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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재] [6] 죽고 태어남이 없을 때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고 이 둘의 중간도 없음

0 605 2018.02.24 17:03

[6] 죽고 태어남이 없을 때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고 이 둘의 중간도 없음

   [cutūpapāte asati nevidha na huraṃ na ubhayamantarena]


  ※ 「Ⅳ. 윤회 – 기본적인 설명 ㅡ (6) 중유(中有) 또는 중음신(中陰身) 없음」 참조.


이 세상과 저 세상의 중간이란 표현은 주목해야 합니다.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등에서 중유(中有)[중음신(中陰身)]의 근거로 삼는 경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중유(中有) 있음은 죽고 태어남의 중간 과정이 있다는 의미인데, 죽고 바로 태어남의 교리와 정면으로 배치됩니다. 그래서 이 경설이 죽고 태어남의 중간 과정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 설명되어야 합니다.


주목해야 할 점은 이 문구가 죽고 태어남이 있는 중생의 영역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만, 죽고 태어남이 없는 경지 즉 해탈된 경우의 설명에서만 나타나는 것이어서 중생들의 삶에 대한 해석을 위해 적용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것입니다.


(*) [tatiyacetanāsuttaṃ (SN 12.40)] 「cutūpapāte sati āyatiṃ jātijarāmaraṇaṃ sokaparidevadukkhadomanassupāyāsā sambhavanti. 죽고 태어남이 있을 때 미래에 생(生)-노사(老死)-수비고우뇌(愁悲苦憂惱)가 생긴다.」


  → 미래의 태어남의 자리를 저 세상이라고 부름.


해탈하면 다시 태어나지 않습니다. 즉 해탈하여 윤회에서 벗어난 아라한에게 저 세상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라한의 사후(死後)는 어떻게 됩니까? 그 마음[식(識)]은 중생들이 죽고 다시 태어나는 저 세상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가게 됩니까? 열반(涅槃)이라 불리는 제3의 자리가 있어서 그곳으로 가는 것입니까? 즉 이 세상도 저 세상도 아닌 아라한의 식(識)이 찾아가서 모이는 중간의 어떤 자리가 있는 것입니까?


그러나 열반은 어디어디에 가면 실재하는 어떤 세상이 아닙니다. 소유의 삶[욕계(慾界)]에도 존재의 삶[색계(色界)-무색계(無色界)]에도 속하지 않는, 중생의 삶의 영역을 의미하는 세상의 개념에서 벗어난 해탈된 영역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도 아니고 저 세상도 아닌 그 사이에 존재하는 제3의 세상이 아닙니다. 오직 팔정도(八正道)에 의해 각자에게서 실현되는 이 세상에도 속하지 않고 저 세상에도 속하지 않는 해탈된 상태를 의미하는 하나의 법(法)인 것입니다[무아(無我)]. 


비유하자면, 극락(極樂)세계는 저 세상입니까? 아니면 저 세상과는 다른 그러나 죽은 뒤에 가는, 이 세상도 저 세상도 아닌 제3의 세상입니까? 


만일 저 세상이라면 욕계(慾界)-색계(色界)-무색계(無色界)의 삼계(三界)[중생 세상]에 속할 것입니다. 중생의 세상은 삼계(三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일 저 세상이 아닌 제3의 세상이라면 이러한 세상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도 아니고 저 세상도 아닌 중간에 있는 어떤 세상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경은 바로 그런 제3의 세상은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직 중생의 영역에 속해서 죽은 뒤 다시 태어나야 한다면 그 세상은 삼계(三界)에 속하는 저 세상이고, 중생의 영역을 벗어나 해탈했다면 다시 태어나지 않는 것이지 중간의 제3의 세상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 제3의 세상을 설정하여 죽은 뒤 저 세상에 가지 않고 그곳으로 간다고 말하면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거짓입니다. 부처님은 이 경들을 통해 이 점을 분명하게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경들을 근거로 중유(中有)의 존재를 설정하는 것은 부처님의 의도와 다릅니다. 가르침을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따라서 중유(中有)는 그 존립 근거를 가지지 못합니다. 즉 중유(中有)는 없습니다.  


1. channovādasuttaṃ (MN 144.1)[찬나를 교계한 경] = channasuttaṃ (SN 35.70)[찬나 경(S35:87)]


evameva kho, āvuso, adhimatto kāyasmiṃ ḍāho. na me, āvuso, khamanīyaṃ, na yāpanīyaṃ, bāḷhā me dukkhā vedanā abhikkamanti no paṭikkamanti, abhikkamosānaṃ paññāyati no paṭikkamo. satthaṃ, āvuso sāriputta, āharissāmi, nāvakaṅkhāmi jīvitan”ti.


