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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식(四食)

2. moḷiyaphaggunasuttaṃ(SN 12.12)[몰리야팍구나 경]

0 608 2017.08.18 23:03
2. moḷiyaphaggunasuttaṃ(SN 12.12)[몰리야팍구나 경]

“cattārome, bhikkhave, āhārā bhūtānaṃ vā sattānaṃ ṭhitiyā sambhavesīnaṃ vā anuggahāya. katame cattāro? kabaḷīkāro āhāro — oḷāriko vā sukhumo vā, phasso dutiyo, manosañcetanā tatiyā, viññāṇaṃ catutthaṃ. ime kho, bhikkhave, cattāro āhārā bhūtānaṃ vā sattānaṃ ṭhitiyā sambhavesīnaṃ vā anuggahāyā”ti.

비구들이여, 누적된 것인 중생을 유지하고 존재를 추구하는 자를 도와주는 네 가지 자량(資糧)[사식(四食)]이 있다. 무엇이 넷인가? 거칠거나 미세한 덩어리진 자량(資糧)[단식(段食)], 촉(觸)이 두 번째이고[촉식(觸食)], 의사(意思)가 세 번째이고[의사식(意思食)], 식(識)이 네 번째이다[식식(識食)].

evaṃ vutte, āyasmā moḷiyaphagguno bhagavantaṃ etadavoca — “ko nu kho, bhante, viññāṇāhāraṃ āhāretī”ti? “no kallo pañho”ti bhagavā avoca — “‘āhāretī’ti ahaṃ na vadāmi. ‘āhāretī’ti cāhaṃ vadeyyaṃ, tatrassa kallo pañho — ‘ko nu kho, bhante, āhāretī’ti? evaṃ cāhaṃ na vadāmi. evaṃ maṃ avadantaṃ yo evaṃ puccheyya — ‘kissa nu kho, bhante, viññāṇāhāro’ti, esa kallo pañho. tatra kallaṃ veyyākaraṇaṃ — ‘viññāṇāhāro āyatiṃ punabbhavābhinibbattiyā paccayo, tasmiṃ bhūte sati saḷāyatanaṃ, saḷāyatanapaccayā phasso’”ti.

이렇게 말씀하시자 몰리야팍구나 존자가 세존께 이렇게 여쭈었다. ㅡ "대덕이시여, 그러면 누가 식식(識食)을 먹습니까?"

"그것은 적절한 질문이 아니다."라고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나는 '먹는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제 내가 '먹는다.'라고 한다면, 거기서 '대덕이시여, 그러면 누가 먹습니까?'라는 질문은 적절하다. 그런데 나는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내가 이렇게 말하지 않기 때문에 '대덕이시여, 그러면 무엇이 식식(識食)입니까?'라는 묻는 것이 적절한 질문이다. 거기서 ‘식식(識食)은 미래에 다시 존재[bhava - 유(有)]가 되어 태어남의 조건이다. 그 존재[bhūta – 누적된 것 – 식(識)+명색(名色)]이 있을 때 육입(六入)이 있고, 육입(六入)을 조건으로 촉(觸)이 있다.’라는 설명이 타당하다.

“ko nu kho, bhante, phusatī”ti? “no kallo pañho”ti bhagavā avoca — “‘phusatī’ti ahaṃ na vadāmi. ‘phusatī’ti cāhaṃ vadeyyaṃ, tatrassa kallo pañho — ‘ko nu kho, bhante, phusatī’ti? evaṃ cāhaṃ na vadāmi. evaṃ maṃ avadantaṃ yo evaṃ puccheyya — ‘kiṃpaccayā nu kho, bhante, phasso’ti, esa kallo pañho. tatra kallaṃ veyyākaraṇaṃ — ‘saḷāyatanapaccayā phasso, phassapaccayā vedanā’”ti.

"대덕이시여, 그러면 누가 촉(觸)합니까?“

"그것은 적절한 질문이 아니다."라고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나는 '촉(觸)한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제 내가 '촉(觸)한다.'라고 한다면, 거기서 '대덕이시여, 그러면 누가 촉(觸)합니까?'라는 질문은 적절하다. 그런데 나는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내가 이렇게 말하지 않기 때문에 '대덕이시여, 그러면 무엇을 조건으로 촉(觸)이 있습니까?'라고 묻는 것이 적절한 질문이다. 거기서 ‘육입(六入)을 조건으로 촉(觸)이, 촉(觸)을 조건으로 수(受)가 있다.’라는 설명이 타당하다.

“ko nu kho, bhante, vedayatī”ti? “no kallo pañho”ti bhagavā avoca — “‘vedayatī’ti ahaṃ na vadāmi. ‘vedayatī’ti cāhaṃ vadeyyaṃ, tatrassa kallo pañho — ‘ko nu kho, bhante, vedayatī’ti? evaṃ cāhaṃ na vadāmi. evaṃ maṃ avadantaṃ yo evaṃ puccheyya — ‘kiṃpaccayā nu kho, bhante, vedanā’ti, esa kallo pañho. tatra kallaṃ veyyākaraṇaṃ — ‘phassapaccayā vedanā, vedanāpaccayā taṇhā’”ti.

