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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식(四食)

사식4)몰리야팍구나 경ㅡ두 가지 존재 & 육촉처]

0 848 2017.08.18 23:11
▣ 합송경 4-21[사식4)몰리야팍구나 경ㅡ두 가지 존재 & 육촉처](부산 합송경 법회 170613)
   [동영상] https://youtu.be/PRo2Xq9NIVs
 
몰리야팍구나 경(S12:12)는 사식을 주제로 설해진 경전이지만 두 가지 측면에서 중요한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존재를 두 가지 용어[bhava & bhūta]로 지칭하는 것과 삼사화합 촉의 작용이 진행되기 위한 토대로서의 육촉처(六觸處)를 제시하는 것입니다. 특히, 육촉처의 설명에서는 「결국 불교는 번뇌와 욕탐이라는 두 가지 문제 요인의 해소를 위한 것이라고 말 할 수 있게 됩니다.」라고 말하였는데, 행위와 인식의 두 영역에서의 출발점을 제시한 것입니다. 또한, 말미에서는 욕탐의 제어로서 가르침의 근본을 설명하는 데와다하 경(S22:2)( http://cafe.naver.com/happydhamma/404) >도 소개하였습니다

아래의 정리를 교재로 설법하였습니다.

<몰리야팍구나 경(S12:12)>은 식식(識食)을 중심으로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 줍니다. 식식(識食)이 누가 먹는 것이 아니라 식(識)과 명색(名色)의 관계에 의한 이런 이해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1) [거시적] 윤회의 조건 → 무상(無常)-무아(無我)인 식(識)에 의한 윤회
2) [미시적] 지금 이 순간의 삶의 전개 → 존재[누적된 것 – 식(識)+명색(名色)]이 있을 때 육입(六入)이 있고, 육입(六入)을 조건으로 촉(觸)이 있다.
 
이때, 존재(bhūta)는 <bhūtasuttaṃ (SN 12.31)[누적된 것 경]>과 연계하여 설명할 때 [누적된 것 – 식(識)+명색(名色)]입니다.

경은 이어서 촉(觸)도 누가 촉(觸)하는 것이 아니라 조건 관계에 의한 삶의 과정이고, 수(受)도 누가 느끼는 것이 아니라 조건 관계에 의한 삶의 과정이고, 애(愛)도 누가 갈망하는 것이 아니라 조건 관계에 의한 삶의 과정이며, 취(取)도 누가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조건 관계에 의한 삶의 과정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무아(無我)인 것입니다.

참고1] 수(受)는 누가 느끼는 것이 아니라 삶의 과정에서 1차 인식의 과정에 속하는 삼사화합(三事和合)을 조건으로 생겨나고 쌓임으로써 오취온(五取蘊)인 나[유신(有身)-sakkāya]를 구성해 나의 일부가 되는 것입니다. 누가 느끼는 것이 아니라 나의 안에 나를 구성하는 일부로서 느낌이 삼사화합을 조건으로 생겨나 있는 것일 뿐입니다.

사념처(四念處) 수행의 수념처(受念處)는 1차 인식을 통한 두 단계 분별의 두 번째 자리입니다. 신념처(身念處)의 호흡수행이 호흡의 이어 봄을 통해 첫 번째 결과인 식(識)[외입처(外入處)의 앎]을 분명히 분별하는 것이라면 수념처(受念處)는 두 번째 결과인 수(受)를 분명히 분별하는 것입니다.

또한, 수(受)는 2차 인식에서 식(識)에 의해 분별되는 대상입니다. 그리고 병든 상(想) 즉 번뇌의 간섭에 의해 무명(無明)-탐(貪)-진(嗔)의 왜곡 상태로 잘못 분별되어 삶의 문제의 근본을 이룹니다[수(受)의 앎]. 그래서 인식의 결과인 탐(貪)의 제어로서 사마타가 설명되고[심(心)을 닦음→이탐(離貪)-탐(貪)의 제어→심해탈(心解脫)], 인식에서 식(識)에 부대(附帶)하는[nissita] 번뇌의 제어로서 위빳사나가 설명되는 것입니다[혜(慧)의 닦음→번뇌의 부숨-누진(漏盡)→무명(無明)의 제어→혜해탈(慧解脫)].

참고2] 업(業)은 심(心)을 원인으로 하는 몸과 말과 의(意)의 행위입니다. 이때 심(心)의 오염-왜곡 상태를 애(愛)라고 합니다. 이에 따라 몸과 말과 의(意)의 행위도 오염되는데, 취(取)입니다. [애(愛)를 조건으로 취(取)가 있다.]

ㅇ [업의 개념] 심(心) → 몸과 말과 의(意)의 행위[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
ㅇ [오염된 현상] 애(愛) → 오염된 몸과 말과 의(意)의 행위 = 취(取)

이때, 애(愛)는 [심(心)+nandi = 식(識)+탐(貪)+nandi]인데, 이때 식(識) 위에 더해진 [탐(貪)+nandi]만을 애(愛)라고 나타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마찬가지로 몸과 말과 의(意)의 행위에 오염이 더해진 것인 취(取)에서도 오염만을 취(取)라고 부르기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취(取)는 욕(慾)-견(見)-계금(戒禁)-아어(我語)의 네 가지 오염으로 설명되는데, 이 네 가지에 오염된 몸과 말과 의(意)의 행위가 취(取)이기도 하고, 행위를 배제한 이 네 가지만을 취(取)라고 부르기도 하는 것입니다.

