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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법인(三法印)

무아에 대한 소고 - 3.특성(병-지배력)-주인공-범주(비아-무아)-연기 오해-불성(해피스님 181114)

0 1,091 2018.11.17 11:35

▣ 무아에 대한 소고 - 3.특성(병-지배력)-주인공-범주(비아-무아)-연기 오해-불성(해피스님 181114)

   [동영상] https://youtu.be/MSsDFxO33FY


1. (SN 22.59-무아상(無我相) 경)(http://sutta.kr/bbs/board.php?bo_table=nikaya06_03_01&wr_id=9&sca=upaya)과 (MN 35-삿짜까 작은 경)은 아(我)와 무아(無我)를 비교 설명하는데, 병(病)과 지배력의 두 가지 측면입니다.

아와 무아의 특성 비교.png

2. 그런데 지배력의 측면에서 바라문교와 불교는 방향을 달리 합니다. 아(我)를 전제하는 브라만교는 아(我)에 의한 내 삶의 지배력을 설명하지만, 무아(無我)를 선언하는 불교는 나에 의한 아(我)의 지배력을 말합니다. 물론, 아(我)가 없기 때문에 나는 아(我)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브라만교적 삶은 아(我)가 주인공이고, 불교적 삶은 내가 주인공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목해야 합니다! 불교신자에게 내 삶의 주인공은 바로 나입니다.


3. 무아(無我)의 범주 ㅡ 오온(五蘊) & 일체(一切)[십이처(十二處) 또는 내입처(內入處)-외입처(外入處)-식(識)-촉(觸)-수(受)]


(SN 22.59-무아상(無我相) 경)은 오온(五蘊) 각각에 대해 「무아(無我)의 선언 → 제자들의 동의 → 기준의 제시」의 단계로 무아(無我)를 선언합니다. 반면에 ‘cakkhu niccaṃ vā aniccaṃ vā[안(眼)은 상(常)한가, 무상(無常)한가?]’라고 묻는 여러 경들은 내입처(內入處)-외입처(外入處)-식(識)-촉(觸)-수(受)에 대해 「제자들의 동의 → 기준의 제시」의 단계로 무아(無我)를 선언합니다. 이때, 내입처(內入處)~수(受)는 일체(一切)입니다. 일체(一切)는 비활성의 일체(一切)와 활성화된 일체(一切)의 두 가지로 이해해야 하는데, 비활성의 일체(一切)는 십이처(十二處)이고, 활성화된 일체(一切)는 내입처(內入處)~수(受)의 과정입니다. ☞ 십이연기(十二緣起) 교재 202쪽 참조(http://nikaya.kr/bbs/board.php?bo_table=happy07_07&wr_id=61)

 

그런데 이번 불교학연구회 추계학술대회의 다섯 번째 논문은 무아(無我)가 유위(有爲)의 특색을 갖춘, 경험하는 자아로서의 오온(五蘊)에 대해서만 상정되었고, 무위(無爲)는 논외로 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유위(有爲)와 무위(無爲)는 별개의 존재가 아닙니다.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질적-가치적 구분이어서 유위(有爲)인 오온(五蘊)을 설명한 것은 존재하는 것 모두를 설명한 것입니다. 다만, 질적 차이를 보여주는 무위(無爲)는 ‘아(我)일까, 무아(無我)일까?’의 측면에서 접근해야 하는 주제인데, 삼법인(三法印)은 제행무상(諸行無常)-제행개고(諸行皆苦)-제법무아(諸法無我)를 선언함으로써 유위(有爲)인 행(行)들처럼 무위(無爲)인 열반도 무아(無我)라는 것을 분명히 알려주고 있습니다. 

유위와무위.png

이런 점에서 무아(無我)에 관한 논점 가운데 무위(無爲)는 논외로 하고 있고, 그러므로 불교가 유위(有爲)인 오온(五蘊)의 이면에 아(我)를 상정하고 있다는 주장은 거짓이라고 알아야 합니다. 이런 주장은 자칫 ‘불교를 힌두교에 귀속시키기 위한 과도한 억지의 시도’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배제되어야 하는 견해라고 알아야 할 것입니다.


