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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온(五蘊)

유신견 & 두 가지 관찰[나의 것-나-나의 자아](해피스님의 경전 해설 190320)

0 929 2019.03.21 21:47

유신견 & 두 가지 관찰[나의 것--나의 자아](해피스님의 경전 해설 190320)

[동영상] https://youtu.be/XoCv1JXwNtg

 

오온(五蘊)에 대한 관찰의 잘-잘못을 설명하는 표현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SN 22.7-집착에 의한 동요 경)(SN 22.8-집착에 의한 동요 경2)는 이 두 가지 관찰을 연이어 제시하는데, 오온(五蘊)에 대한 관찰의 전형을 함께 보여주고 있습니다.

 

(SN 22.7-집착에 의한 동요 경) ㅡ 「배우지 못한 범부는 아()로부터 색()을 관찰한다. ()을 가진 자로서의 아()를 관찰하거나, ()에서 색()을 관찰하거나, ()에서 아()를 관찰한다.(오온(五蘊)에 반복)~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아()로부터 색()을 관찰하지 않는다. ()을 가진 자로서의 아()를 관찰하거나, ()에서 색()을 관찰하거나, ()에서 아()를 관찰하지 않는다.(오온(五蘊)에 반복)」 ☞ http://sutta.kr/bbs/board.php?bo_table=nikaya06_03_01&wr_id=52&sca=nakulapitu

 

(SN 22.8-집착에 의한 동요 경2) ㅡ 「배우지 못한 범부는 색()이것은 나의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아().’라고 관찰한다.(오온(五蘊)에 반복)~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색()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아()가 아니다.’라고 관찰한다.(오온(五蘊)에 반복)」 ☞ http://sutta.kr/bbs/board.php?bo_table=nikaya06_03_01&wr_id=70&sca=nakulapitu

 

이때, (SN 22.7-집착에 의한 동요 경)이 말하는 첫 번째 관찰은, 지난 수업에서 보았듯이, 오온(五蘊) 각각에 대한 4가지 경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온(五蘊) 각각에 대한 아()의 설정이라는 토대 위에서의 3가지 경우입니다. 또한, (SN 22.8-집착에 의한 동요 경2)이 말하는 두 번째 관찰은 오온(五蘊) 각각에 대한 3가지 형태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관찰은 의미를 감안할 때 대등한 관계로 연결되어 중생의 3단계 질적 구분인 욕계(慾界)-색계(色界)-무색계(無色界)에 대응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을 가진 자로서의 아()를 관찰 이것은 나의 것이다. 욕계(慾界)

()에서 색()을 관찰 이것은 나다. 색계(色界)

()에서 아()를 관찰 이것은 나의 아()무색계(無色界)

 

이런 이해 위에서 오온(五蘊)에 대한 관찰의 잘-잘못은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와 배우지 못한 범부를 구분합니다. 배우지 못한 범부는 잘못된 관찰에 의해 괴로움을 만들고,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잘된 관찰에 의해 괴로움을 만들지 않습니다. 관찰의 방법과 관계없이 오온(五蘊)은 무상(無常)-()-무아(無我)의 실상을 가지기 때문에 잘못된 관찰은 사실과 다른 삶이어서 괴로움을 만들고, 잘된 관찰은 사실과 같은 삶이어서 괴로움을 만들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는 하나의 문장으로 압축하면 이렇게 설명됩니다.

 

사실에 괴리(乖離)된 삶은 괴로움을 만들고[()],

사실에 부합(符合)한 삶은 행복을 만듭니다[고멸(苦滅)].

 

한편, 이런 관찰은 그 위치도 주목해야 합니다. 잘못된 관찰은 아(我)가 전제된 관찰이어서 유신견(有身見)입니다. 오온(五蘊) 각각에 대해 3가지 경우/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에 3×5=15 가지의 유신견(有身見)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데, 중생으로의 삶이고, 그 단계적인 경우/형태에 의해 욕계(慾界)-색계(色界)-무색계(無色界) 중생을 특징지어 주고 있습니다. 반면에 잘된 관찰은 여실지견(如實知見)입니다. 그래서 관찰 자체로서 완성이 아니라 욕계(慾界)를 넘어서고, 색계(色界)를 넘어서고, 무색계(無色界)를 넘어서서 해탈된 삶이라는 완성으로 나아가기 위한 토대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SN 22.59-무아상(無我相) 경) 등 많은 경들은 이런 관찰 위에서 「염오(厭惡) → 이탐(離貪) → 해탈(解脫) → 해탈지견(解脫知見)」으로의 깨달음의 과정을 이어서 설명하는 것입니다. 

 

수업에서는 두 번째 관찰 방법에 대한 이런 이해를 위해 (SN 22.59-무아상(無我相)을 되짚어 보았습니다☞ http://sutta.kr/bbs/board.php?bo_table=nikaya06_03_01&wr_id=9&sca=upa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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