“이와 같이 제 몸에는 극심한 불덩이가 끓고 있습니다. 도반이여, 저는 견디기가 어렵습니다. 편안하지 않습니다. 괴로움의 경험은 더 심하기만 하고 물러가지 않습니다. 더 심하기만 하고 진정되지 않는 것이 분명합니다. 도반 사리뿟따여, 저는 칼을 사용하려 합니다. 저는 사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mā āyasmā channo satthaṃ āharesi. yāpetāyasmā channo, yāpentaṃ mayaṃ āyasmantaṃ channaṃ icchāma. sace āyasmato channassa natthi sappāyāni bhojanāni, ahaṃ āyasmato channassa sappāyāni bhojanāni pariyesissāmi. sace āyasmato channassa natthi sappāyāni bhesajjāni, ahaṃ āyasmato channassa sappāyāni bhesajjāni pariyesissāmi. sace āyasmato channassa natthi patirūpā upaṭṭhākā, ahaṃ āyasmantaṃ channaṃ upaṭṭhahissāmi. mā āyasmā channo satthaṃ āharesi. yāpetāyasmā channo, yāpentaṃ mayaṃ āyasmantaṃ channaṃ icchāmā”ti.


“찬나 존자는 칼을 사용하지 마십시오. 찬나 존자는 삶을 영위하십시오. 우리는 찬나 존자가 삶을 영위하기를 바랍니다. 만일 찬나 존자에게 적당한 음식이 없다면 내가 찬나 존자를 위해서 적당한 약을 찾아보겠습니다. 만일 찬나 존자에게 적당한 약이 없다면 내가 찬나 존자를 위해서 적당한 음식을 찾아보겠습니다. 만일 찬나 존자에게 적당한 시자가 없다면 내가 찬나 존자의 시자가 되겠습니다. 찬나 존자는 칼을 사용하지 마십시오. 찬나 존자는 삶을 영위하십시오. 우리는 찬나 존자가 삶을 영위하기를 바랍니다.”


“na me, āvuso sāriputta, natthi sappāyāni bhojanāni; atthi me sappāyāni bhojanāni. napi me natthi sappāyāni bhesajjāni; atthi me sappāyāni bhesajjāni. napi me natthi patirūpā upaṭṭhākā; atthi me patirūpā upaṭṭhākā. api ca me, āvuso, satthā pariciṇṇo dīgharattaṃ manāpeneva, no amanāpena. etañhi, āvuso, sāvakassa patirūpaṃ yaṃ satthāraṃ paricareyya manāpeneva, no amanāpena. ‘anupavajjaṃ channo bhikkhu satthaṃ āharissatī’ti — evametaṃ, āvuso sāriputta, dhārehī”ti.


“도반 사리뿟따여, 제게 적절한 음식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저에게는 적절한 음식이 있습니다. 제게 적절한 약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저에게는 적절한 약이 있습니다. 제게 적절한 시자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저에게는 적절한 시자가 있습니다. 도반 사리뿟따여, 저는 오랜 세월 스승님을 마음으로 흠모하면서 섬겼으며 마음으로 흠모하지 않으면서 섬기지는 않았습니다. 도반 사리뿟따여, 제자가 스승을 흠모하면서 섬기는 것은 어울리기 때문입니다. ‘찬나 비구는 비난받지 않고 칼을 사용할 것이다.’라고 도반 사리뿟따께서는 받아들여 주십시오.”



evaṃ vutte, āyasmā mahācundo āyasmantaṃ channaṃ etadavoca — “tasmātiha, āvuso channa, idampi tassa bhagavato sāsanaṃ, niccakappaṃ manasi kātabbaṃ — ‘nissitassa calitaṃ, anissitassa calitaṃ natthi. calite asati passaddhi, passaddhiyā sati nati na hoti. natiyā asati āgatigati na hoti. āgatigatiyā asati cutūpapāto na hoti. cutūpapāte asati nevidha na huraṃ na ubhayamantarena. esevanto dukkhassā’”ti. atha kho āyasmā ca sāriputto āyasmā ca mahācundo āyasmantaṃ channaṃ iminā ovādena ovaditvā uṭṭhāyāsanā pakkamiṃsu.