"대덕이시여, 그러면 누가 느낍니까?”

"그것은 적절한 질문이 아니다."라고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나는 '느낀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제 내가 '느낀다.'라고 한다면, 거기서 '대덕이시여, 그러면 누가 느낍니까?'라는 질문은 적절하다. 그런데 나는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내가 이렇게 말하지 않기 때문에 '대덕이시여, 그러면 무엇을 조건으로 수(受)가 있습니까?'라고 묻는 것이 적절한 질문이다. 거기서 ‘촉(觸)을 조건으로 수(受)가, 수(受)를 조건으로 애(愛)가 있다.’라는 설명이 타당하다.

“ko nu kho, bhante, tasatī”ti? “no kallo pañho”ti bhagavā avoca — “‘tasatī’ti ahaṃ na vadāmi. ‘tasatī’ti cāhaṃ vadeyyaṃ, tatrassa kallo pañho — ‘ko nu kho, bhante, tasatī’ti? evaṃ cāhaṃ na vadāmi. evaṃ maṃ avadantaṃ yo evaṃ puccheyya — ‘kiṃpaccayā nu kho, bhante, taṇhā’ti, esa kallo pañho. tatra kallaṃ veyyākaraṇaṃ — ‘vedanāpaccayā taṇhā, taṇhāpaccayā upādānan’”ti.

"대덕이시여, 그러면 누가 갈망(渴望)합니까?”

"그것은 적절한 질문이 아니다."라고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나는 '갈망한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제 내가 '갈망한다.'라고 한다면, 거기서 '대덕이시여, 그러면 누가 갈망합니까?'라는 질문은 적절하다. 그런데 나는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내가 이렇게 말하지 않기 때문에 '대덕이시여, 그러면 무엇을 조건으로 애(愛)가 있습니까?'라고 묻는 것이 적절한 질문이다. 거기서 ‘수(受)를 조건으로 애(愛)가, 애(愛)를 조건으로 취(取)가 있다.’라는 설명이 타당하다.

“ko nu kho, bhante, upādiyatī”ti? “no kallo pañho”ti bhagavā avoca — “‘upādiyatī’ti ahaṃ na vadāmi. ‘upādiyatī’ti cāhaṃ vadeyyaṃ, tatrassa kallo pañho — ‘ko nu kho, bhante, upādiyatī’ti? evaṃ cāhaṃ na vadāmi. evaṃ maṃ avadantaṃ yo evaṃ puccheyya — ‘kiṃpaccayā nu kho, bhante, upādānan’ti, esa kallo pañho. tatra kallaṃ veyyākaraṇaṃ — ‘taṇhāpaccayā upādānaṃ; upādānapaccayā bhavo’ti ... pe ... evametassa kevalassa dukkhakkhandhassa samudayo hoti.

"대덕이시여, 그러면 누가 집착합니까?”

"그것은 적절한 질문이 아니다."라고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나는 '집착한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제 내가 '집착한다.'라고 한다면, 거기서 '대덕이시여, 그러면 누가 집착합니까?'라는 질문은 적절하다. 그런데 나는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내가 이렇게 말하지 않기 때문에 '대덕이시여, 그러면 무엇을 조건으로 취(取)가 있습니까?'라고 묻는 것이 적절한 질문이다. 거기서 ‘애(愛)를 조건으로 취(取)가, 취(取)를 조건으로 유(有)가 있다.’라는 설명이 타당하다. … 이와 같이 전체 괴로움 덩어리[고온(苦蘊)]의 일어남이 있다. 

“channaṃ tveva, phagguna, phassāyatanānaṃ asesavirāganirodhā phassanirodho; phassanirodhā vedanānirodho; vedanānirodhā taṇhānirodho; taṇhānirodhā upādānanirodho; upādānanirodhā bhavanirodho; bhavanirodhā jātinirodho; jātinirodhā jarāmaraṇaṃ sokaparidevadukkhadomanassupāyāsā nirujjhanti. evametassa kevalassa dukkhakkhandhassa nirodho hotī”ti.

팍구나여, 그러나 오직 육촉처(六觸處)의 완전히 빛바래어 소멸함에서 촉(觸)의 멸(滅)이, 촉(觸)의 멸(滅)에서 수(受)의 멸(滅)이, 수(受)의 멸(滅)에서 애(愛)의 멸(滅)이, 애(愛)의 멸(滅)에서 취(取)의 멸(滅)이, 취(取)의 멸(滅)에서 유(有)의 멸(滅)이, 유(有)의 멸(滅)에서 생(生)의 멸(滅)이, 생(生)의 멸(滅)에서 노사(老死) 수비고우뇌(愁悲苦憂惱)가 소멸한다. 이와 같이 전체 괴로움 덩어리[고온(苦蘊)]의 소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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