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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空) 요약 & ‘공으로부터 관찰 한다’의 용례(해피스님 교리공부 180731)

0 1,016 2018.07.31 14:43

▣ 공(空) 요약 & ‘공으로부터 관찰 한다’의 용례(해피스님 교리공부 180731)

   [동영상] https://youtu.be/ZB4wfYEzjRo


[1] 공(空)의 요약


공(空)은 니까야에서도 부처님 가르침의 중심을 차지하는 중요한 용어입니다. 앞선 공부에 의하면,

http://nikaya.kr/bbs/board.php?bo_table=happy04_16

 

1. 공(空)의 정의 ㅡ cūḷasuññatasuttaṃ (MN 121-공(空)에 대한 작은 경) 


; 「거기에 없는 것은 공(空)하다고 관찰하고, 거기에 남아 있는 것은 ‘있는 이것은 존재한다.’라고 분명히 안다[iti yañhi kho tattha na hoti tena taṃ suññaṃ samanupassati, yaṃ pana tattha avasiṭṭhaṃ hoti taṃ ‘santamidaṃ atthī’”ti pajānāti].」라고 하여 ‘거기에 없는 것’으로의 공(空)의 정의를 분명히 해줍니다. 그리고 이렇게 아는 것을 「진실하고 전도되지 않았고 청정한 공(空)에 들어감[evampissa esā, ānanda, yathābhuccā avipallatthā parisuddhā suññatāvakkanti bhavati]」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이 부처님이 설명하고 가르침에 일관된 공(空)의 의미입니다. 심지어 과거-미래-현재의 모든 사문-바라문들에 의한 청정하고 구경의 위없는 공(空)의 성취는 바로 이것이라고 강조합니다. 


2. 공(空)에 일관된 가르침 ㅡ āṇisuttaṃ (SN 20.7-쐐기 경) & parisavaggo (AN 2.43-52–집단 품) 


 「sāvatthiyaṃ viharati ... pe ... “bhūtapubbaṃ, bhikkhave, dasārahānaṃ ānako nāma mudiṅgo ahosi. tassa dasārahā ānake ghaṭite aññaṃ āṇiṃ odahiṃsu. ahu kho so, bhikkhave, samayo yaṃ ānakassa mudiṅgassa porāṇaṃ pokkharaphalakaṃ antaradhāyi. āṇisaṅghāṭova avasissi. evameva kho, bhikkhave, bhavissanti bhikkhū anāgatamaddhānaṃ, ye te suttantā tathāgatabhāsitā gambhīrā gambhīratthā lokuttarā suññatappaṭisaṃyuttā, tesu bhaññamānesu na sussūsissanti na sotaṃ odahissanti na aññā cittaṃ upaṭṭhāpessanti na ca te dhamme uggahetabbaṃ pariyāpuṇitabbaṃ maññissanti”.  


사왓티에 머물다. “비구들이여, 다사라하들에게 아나까라는 이름의 북이 있었다. 그 북에게 다사라하들은 아나까의 연결부위에 다른 쐐기를 채워 넣었다. 비구들이여, 아나까 북의 이전의 표면은 사라지고 쐐기의 연결만 남아있는 때가 있었다. 비구들이여, 비구들도 미래에 이와 같이 될 것이다. 여래에 의해 말해진, 심오하고, 심오한 의미를 가진, 세상을 넘어선, 공(空)에 일관된 그 가르침들이 설해질 때 듣지 않을 것이고, 귀 기울이지 않을 것이고, 무위(無爲)의 앎을 가진 마음을 이해하지 않을 것이고, 그 법들을 일으켜야 하고 숙련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ye pana te suttantā kavikatā kāveyyā cittakkharā cittabyañjanā bāhirakā sāvakabhāsitā, tesu bhaññamānesu sussūsissanti, sotaṃ odahissanti, aññā cittaṃ upaṭṭhāpessanti, te ca dhamme uggahetabbaṃ pariyāpuṇitabbaṃ maññissanti. evametesaṃ, bhikkhave, suttantānaṃ tathāgatabhāsitānaṃ gambhīrānaṃ gambhīratthānaṃ lokuttarānaṃ suññatappaṭisaṃyuttānaṃ antaradhānaṃ bhavissati. tasmātiha, bhikkhave, evaṃ sikkhitabbaṃ — ‘ye te suttantā tathāgatabhāsitā gambhīrā gambhīratthā lokuttarā suññatappaṭisaṃyuttā, tesu bhaññamānesu sussūsissāma, sotaṃ odahissāma, aññā cittaṃ upaṭṭhāpessāma, te ca dhamme uggahetabbaṃ pariyāpuṇitabbaṃ maññissāmā’ti. evañhi vo, bhikkhave, sikkhitabban”ti.  