이렇게 말하자 마하쭌다 존자는 찬나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ㅡ "그러므로 도반 찬나여, 이것도 그분 세존의 가르침이니 항상 사유해야 합니다. ㅡ '의지하는 자는 동요하고, 의지하지 않는 자는 동요하지 않는다. 동요하지 않을 때 편안하고 편안할 때 경향이 없다. 경향이 없을 때 오고 감이 없고, 오고 감이 없을 때 죽고 태어남이 없다. 죽고 태어남이 없을 때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고 이 둘의 중간도 없다. 이것이 괴로움의 끝이다.'라고." 사리뿟따 존자와 마하쭌다 존자는 찬나 존자에게 이렇게 법문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나갔다. 


atha kho āyasmā channo acirapakkante āyasmante ca sāriputte āyasmante ca mahācunde satthaṃ āharesi. atha kho āyasmā sāriputto yena bhagavā tenupasaṅkami; upasaṅkamitvā bhagavantaṃ abhivādetvā ekamantaṃ nisīdi. ekamantaṃ nisinno kho āyasmā sāriputto bhagavantaṃ etadavoca — “āyasmatā, bhante, channena satthaṃ āharitaṃ. tassa kā gati, ko abhisamparāyo”ti? “nanu te, sāriputta, channena bhikkhunā sammukhāyeva anupavajjatā byākatā”ti? “atthi, bhante, pubbajiraṃ nāma vajjigāmo. tatthāyasmato channassa mittakulāni suhajjakulāni upavajjakulānī”ti. “honti hete, sāriputta, channassa bhikkhuno mittakulāni suhajjakulāni upavajjakulāni. nāhaṃ, sāriputta, ettāvatā ‘saupavajjo’ti vadāmi. yo kho, sāriputta, imañca kāyaṃ nikkhipati aññañca kāyaṃ upādiyati tamahaṃ ‘saupavajjo’ti vadāmi. taṃ channassa bhikkhuno natthi. ‘anupavajjo channo bhikkhu satthaṃ āharesī’ti evametaṃ, sāriputta, dhārehī”ti. 


찬나 존자는 사리뿟따 존자와 마하쭌다 존자가 나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칼을 사용했다. 그때 사리뿟따 존자는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절을 올리고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아서 사리뿟따 존자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ㅡ "세존이시여, 찬나 존자가 칼을 사용하여 자결을 했습니다. 그가 태어날 곳은 어디이고 그는 내세에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리뿟따여, 찬나 비구는 그대의 면전에서 비난받을 일이 없음을 설명하지 않았는가?"


"세존이시여, 뿝바지라라는 왓지족의 마을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찬나 존자의 친구 가족들이 있고 친숙한 가족들이 있는데 호의적인 가족들입니다."


"사리뿟따여, 찬나 비구의 친구 가족들과 그에게 친숙한 가족들이 있어 그에게 호의적인 가족들이라 하더라도 나는 그 정도를 가지고 그가 비난받아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사리뿟따여, 나는 이 몸을 내려놓고 다른 몸을 붙잡는 자를 비난받아 마땅한 자라고 말한다. 찬나 비구에게는 그러한 것이 없다. 사리뿟따여, ‘찬나 비구는 비난받을 일 없이 칼을 사용했다.’라고 이렇게 받아들여라."


2. mālukyaputtasuttaṃ (SN 35.78)[말루끼야 경]


“taṃ kiṃ maññasi, mālukyaputta, ye te cakkhuviññeyyā rūpā adiṭṭhā adiṭṭhapubbā, na ca passasi, na ca te hoti passeyyanti? atthi te tattha chando vā rāgo vā pemaṃ vā”ti? “no hetaṃ, bhante”.



“말룽꺄뿟따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대가 보지 못했고 전에도 본 적이 없으며 지금도 보지 못하고 앞으로도 보지 못할, 안(眼)으로 알아야 하는 색(色)들이 있다면 그대에게 거기에 용의(用意)나 탐(貪)이나 애정이 있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대덕이시여.”


“ye te sotaviññeyyā saddā assutā assutapubbā, na ca suṇāsi, na ca te hoti suṇeyyanti? atthi te tattha chando vā rāgo vā pemaṃ vā”ti? “no hetaṃ, bhante”.


“그대가 듣지 못했고 전에도 들은 적이 없으며 지금도 듣지 못하고 앞으로도 듣지 못할, 이(耳)로 알아야 하는 성(聲)들이 있다면 그대에게 거기에 용의(用意)나 탐(貪)이나 애정이 있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대덕이시여.”