※ 상윳따 니까야의 무위 상윳따(SN 43)에는 모두 44개의 경이 소속되어 있는데, 이 경들은 모두 「katamañca, bhikkhave, asaṅkhataṃ? yo, bhikkhave, rāgakkhayo dosakkhayo mohakkhayo — idaṃ vuccati, bhikkhave, asaṅkhataṃ. 비구들이여, 무엇이 무위(無爲)인가? 비구들이여, 탐(貪)이 부서지고, 진(嗔)이 부서지고, 치(癡)가 부서진 것 ㅡ 비구들이여, 이것이 무위(無爲)라고 불린다.」라고 무위(無爲)를 정의합니다. 심지어 「yaṃ, bhikkhave, satthārā karaṇīyaṃ sāvakānaṃ hitesinā anukampakena anukampaṃ upādāya, kataṃ vo taṃ mayā. etāni, bhikkhave, rukkhamūlāni, etāni suññāgārāni. jhāyatha, bhikkhave, mā pamādattha; mā pacchā vippaṭisārino ahuvattha. ayaṃ vo amhākaṃ anusāsanī”ti. 비구들이여, 제자들의 이익 때문에 스승이 해야 하는 것을 연민한 뒤에 나는 그대들에게 행하였다. 비구들이여, 여기 나무 밑이 있다. 여기 빈집들이 있다. 선(禪)을 하라. 비구들이여, 방일하지 마라. 나중에 뉘우치지 마라. 이것이 참으로 우리의 교본(敎本)이다.」라는 드문 표현을 사용해서 무위(無爲)를 가르칩니다. 바로 이런 오해를 방지하고, 힌두교와의 차별 위에서 진리를 오롯이 드러낸 가르침을 지켜야 한다는 지시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편, 이런 주장은 anattan을 비아(非我)로 해석할 것인지, 무아(無我)로 해석할 것인지의 측면에서 논의됩니다. 그러나 의외로 이 논의는 의미가 없습니다. 존재하는 것 모두 즉 일체(一切)가 비아(非我)이면 무아(無我)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오온(五蘊)에 대해서든 활성화된 일체(一切)에 대해서든 모든 것들을 anattan이라고 가르치는데, 모든 것이 아(我)가 아니기[비아(非我)] 때문에 무아(無我)라고 해도 좋고, 모든 것의 안에 아(我)가 없기[무아(無我)] 때문에 무아(無我)라고 해도 좋은 것입니다. 오직 결론은 존재하는 모든 것은 무아(無我)이고, 그 뒤에서 삶을 지배하는 것[아(我)]는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일 것입니다.


4. 한편, 혜민 스님은 모니터와 그 안에서의 삶과 관련한 ‘그것이 연기(緣起)입니까?’라는 질문에 ‘이 적은 물속에 모든 것이 들어있다.’라는 설명으로 연기(緣起)를 말했습니다. 


그러나 연기(緣起)는 어떤 것들이 생겨나는 과정의 조건관계를 설명하는 것이지 생겨난 것의 존재 상태를 설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 없이는 안 돼!’라는 것과 ‘그것이 담겨 있어!’는 다른 것입니다. 연기(緣起)는 ‘그것이 조건으로 작용해서 이것이 생겨났어!’를 의미하는 것이고, 삶의 과정에서 어떤 조건들에 의해서 괴로움이 생겨나는지를 설명하는 가르침인 것입니다. 


또한, ‘그것이 자아입니까?’라는 질문에서 ‘자아는 관찰 되는 것이고, 그 뒤에서 자아를 관찰하는 것으로의 불성(佛性)!’을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이 말하지 않은 불성(佛性)의 존재를 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하물며 부처될 가능성 정도의 의미를 넘어서서 삶의 주재자로의 자격을 부여한 불성(佛性)의 언급은 많이 낯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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