“그러나 시인이 지은 것이고 아름다운 문자와 표현을 가진 시이고 외도의 제자들에 의해 말해진 그 가르침들이 설해질 때 들을 것이고, 귀 기울일 것이고, 최고의 앎을 가진 마음을 이해할 것이고, 그 법들을 일으켜야 하고 숙련되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여래에 의해 말해진, 심오하고, 심오한 의미를 가진, 세상을 넘어선, 공(空)에 일관된 그 가르침들의 사라짐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공부해야 한다. ㅡ ‘여래에 의해 말해진, 심오하고, 심오한 의미를 가진, 세상을 넘어선, 공(空)에 일관된 그 가르침들이 설해질 때 우리는 들을 것이고, 귀 기울일 것이고, 무위(無爲)의 앎을 가진 마음을 이해할 것이고, 그 법들을 일으켜야 하고 숙련되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라고.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참으로 이렇게 공부해야 한다.」                               (SN 20.7-쐐기 경)


「“dvemā, bhikkhave, parisā. katamā dve? okkācitavinītā parisā nopaṭipucchāvinītā, paṭipucchāvinītā parisā nookkācitavinītā. katamā ca, bhikkhave, okkācitavinītā parisā nopaṭipucchāvinītā? idha, bhikkhave, yassaṃ parisāyaṃ bhikkhū ye te suttantā tathāgatabhāsitā gambhīrā gambhīratthā lokuttarā suññatāpaṭisaṃyuttā tesu bhaññamānesu na sussūsanti na sotaṃ odahanti na aññā cittaṃ upaṭṭhapenti na ca te dhamme uggahetabbaṃ pariyāpuṇitabbaṃ maññanti. ye pana te suttantā kavitā kāveyyā cittakkharā cittabyañjanā bāhirakā sāvakabhāsitā tesu bhaññamānesu sussūsanti sotaṃ odahanti aññā cittaṃ upaṭṭhapenti, te dhamme uggahetabbaṃ pariyāpuṇitabbaṃ maññanti, te ca taṃ dhammaṃ pariyāpuṇitvā na ceva aññamaññaṃ paṭipucchanti na ca paṭivicaranti — ‘idaṃ kathaṃ, imassa ko attho’ti? te avivaṭañceva na vivaranti, anuttānīkatañca na uttānīkaronti, anekavihitesu ca kaṅkhāṭhāniyesu dhammesu kaṅkhaṃ na paṭivinodenti. ayaṃ vuccati, bhikkhave, okkācitavinītā parisā no paṭipucchāvinītā. 


비구들이여, 이런 두 가지 집단이 있다. 어떤 둘인가? 질문 없이 교육받고 되물음 없이 교육받은 집단과 되물음으로 교육받고 질문 없이 교육받지 않은 집단이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질문 없이 교육받고 되물음 없이 교육받은 집단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집단에 속한 비구들은 여래에 의해 말해진, 심오하고, 심오한 의미를 가진, 세상을 넘어선, 공(空)에 일관된 그 가르침들이 설해질 때 듣지 않을 것이고, 귀 기울이지 않을 것이고, 무위(無爲)의 앎을 가진 마음을 이해하지 않을 것이고, 그 법들을 일으켜야 하고 숙련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시인이 지은 것이고 아름다운 문자와 표현을 가진 시이고 외도의 제자들에 의해 말해진 그 가르침들이 설해질 때 들을 것이고, 귀 기울일 것이고, 최고의 앎을 가진 마음을 이해할 것이고, 그 법들을 일으켜야 하고 숙련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그 법을 숙련한 뒤에 서로서로 되묻지 않고 되돌아보지 않는다. ㅡ ‘어떻게 이러하고, 이것의 의미는 무엇인가?’라고. 그들은 분명하지 않은 것을 분명하게 하지 않고, 명확하지 않은 것을 명확하게 하지 않고, 여러 가지 의심되는 법들에 대해 의심을 제거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질문 없이 교육받고 되물음 없이 교육받은 집단이라고 불린다. 