“ye te ghānaviññeyyā gandhā aghāyitā aghāyitapubbā, na ca ghāyasi, na ca te hoti ghāyeyyanti? atthi te tattha chando vā rāgo vā pemaṃ vā”ti? “no hetaṃ, bhante”.


“그대가 냄새 맡지 못했고 전에도 냄새 맡은 적이 없으며 지금도 냄새 맡지 못하고 앞으로도 냄새 맡지 못할, 비(鼻)로 알아야 하는 향(香)들이 있다면 그대에게 거기에 용의(用意)나 탐(貪)이나 애정이 있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대덕이시여.”


“ye te jivhāviññeyyā rasā asāyitā asāyitapubbā, na ca sāyasi, na ca te hoti sāyeyyanti? atthi te tattha chando vā rāgo vā pemaṃ vā”ti? “no hetaṃ, bhante”.


“그대가 듣지 못했고 전에도 맛본 적이 없으며 지금도 맛보지 못하고 앞으로도 맛보지 못할, 설(舌)로 알아야 하는 미(味)들이 있다면 그대에게 거기에 용의(用意)나 탐(貪)이나 애정이 있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대덕이시여.”


“ye te kāyaviññeyyā phoṭṭhabbā asamphuṭṭhā asamphuṭṭhapubbā, na ca phusasi, na ca te hoti phuseyyanti? atthi te tattha chando vā rāgo vā pemaṃ vā”ti? “no hetaṃ, bhante”.


“그대가 느끼지 못했고 전에도 느낀 적이 없으며 지금도 느끼지 못하고 앞으로도 느끼지 못할, 신(身)으로 알아야 하는 촉(觸)들이 있다면 그대에게 거기에 용의(用意)나 탐(貪)이나 애정이 있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대덕이시여.”


“ye te manoviññeyyā dhammā aviññātā aviññātapubbā, na ca vijānāsi, na ca te hoti vijāneyyanti? atthi te tattha chando vā rāgo vā pemaṃ vā”ti? “no hetaṃ, bhante”.


“그대가 인지하지 못했고 전에도 인지한 적이 없으며 지금도 인지하지 못하고 앞으로도 인지하지 못할, 의(意)로 알아야 하는 법(法)들이 있다면 그대에게 거기에 용의(用意)나 탐(貪)이나 애정이 있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대덕이시여.”


“ettha ca te, mālukyaputta, diṭṭhasutamutaviññātabbesu dhammesu diṭṭhe diṭṭhamattaṃ bhavissati, sute sutamattaṃ bhavissati, mute mutamattaṃ bhavissati, viññāte viññātamattaṃ bhavissati. yato kho te, mālukyaputta, diṭṭhasutamutaviññātabbesu dhammesu diṭṭhe diṭṭhamattaṃ bhavissati, sute sutamattaṃ bhavissati, mute mutamattaṃ bhavissati, viññāte viññātamattaṃ bhavissati; tato tvaṃ, mālukyaputta, na tena. yato tvaṃ, mālukyaputta, na tena; tato tvaṃ, mālukyaputta, na tattha. yato tvaṃ, mālukyaputta, na tattha; tato tvaṃ, mālukyaputta, nevidha, na huraṃ, na ubhayamantarena. esevanto dukkhassā”ti. 


“말루끼야뿟따여, 그대가 보고 듣고 감지하고 알아야 하는 법들에 대해서 볼 때는 단지 봄만이 있을 것이고 들을 때는 단지 들음만이 있을 것이고 감지할 때는 단지 감지함만이 있을 것이고 알 때는 단지 앎만이 있을 것이다. 말루끼야뿟따여, 그대가 보고 듣고 감지하고 알아야 하는 법들에 대해서 볼 때는 단지 봄만이 있을 것이고, 들을 때는 단지 들음만이 있을 것이고 감지할 때는 단지 감지함만이 있을 것이고 알 때는 단지 앎만이 있을 것이면 그대에게는 ‘그것에 의함’이란 것이 있지 않다. 말루끼야뿟따여, ‘그것에 의함’이 있지 않으면 그대에게는 ‘거기에’라는 것이 있지 않다. 말루끼야뿟따여, 그대에게 ‘거기에’가 있지 않으면 그대에게는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고 이 둘의 중간도 없다. 이것이 바로 괴로움의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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