으로 더 이상 괴로움이 생겨나지 않게 되었다[사라짐]는 의미입니다.


부처님은 윤회에서 벗어난 즉 아라한의 사후를 존재양태로 설명하지 않고 고(苦)와 고멸(苦滅)로 설명하는데, 고(苦)는 불타오름의 상태로, 고멸(苦滅)은 불꺼짐의 상태로 비유합니다. 그런데 불타오름은 식(識)의 머묾의 영역입니다. 그래서 불꺼짐의 상태에서는 식(識)은 알려지지 않습니다. 어디로 간 것이 아니고 연료가 없어 꺼져버린 것이어서 식(識)은 찾아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꺼져버린 식에게는 이 세상도 저 세상도 그 중간도 없습니다. 이때, 그 중간도 없다는 것은 저 세상이 아닌 제3의 자리가 있어서 꺼져버린 식(識)이 찾아가 머무는 잘못 설정된 자리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단순히 꺼져버린 그 상태는 완전한 고멸(苦滅)이지만 중생에게 그 존재양태는 알려지지 않습니다. 중간이 없다는 것은 이런 의미로 해석되어야 합니다. 잘못 이해하여 중유(中有)의 근거로 삼아서는 안됩니다.

 

[1] 번뇌 다한 비구는 몸이 무너져 죽은 후에 어떻게 됩니까? ㅡ yamakasuttaṃ(SN 22.85)[야마까 경]

; 끊어지고 파괴되는 것[단멸(斷滅)]이 아니고 소멸되고 사라짐.

[2] 어떻게 소멸되고 사라지는 것일까? ㅡ anurādhasuttaṃ (SN 22.86)[아누라다 경]

• 존재의 양상으로 설명하지 않고 고(苦)와 고멸(苦滅)의 측면에서 설명함.

  - 무명과 갈애의 영향에서 벗어나야 알려지는 제5의 존재양태는 중생들에게는 헤아려지지 않음.

• 소멸(消滅) - 번뇌를 부수어 무명(無明)이 버려지고 명(明)이 일어남.

• 일어남[samudaya]과 사라짐[atthaṅgama] -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을 대상으로 한 고집(苦集)과 고멸(苦滅). <삼매 경(S22:5)>

[3] 고(苦)와 고멸(苦滅)을 불이 타고 있는 상태와 불이 꺼진 상태로 설명함 ㅡ ādittasutta[불타오름 경(S35:28)]

[4] ‘연료를 조건으로 타오르는 불’의 비유 그리고 도기공의 가마의의 비유

1. 「tiṇakaṭṭhupādānaṃ paṭicca[마른 풀과 나뭇가지라는 연료를 조건으로]」


2. 「telañca paṭicca vaṭṭiñca paṭicca telappadīpo[기름을 조건으로 심지를 조건으로 기름등불이]」의 용례


3. 「puriso kumbhakārapākā uṇhaṃ kumbhaṃ uddharitvā same bhūmibhāge paṭisisseyya. tatra yāyaṃ usmā sā tattheva vūpasameyya, kapallāni avasisseyyuṃ[어떤 사람이 도기공의 가마로부터 뜨거운 도기를 끄집어내서 평평한 땅 위에 내려놓으면 거기서 뜨거운 열기는 식을 것이고 도기들만 남게 될 것이다]」 ㅡ parivīmaṃsanasuttaṃ (SN 12.51)[완전한 검증 경]

 

; 무명(無明) → 유위(有爲)적 행위[오온(五蘊)의 행(行)]

→ 식(識)의 머묾[십지연기(十支緣起) : 식(識)~노사(老死)]

[5] 식(識)의 머묾[viññāṇaṃ patiṭṭhita]을 설하는 경전들

• 유위(有爲)적 행위[행(行)]에 의한 식(識)의 머묾

  → 유(有)[욕유(慾有)-색유(色有)-무색유(無色有)]가 있게 됨.