“katamā ca, bhikkhave, paṭipucchāvinītā parisā nookkācitavinītā? idha, bhikkhave, yassaṃ parisāyaṃ bhikkhū ye te suttantā kavitā kāveyyā cittakkharā cittabyañjanā bāhirakā sāvakabhāsitā tesu bhaññamānesu na sussūsanti na sotaṃ odahanti na aññā cittaṃ upaṭṭhapenti, na ca te dhamme uggahetabbaṃ pariyāpuṇitabbaṃ maññanti. ye pana te suttantā tathāgatabhāsitā gambhīrā gambhīratthā lokuttarā suññatāpaṭisaṃyuttā tesu bhaññamānesu sussūsanti sotaṃ odahanti aññā cittaṃ upaṭṭhapenti, te ca dhamme uggahetabbaṃ pariyāpuṇitabbaṃ maññanti. te taṃ dhammaṃ pariyāpuṇitvā aññamaññaṃ paṭipucchanti paṭivicaranti — ‘idaṃ kathaṃ, imassa ko attho’ti? te avivaṭañceva vivaranti, anuttānīkatañca uttānīkaronti, anekavihitesu ca kaṅkhāṭhāniyesu dhammesu kaṅkhaṃ paṭivinodenti. ayaṃ vuccati, bhikkhave, paṭipucchāvinītā parisā nookkācitavinītā. imā kho, bhikkhave, dve parisā. etadaggaṃ, bhikkhave, imāsaṃ dvinnaṃ parisānaṃ yadidaṃ paṭipucchāvinītā parisā nookkācitavinītā”ti. 


비구들이여, 무엇이 되물음으로 교육받고 질문 없이 교육받지 않은 집단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집단에 속한 비구들은 시인이 지은 것이고 아름다운 문자와 표현을 가진 시이고 외도의 제자들에 의해 말해진 그 가르침들이 설해질 때 듣지 않을 것이고, 귀 기울이지 않을 것이고, 무위(無爲)의 앎을 가진 마음을 이해하지 않을 것이고, 그 법들을 일으켜야 하고 숙련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래에 의해 말해진, 심오하고, 심오한 의미를 가진, 세상을 넘어선, 공(空)에 일관된 그 가르침들이 설해질 때 들을 것이고, 귀 기울일 것이고, 최고의 앎을 가진 마음을 이해할 것이고, 그 법들을 일으켜야 하고 숙련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그 법을 숙련한 뒤에 서로서로 되묻고 되돌아본다. ㅡ ‘어떻게 이러하고, 이것의 의미는 무엇인가?’라고. 그들은 분명하지 않은 것을 분명하게 하고, 명확하지 않은 것을 명확하게 하고, 여러 가지 의심되는 법들에 대해 의심을 제거한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되물음으로 교육받고 질문 없이 교육받지 않은 집단이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두 가지 집단이다. 비구들이여, 이 두 가지 집단 가운데 되물음으로 교육받고 질문 없이 교육받지 않은 집단이 으뜸이다.」  (AN 2.43-52–집단 품)


3. 공(空) 삼매[suññato samādhi], suññatā cetovimutti[공심해탈(空心解脫)]


의 용례를 볼 수 있습니다. 


[2] [suññato samanupassati – 공(空)으로부터 관찰한다]의 용례


이제 공(空)과 관련한 또 하나의 용례를 볼 수 있는데, 수행과정에 관찰해야 하는 것들에 대한 관찰 기준입니다.


「초선(初禪)을 성취하여 머문다. ~ 제사선(第四禪)을 성취하여 머문다. 그는 거기에 있는 색(色)에 속하고, 수(受)에 속하고, 상(想)에 속하고, 행(行)에 속하고, 식(識)에 속하는 것들을 무상(無常)으로부터, 고(苦)로부터, 병(病)으로부터, 종기로부터, 화살로부터, 불행으로부터, 고뇌로부터, 남으로부터, 무너짐으로부터, 공(空)으로부터, 무아(無我)로부터 관찰한다.」


이때, 공무변처(空無邊處)~무소유처(無所有處)의 무색계(無色界)에서는 색(色)에 속한 것의 관찰은 배제됩니다.


