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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회(輪迴)

해피스님의 십이연기 특강 번외 - 누가 윤회하는가[윤회의 진실](근본경전연구회 190619)

0 1,037 2019.06.21 08:53

해피스님의 십이연기 특강 번외 - 누가 윤회하는가[윤회의 진실](근본경전연구회 190619)

[동영상] https://youtu.be/BXgU3L0JmPo

 

(MN 38-갈애 부서짐의 큰 경)에 나오는 부처님과 사띠 비구의 대화입니다.

 

ekamantaṃ nisinnaṃ kho sātiṃ bhikkhuṃ kevaṭṭaputtaṃ bhagavā etadavoca “saccaṃ kira, te, sāti, evarūpaṃ pāpakaṃ diṭṭhigataṃ uppannaṃ ‘tathāhaṃ bhagavatā dhammaṃ desitaṃ ājānāmi yathā tadevidaṃ viññāṇaṃ sandhāvati saṃsarati, anaññan’”ti? “evaṃ byā kho ahaṃ, bhante, bhagavatā dhammaṃ desitaṃ ājānāmi yathā tadevidaṃ viññāṇaṃ sandhāvati saṃsarati, anaññan”ti. “katamaṃ taṃ, sāti, viññāṇan”ti? “yvāyaṃ, bhante, vado vedeyyo tatra tatra kalyāṇapāpakānaṃ kammānaṃ vipākaṃ paṭisaṃvedetī”ti. “kassa nu kho nāma tvaṃ, moghapurisa, mayā evaṃ dhammaṃ desitaṃ ājānāsi? nanu mayā, moghapurisa, anekapariyāyena paṭiccasamuppannaṃ viññāṇaṃvuttaṃ, aññatra paccayā natthi viññāṇassa sambhavoti? atha ca pana tvaṃ, moghapurisa, attanā duggahitena amhe ceva abbhācikkhasi, attānañca khaṇasi, bahuñca apuññaṃ pasavasi. tañhi te, moghapurisa, bhavissati dīgharattaṃ ahitāya dukkhāyā”ti.

 

한 곁에 앉은 어부의 아들 사띠 비구에게 세존은 이렇게 말했다. 사띠여, 그대에게 그것, 오직 이 식()이 옮겨가고 윤회한다. 다른 것이 아니다.’라고 나는 세존으로부터 설해진 가르침을 안다.라는 이런 악하고 치우친 견해가 생긴 것이 사실인가?”

 

대덕이시여, ‘그것, 오직 이 식()이 옮겨가고 윤회한다. 다른 것이 아니다.’라고 세존으로부터 설해진 가르침을 이렇게 저는 확실히 압니다.”

 

사띠여, 그 식()은 어떤 것인가?”

 

대덕이시여, 말하고 경험되어야 하는 이것이 여기저기서 선하고 악한 업()들의 보()를 경험합니다.”

 

어리석은 자여, 참으로 그대는 누구에게서 나에 의해 설해진 이런 가르침을 알았는가? 어리석은 자여, 나에 의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연기(緣起)된 식()이 말해지지 않았는가, ‘조건으로부터 다른 곳에 식()의 생김은 없다[연기(緣起) 즉 조건에 의해 생겨나는 방식과는 다른 방식에 의해서는 식()이 생기지 않는다.].’라고? 그러나 어리석은 자여, 그대는 스스로의 잘못된 이해로 우리를 비방하고 자신을 파괴하고 많은 악덕(惡德)을 쌓는다. 어리석은 자여, 그것 때문에 그대에게 오랜 세월 불이익과 괴로움이 있을 것이다.

 

이 문답에서 삶은 옮겨가고 윤회한다.’라고 표현되는데, 부처님은 이 표현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이 식()’이라는 주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뒤 자아(自我)인 식()’이라고 대답하는 사띠 비구를 꾸짖습니다. 그리고 그 식()이 자아(自我)가 아니라 연기(緣起)된 식()’이라고 확고한 설명을 하는 것이 이 대화의 주제입니다.

 

그렇다면 이 대화는 옮겨가고 윤회한다.’는 현실의 문제 위에서 옮겨가는 자로서의 식()이 자아(自我)인 것이 아니라 연기(緣起)된 것이라 알려주는 가르침입니다. ‘누가 옮겨가고 윤회하는지?’의 문제에 대한 답변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이 직접 옮겨가고 윤회하는 자에 대해 설명하는 경들이 있는데, (SN 15.1-풀과 나무토막 경)(http://sutta.kr/bbs/board.php?bo_table=nikaya06_02_04&wr_id=3) 15번 상윳따(시작을 알 수 없음)의 경들입니다. 경들에서 부처님은 pubbā koṭi na paññāyati avijjānīvaraṇānaṃ sattānaṃtaṇhāsaṃyojanānaṃ sandhāvataṃ saṃsarataṃ무명에 덮이고 갈애에 묶여서 옮겨가고 윤회하는 중생들에게 처음 시작점은 알려지지 않는다.라고 하는데, ‘옮겨가고 윤회하는 자는 중생이고, 그 중생은 무명에 덮이고 갈애에 묶인 상태라는 설명입니다.

 

이때, 중생은 누구입니까? ‘입니다. 유신(有身)이고 오취온(五取蘊)이고 서로 조건 되는 것인 식()과 명색(名色)의 함께함입니다. 서로 조건 되는 식()과 명색(名色)이 함께한 것으로의 나이기 때문에 연기(緣起)즉 십이연기(十二緣起)적인 해석에 의해 식()은 연기(緣起)된 식()인 것입니다. 연기(緣起)된 식()이 늘 서로 조건 되는 명색(名色)과 함께 즉 중생이 되어 살아가는 것인데, 어느 때 죽음이라는 사건에 의해 명색(名色)이 버려지면, 그 순간 동시에 새로운 명색(名色)을 만나 새로운 즉 중생이 되어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이 태어남[옮겨감]이고, 이런 옮겨감의 반복을 윤회(輪廻)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나 즉 중생의 상태로 옮겨가고 윤회합니다. 그래서 윤회하는 그 자는 중생입니다. 다만, 윤회의 과정에서 버려지는 것으로의 명색(名色)과 연기(緣起) 즉 삶의 과정을 누적하며 변화하는 가운데 윤회의 축[동질성]으로 유지되는 식()의 관계를 고려하면, 연기(緣起)된 식()이 중생의 동질성을 가지고 윤회한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설명하는 윤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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