• 해탈한 비구의 식(識)을 찾아 나선 마라

• 해탈한 비구의 식(識)은 유위(有爲)의 영역에서 헤아려지지 않음

[6] 죽고 태어남이 없을 때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고 이 둘의 중간도 없음  
     [cutūpapāte asati nevidha na huraṃ na ubhayamantarena]

; 이 세상과 저 세상의 중간이란 표현은 주목해야 합니다.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등에서 중유(中有)[중음신(中陰身)]의 근거로 삼는 경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중유(中有) 있음은 죽고 태어남의 중간 과정이 있다는 의미인데, 죽고 바로 태어남의 교리와 정면으로 배치됩니다. 그래서 이 경설이 죽고 태어남의 중간 과정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 설명되어야 합니다.


주목해야 할 점은 이 문구가 죽고 태어남이 있는 중생의 영역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 다만, 죽고 태어남이 없는 경지 즉 해탈된 경우의 설명에서만 나타나는 것이어서 중생들의 삶에 대한 해석을 위해 적용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것입니다.


(*) [tatiyacetanāsuttaṃ (SN 12.40)] 「cutūpapāte sati āyatiṃ jātijarāmaraṇaṃ sokaparidevadukkhadomanassupāyāsā sambhavanti. 죽고 태어남이 있을 때 미래에 생(生)-노사(老死)-수비고우뇌(愁悲苦憂惱)가 생긴다.」 → 미래의 태어남의 자리를 저 세상이라고 부름.


해탈하면 다시 태어나지 않습니다. 즉 해탈하여 윤회에서 벗어난 아라한에게 저 세상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라한의 사후(死後)는 어떻게 됩니까? 그 마음[식(識)]은 중생들이 죽고 다시 태어나는 저 세상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가게 됩니까? 열반(涅槃)이라 불리는 제3의 자리가 있어서 그곳으로 가는 것입니까? 즉 이 세상도 저 세상도 아닌 아라한의 식(識)이 찾아가서 모이는 중간의 어떤 자리가 있는 것입니까?


그러나 열반은 어디어디에 가면 실재하는 어떤 세상이 아닙니다. 소유의 삶[욕계(慾界)]에도 존재의 삶[색계(色界)-무색계(無色界)]에도 속하지 않는, 중생의 삶의 영역을 의미하는 세상의 개념에서 벗어난 해탈된 영역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도 아니고 저 세상도 아닌 그 사이에 존재하는 제3의 세상이 아닙니다. 오직 팔정도(八正道)에 의해 각자에게서 실현되는 이 세상에도 속하지 않고 저 세상에도 속하지 않는 해탈된 상태를 의미하는 하나의 법(法)인 것입니다[무아(無我)]. 


비유하자면, 극락(極樂)세계는 저 세상입니까? 아니면 저 세상과는 다른 그러나 죽은 뒤에 가는, 이 세상도 저 세상도 아닌 제3의 세상입니까? 


만일 저 세상이라면 욕계(慾界)-색계(色界)-무색계(無色界)의 삼계(三界)[중생 세상]에 속할 것입니다. 중생의 세상은 삼계(三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일 저 세상이 아닌 제3의 세상이라면 이러한 세상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도 아니고 저 세상도 아닌 중간에 있는 어떤 세상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경은 바로 그런 제3의 세상은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직 중생의 영역에 속해서 죽은 뒤 다시 태어나야 한다면 그 세상은 삼계(三界)에 속하는 저 세상이고, 중생의 영역을 벗어나 해탈했다면 다시 태어나지 않는 것이지 중간의 제3의 세상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일 제3의 세상을 설정하여 죽은 뒤 저 세상에 가지 않고 그곳으로 간다고 말하면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거짓입니다. 부처님은 이 경들을 통해 이 점을 분명하게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경을 근거로 중유(中有)의 존재를 설정하는 것은 부처님의 의도와 다릅니다. 가르침을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따라서 중유(中有)는 그 존립 근거를 가지지 못합니다. 즉 중유(中有)는 없습니다. 

[7] 갈애가 연료 ㅡ 토론장 경(S44:9)

; 육계(六界)의 붙잡음으로 모태에 들 때 붙잡음의 동력이 갈애입니다. 법은 시간을 넘어선 것입니다. 시간을 넘어섬에 대한 이해 위에서 이해해야 하는 가르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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