● 용례 1) mahāmālukyasuttaṃ (MN 64-말루꺄 큰 경)

     ☞ http://sutta.kr/bbs/board.php?bo_table=nikaya05_07_04&wr_id=1

 

초선(初禪)을 성취하여 머문다. ~ 제사선(第四禪)을 성취하여 머문다. 그는 거기에 있는 색(色)에 속하고, 수(受)에 속하고, 상(想)에 속하고, 행(行)에 속하고, 식(識)에 속하는 것들을 무상(無常)으로부터, 고(苦)로부터, 병(病)으로부터, 종기로부터, 화살로부터, 불행으로부터, 고뇌로부터, 남으로부터, 무너짐으로부터, 공(空)으로부터, 무아(無我)로부터 관찰한다. 그는 그 법들로부터 심(心)을 돌린다. 그는 그 법들로부터 심(心)을 돌린 뒤 불사(不死)의 계(界)로 심(心)을 집중한다. ㅡ ‘이것은 고요하고 이것은 수승하다. 즉 모든 행(行)들의 그침이고, 모든 재생을 초래하는 붙잡음을 놓음이고, 갈애의 부숨이고, 이탐(離貪)이고, 소멸(消滅)인 열반(涅槃)이다.’라고. 거기에 선 그는 번뇌들의 부숨을 얻는다. 만약 번뇌들의 부숨을 얻지 못하면 그 법의 붙잡음과 그 법의 즐김에 의해 오하분결의 완전한 부숨으로 인해 화생(化生)한다. 거기서 완전한 열반에 드는 자이니, 그 세상으로부터 돌아오지 않는 존재[불환자(不還者)]이다. 아난다여, 오하분결을 버리기 위한 이런 길도 있고, 이런 실천도 있다.


공무변처(空無邊處)를 성취하여 머문다. ~ 무소유처(無所有處)를 성취하여 머문다. 그는 거기에 있는 수(受)에 속하고, 상(想)에 속하고, 행(行)에 속하고, 식(識)에 속하는 것들을 … 그 세상으로부터 돌아오지 않는 존재[불환자(不還者)]이다. 아난다여, 오하분결을 버리기 위한 이런 길도 있고, 이런 실천도 있다.


● 용례 2) dutiyanānākaraṇasuttaṃ (AN 4.124-다른 점 경)

     ☞ http://sutta.kr/bbs/board.php?bo_table=nikaya08_08_03&wr_id=1

 

“cattārome, bhikkhave, puggalā santo saṃvijjamānā lokasmiṃ. katame cattāro? idha, bhikkhave, ekacco puggalo vivicceva kāmehi ... pe ... paṭham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ati. so yadeva tattha hoti rūpagataṃ vedanāgataṃ saññāgataṃ saṅkhāragataṃ viññāṇagataṃ, te dhamme aniccato dukkhato rogato gaṇḍato sallato aghato ābādhato parato palokato suññato anattato samanupassati. so kāyassa bhedā paraṃ maraṇā suddhāvāsānaṃ devānaṃ sahabyataṃ upapajjati. ayaṃ, bhikkhave, upapatti asādhāraṇā puthujjanehi.


비구들이여,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네 부류의 이런 사람들이 있다. 어떤 넷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소유의 삶으로부터 벗어나고 … 초선(初禪)을 성취하여 머문다. 그는 거기에 있는 색(色)에 속하고, 수(受)에 속하고, 상(想)에 속하고, 행(行)에 속하고, 식(識)에 속하는 것들을 무상(無常)으로부터, 고(苦)로부터, 병(病)으로부터, 종기로부터, 화살로부터, 불행으로부터, 고뇌로부터, 남으로부터, 무너짐으로부터, 공(空)으로부터, 무아(無我)로부터 관찰한다. 그는 몸이 무너져 죽은 뒤 정거천(淨居天)의 신들의 동료로 태어난다. 비구들이여, 이 태어남은 범부들로부터 공통되지 않은 것이다.