경은 「팍구나여, 그러나 오직 육촉처(六觸處)의 완전히 빛바래어 소멸함에서 촉(觸)의 멸(滅)이, 촉(觸)의 멸(滅)에서 수(受)의 멸(滅)이, 수(受)의 멸(滅)에서 애(愛)의 멸(滅)이, 애(愛)의 멸(滅)에서 취(取)의 멸(滅)이, 취(取)의 멸(滅)에서 유(有)의 멸(滅)이, 유(有)의 멸(滅)에서 생(生)의 멸(滅)이, 생(生)의 멸(滅)에서 노사(老死) 수비고우뇌(愁悲苦憂惱)가 소멸한다. 이와 같이 전체 괴로움 덩어리[고온(苦蘊)]의 소멸이 있다.」라고 하는데, 촉(觸)으로부터 시작되는 칠지연기(七支緣起)입니다.

육촉처(六觸處)[channaṃ phassāyatanānaṃ]는 육내입처(六內入處)-육외입처(六外入處)에서와 같이 처(處)[āyatana]의 자격이 부여되어 있습니다. 감각작용을 위한 주관-객관으로의 토대가 되는 내-외입처와 마찬가지로 삼사화합을 위한 토대가 되는 촉처가 있다는 것입니다. 내입처-외입처가 있어서 그것을 토대로 1차 인식이 진행되듯이, 보이지는 않지만 촉처라는 토대가 있어서 그 위에서 삼사화합이 진행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촉처(觸處)[삼사화합의 토대] 위에서 내입처-외입처-식의 삼사가 만나는 것이 삼사화합(三事和合) 촉(觸)인데, 1차 인식에서 욕탐(欲貪)이 함께하는 중생들에게는 무명촉(無明觸)[무명과 함께하는 촉(avijjāsamphassa)]입니다. 그러나 무명이 버려지고 명이 생겨나면[avijjā pahīyati, vijjā uppajjati] 무명촉(無明觸)은 소멸하는데, 이것을 촉멸(觸滅)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때도 촉처(觸處)[삼사화합의 토대]는 남아있어서 삶의 과정인 삼사화합은 지속되는데, 중국에서는 명촉(明觸)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니까야에는 vijjāsamphassa라는 표현은 직접 쓰이지 않지만 이런 상황은 설명이 되고 있습니다. ⇒ <관찰 경(S22:47)> 참조

[육촉처(六觸處)의 완전히 빛바래어 소멸함에서 촉(觸)의 멸(滅)이] - 무명(無明)이 버려지고 명(明)이 생겨남에 따라 욕탐(欲貪)이 제거됨에 의해 촉처가 더 이상 욕탐의 영향 하에 있지 않게 되는 것을 촉처의 멸이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면 욕탐의 영향에서 벗어난 촉처 위에서 진행되는 삼사화합은 무명촉의 소멸이고 이것을 촉멸(觸滅)이라고 합니다.

이때, '완전히 빛바래어 소멸함[asesavirāganirodhā]'은 십이연기에서 무명(無明)과 애(愛)에 적용되는 표현(*)인데, 육촉처(六觸處)에도 적용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2차 인식에서의 번뇌와 무명(無明)-애(愛)의 관계에 대등한 것으로 1차 인식에서의 욕탐(欲貪)과 무명촉(無明觸)의 관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 숫따니빳따 <두 가지 이어 봄의 경>에서는 예외적으로 upadhi[재생의 근거 - 몸과 생명에 대한 갈망]-avijjā[무명(無明)]-saṅkhārā[행(行)]-viññāṇa[식(識)]-phassa[촉(觸)]-vedanā[수(受)]-taṇhā[애(愛)]-upādāna[취(取)]-ārambha[애씀]-āhāra[자량(資糧)]-iñjita[동요(動搖)]에 적용되어 나타납니다.

ㅇ 번뇌 → 2차 인식 → 무명(無明) → 탐(貪) → [심(心)] → nandi → 애(愛)
ㅇ 욕탐(欲貪) → 1차 인식 → 식(識) → 무명촉(無明觸) → 수(受)

그래서 삶을 행위와 인식의 영역으로 구분할 때 행위의 영역에서 번뇌가 차지하는 위상이 인식의 영역에서는 욕탐에 부여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불교는 번뇌와 욕탐이라는 두 가지 문제 요인의 해소를 위한 것이라고 말 할 수 있게 됩니다.

ㅇ 번뇌의 제거 → 무명-탐(貪)의 소멸 → 애멸(愛滅)
ㅇ 욕탐(欲貪)의 제거 → 육촉처(六觸處)의 소멸 → 명촉(明觸) → 수멸(受滅)[고멸(苦滅)]
 
또한, 심(心)의 왜곡이 더 진행된 애(愛)와 수(受)의 조건관계[수(受)를 조건으로 애(愛)가 있음]을 감안하면, '인식을 조건으로 행위가 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만, 수(受)를 조건으로 심(心)이 있지 못하고, 수(受)를 조건으로 애(愛)가 있다는 현실은 2차 인식의 과정에 의한 왜곡[무명(無明)-행(行)]을 전제하여 괴로움의 발생[고집(苦集)]을 설명하는 것으로의 십이연기적인 입장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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