⇒ 제이선(第二禪)-제삼선(第三禪)-제사선(第四禪)에 반복


● 용례 3) dutiyamettāsuttaṃ (AN 4.126-자애 경2)

     ☞ http://sutta.kr/bbs/board.php?bo_table=nikaya08_08_03&wr_id=2

 

“cattārome, bhikkhave, puggalā santo saṃvijjamānā lokasmiṃ. katame cattāro? idha, bhikkhave, ekacco puggalo mettāsahagatena cetasā ekaṃ disaṃ pharitvā viharati, tathā dutiyaṃ tathā tatiyaṃ tathā catutthaṃ. iti uddhamadho tiriyaṃ sabbadhi sabbattatāya sabbāvantaṃ lokaṃ mettāsahagatena cetasā vipulena mahaggatena appamāṇena averena abyāpajjena pharitvā viharati. so yadeva tattha hoti rūpagataṃ vedanāgataṃ saññāgataṃ saṅkhāragataṃ viññāṇagataṃ te dhamme aniccato dukkhato rogato gaṇḍato sallato aghato ābādhato parato palokato suññato anattato samanupassati. so kāyassa bhedā paraṃ maraṇā suddhāvāsānaṃ devānaṃ sahabyataṃ upapajjati. ayaṃ, bhikkhave, upapatti asādhāraṇā puthujjanehi.


비구들이여,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네 부류의 이런 사람들이 있다. 어떤 넷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자(慈)가 함께한 심(心)으로 한 방향을 채우면서 머뭅니다. 그렇게 두 방향을, 그렇게 세 방향을, 그렇게 네 방향을. 이렇게 위로 아래로 중간방위로, 모든 곳에서 모두에게 펼쳐서 모든 세상을 방대하고 거대하고 제한 없고 원망 없고 진에(瞋恚) 없는 자(慈)가 함께한 심(心)으로 채우면서 머뭅니다. 그는 거기에 있는 색(色)에 속하고, 수(受)에 속하고, 상(想)에 속하고, 행(行)에 속하고, 식(識)에 속하는 것들을 무상(無常)으로부터, 고(苦)로부터, 병(病)으로부터, 종기로부터, 화살로부터, 불행으로부터, 고뇌로부터, 남으로부터, 무너짐으로부터, 공(空)으로부터, 무아(無我)로부터 관찰한다. 그는 몸이 무너져 죽은 뒤 정거천(淨居天)의 신들의 동료로 태어난다. 비구들이여, 이 태어남은 범부들로부터 공통되지 않은 것이다.


⇒ 비(悲)-희(喜)-사(捨)에 반복.


● 용례 4) jhānasuttaṃ(AN 9.36-선(禪) 경)

     ☞ http://sutta.kr/bbs/board.php?bo_table=nikaya09_07_04&wr_id=3

 

idha, bhikkhave, bhikkhu vivicceva kāmehi ... pe ... paṭham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ati. so yadeva tattha hoti rūpagataṃ vedanāgataṃ saññāgataṃ saṅkhāragataṃ viññāṇagataṃ, te dhamme aniccato dukkhato rogato gaṇḍato sallato aghato ābādhato parato palokato suññato anattato samanupassati. so tehi dhammehi cittaṃ paṭivāpeti. so tehi dhammehi cittaṃ paṭivāpetvā amatāya dhātuyā cittaṃ upasaṃharati — ‘etaṃ santaṃ etaṃ paṇītaṃ yadidaṃ sabbasaṅkhārasamatho sabbūpadhipaṭinissaggo taṇhākkhayo virāgo nirodho nibbānan’ti. so tattha ṭhito āsavānaṃ khayaṃ pāpuṇāti. no ce āsavānaṃ khayaṃ pāpuṇāti, teneva dhammarāgena tāya dhammanandiyā pañcannaṃ orambhāgiyānaṃ saṃyojanānaṃ parikkhayā opapātiko hoti tattha parinibbāyī anāvattidhammo tasmā lokā.


초선(初禪)~제사선(第四禪)을 성취하여 머문다. 그는 거기에 있는 색(色)에 속하고, 수(受)에 속하고, 상(想)에 속하고, 행(行)에 속하고, 식(識)에 속하는 것들을 무상(無常)으로부터, 고(苦)로부터, 병(病)으로부터, 종기로부터, 화살로부터, 불행으로부터, 고뇌로부터, 남으로부터, 무너짐으로부터, 공(空)으로부터, 무아(無我)로부터 관찰한다. 그는 그 법들로부터 마음을 돌린다. 그는 그 법들로부터 마음을 돌린 뒤에 불사(不死)의 세계로 마음을 집중한다. - ‘이것은 고요하고 이것은 수승하다. 즉 모든 행(行)들의 그침이고, 모든 재생을 초래하는 붙잡음을 놓음이고, 갈애의 부숨이고, 이탐(離貪)이고, 소멸(消滅)인 열반(涅槃)이다.’라고. 거기에 선 그는 번뇌들의 부숨을 얻는다. 만약 번뇌들의 부숨을 얻지 못하면 그 법의 붙잡음과 그 법의 즐김에 의해 오하분결의 완전한 부숨으로 인해 화생(化生)한다. 거기서 완전한 열반에 드는 자이니, 그 세상으로부터 돌아오지 않는 존재[불환자(不還者)]이다. 


ākāsānañcāyatanaṃ upasampajja viharati. so yadeva tattha hoti vedanāgataṃ saññāgataṃ saṅkhāragataṃ viññāṇagataṃ, te dhamme aniccato dukkhato rogato gaṇḍato sallato aghato ābādhato parato palokato suññato anattato samanupassati. so tehi dhammehi cittaṃ paṭivāpeti. so tehi dhammehi cittaṃ paṭivāpetvā amatāya dhātuyā cittaṃ upasaṃharati — ‘etaṃ santaṃ etaṃ paṇītaṃ yadidaṃ sabbasaṅkhārasamatho sabbūpadhipaṭinissaggo taṇhākkhayo virāgo nirodho nibbānan’ti. so tattha ṭhito āsavānaṃ khayaṃ pāpuṇāti. no ce āsavānaṃ khayaṃ pāpuṇāti, teneva dhammarāgena tāya dhammanandiyā pañcannaṃ orambhāgiyānaṃ saṃyojanānaṃ parikkhayā opapātiko hoti tattha parinibbāyī anāvattidhammo tasmā lokā.


공무변처(空無邊處)~무소유처(無所有處)를 성취하여 머문다. 그는 거기에 있는 수(受)에 속하고, 상(想)에 속하고, 행(行)에 속하고, 식(識)에 속하는 것들을 무상(無常)으로부터, 고(苦)로부터, 병(病)으로부터, 종기로부터, 화살로부터, 불행으로부터, 고뇌로부터, 남으로부터, 무너짐으로부터, 공(空)으로부터, 무아(無我)로부터 관찰한다. 그는 그 법들로부터 마음을 돌린다. 그는 그 법들로부터 마음을 돌린 뒤에 불사(不死)의 세계로 마음을 집중한다. - ‘이것은 고요하고 이것은 수승하다. 즉 모든 행(行)들의 그침이고, 모든 재생을 초래하는 붙잡음을 놓음이고, 갈애의 부숨이고, 이탐(離貪)이고, 소멸(消滅)인 열반(涅槃)이다.’라고. 거기에 선 그는 번뇌들의 부숨을 얻는다. 만약 번뇌들의 부숨을 얻지 못하면 그 법의 붙잡음과 그 법의 즐김에 의해 오하분결의 완전한 부숨으로 인해 화생(化生)한다. 거기서 완전한 열반에 드는 자이니, 그 세상으로부터 돌아오지 않는 존재[불환자(不還者)]이다. 


● 기타 용례 ㅡ 몇 개의 경은 조금 다른 형태의 용례를 보여주는데, 한 개의 경은 몸에 대한 관찰이고, 두 개의 경은 오취온(五取蘊)에 대한 관찰입니다. 이때, 오취온(五取蘊)에 대한 관찰을 말하는 두 개의 경은 계(戒)를 중시하는 비구와 잘 배운 비구의 여리작의(如理作意)를 말하는데, 의미상으로는 위의 용례와 같다고 해야 합니다.


• dīghanakhasuttaṃ (MN 74-디가나카 경)


“ayaṃ kho panaggivessana, kāyo rūpī cātumahābhūtiko mātāpettikasambhavo odanakummāsupacayo 
aniccucchādanaparimaddanabhedanaviddhaṃsanadhammo, aniccato dukkhato rogato gaṇḍato sallato aghato ābādhato parato palokato suññato anattato samanupassitabbo. tassimaṃ kāyaṃ aniccato dukkhato rogato gaṇḍato sallato aghato ābādhato parato palokato suññato anattato samanupassato yo kāyasmiṃ kāyachando kāyasneho kāyanvayatā sā pahīyati.


악기웻사나여, 물질이어서 사대(四大)로 구성된 것이고, 부모에 속한 것에서 생겨난 것이고, 밥과 응유가 집적된 것이고, 무상하고 쇠퇴하고 부서지고 해체되고 흩어지는 것인 이 몸은 무상(無常)으로부터, 고(苦)로부터, 병(病)으로부터, 종기로부터, 화살로부터, 불행으로부터, 고뇌로부터, 남으로부터, 무너짐으로부터, 공(空)으로부터, 무아(無我)로부터 관찰되어야 한다. 이 몸을 무상(無常)으로부터, 고(苦)로부터, 병(病)으로부터, 종기로부터, 화살로부터, 불행으로부터, 고뇌로부터, 남으로부터, 무너짐으로부터, 공(空)으로부터, 무아(無我)로부터 관찰하는 그에게 몸에서 몸에 대한 찬다, 몸에 대한 애정, 몸에 대한 복종이 버려진다. 


• sīlavantasuttaṃ (SN 22.122-계를 중시하는 자 경)

     ☞ http://sutta.kr/bbs/board.php?bo_table=nikaya06_03_01&wr_id=15

 

“sīlavatāvuso, sāriputta, bhikkhunā katame dhammā yoniso manasikātabbā”ti? “sīlavatāvuso, koṭṭhika, bhikkhunā pañcupādānakkhandhā aniccato dukkhato rogato gaṇḍato sallato aghato ābādhato parato palokato suññato anattato yoniso manasi kātabbā. katame pañca? seyyathidaṃ — rūpupādānakkhandho, vedanupādānakkhandho, saññupādānakkhandho, saṅkhārupādānakkhandho, viññāṇupādānakkhandho. sīlavatāvuso, koṭṭhika, bhikkhunā ime pañcupādānakkhandhā aniccato dukkhato rogato gaṇḍato sallato aghato ābādhato parato palokato suññato anattato yoniso manasi kātabbā. ṭhānaṃ kho panetaṃ, āvuso, vijjati yaṃ sīlavā bhikkhu ime pañcupādānakkhandhe aniccato ... pe ... anattato yoniso manasi karonto sotāpattiphalaṃ sacchikareyyā”ti.


“도반 사리뿟따여, 계(戒)를 중시하는 비구는 어떤 법들을 여리작의(如理作意)해야 합니까?” “도반 꼿티까여, 계(戒)를 중시하는 비구는 오취온(五取蘊)을 무상(無常)으로부터, 고(苦)로부터, 병(病)으로부터, 종기로부터, 화살로부터, 불행으로부터, 고뇌로부터, 남으로부터, 무너짐으로부터, 공(空)으로부터, 무아(無我)로부터 여리작의해야 합니다. 어떤 다섯입니까? 색취온(色取蘊), 수취온(受取蘊), 상취온(想取蘊), 행취온(行取蘊), 식취온(識取蘊)입니다. 도반 꼿티까여, 계(戒)를 중시하는 비구는 이런 오취온(五取蘊)을 무상(無常)으로부터, 고(苦)로부터, 병(病)으로부터, 종기로부터, 화살로부터, 불행으로부터, 고뇌로부터, 남으로부터, 무너짐으로부터, 공(空)으로부터, 무아(無我)로부터 여리작의해야 합니다. 도반이여, 이런 오취온(五取蘊)을 무상(無常)으로부터, 고(苦)로부터, 병(病)으로부터, 종기로부터, 화살로부터, 불행으로부터, 고뇌로부터, 남으로부터, 무너짐으로부터, 공(空)으로부터, 무아(無我)로부터 여리작의하는 비구가 예류과(預流果)를 실현할 것이라는 경우는 있습니다.”

⇒ 예류자(預流者)~아라한에 반복.


• sīlavantasuttaṃ (SN 22.122-잘 배운 자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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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의 경에서 계(戒)를 중시하는 비구를 잘 배운 비구로 대체하여 동일하게 설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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