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사회참여/외부특강 > 학술세미나 > 윤회의 진실

학술세미나

[교재] [2] 견해의 의미 – 앎[ñāṇa]와 견해[diṭṭhi]의 차이

0 601 2018.02.24 17:32

[2] 견해의 의미 [ñāṇa]와 견해[diṭṭhi]의 차이

 

바르게 알던 바르지 않게 알던 직접적으로 아는 것은 앎[()-ñāṇa]입니다. 그러나 직접적으로 알지 못하는 가운데의 의견은 견해(見解)[diṭṭhi]입니다.

 

- [명사] 아는 일

지식(知識) - 어떤 대상에 대하여 배우거나 실천을 통하여 알게 된 명확한

인식이나 이해.

 

견해(見解) - [명사] 어떤 사물이나 현상에 대한 자기의 의견이나 생각.

 

특히, 세간적 배움이나 실천을 통해 확인할 수 없는 주제들에 대해서는 앎을 가지기 어렵습니다. 윤회 등은 삶의 심오한 영역에 속하는 주제들입니다. 앎을 가지지는 못하지만 답을 필요로 하는 이 주제들에 대한 의견이나 생각을 견해라고 한다고 이해하면 타당할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윤회의 문제는 접근되어야 합니다.

 

윤회하는 것인지 즉 저 세상이 있는 것인지는 이 몸으로 살아가는 동안에는 직접적으로 알지 못합니다. 다만, 이럴 것이라는 의견을 가질 뿐입니다. 앎이 아니라 견해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견해는 씨앗에 비유됩니다. 견해의 씨앗이 사유(思惟)[의업(意業)]으로 싹이 트고, 몸과 말의 행위[신업(身業)-구업(口業)]으로 자라나서 고()거나 락()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래서 견해는 중요합니다. 잘못된 견해는 잘못된 사유를 싹틔우고 잘못된 몸과 말의 행위로 자라나서 고()를 결과 맺고, 바른 견해는 바른 사유를 싹틔우고 바른 몸과 말의 행위로 자라나서 락()[고멸(苦滅)]을 결과 맺기 때문입니다.

 

<커다란 마흔의 경(M117)>에 의하면, 바른 견해는 바른 방법에 의해 확인하면 바른 앎이 됩니다. 정견(正見)으로 시작하는 팔정도(八正道)가 십정도(十正道)로 확장될 때 바른 앎[정지(正知)]와 바른 해탈이 더해지는 것인데, 팔정도는 유학(有學)의 길로, 십정도는 무학(無學)의 길로 설명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어떤 것이 바른 견해-바른 방법-바른 앎-바른 해탈이어서 완전한 행복[()-고멸(苦滅)]로 이끌어 주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스승과 종교의 역할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승과 종교의 가르침에 대한 믿음이 필요해지는 것입니다.

 

불교신자에게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믿음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부처님이야말로 바른 해탈을 실현한 스승이고 부처님의 가르침이야말로 완전한 가르침이어서 알려주신 견해와 방법을 실천하면 완전한 행복이 실현된다는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의 전형을 보여주는 경전은 <시하 경(A5:34)>입니다.

 

보시의 결실을 질문하는 시하 장군에게 부처님은 보시를 행하는 보시의 주인을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고 마음에 들어 하는 것, 선하고 참된 사람들이 그를 가까이 하는 것, 그에게 좋은 명성이 따르는 것, 어떠한 모임에 가더라도 담대하고 기죽지 않고 다가가는 것의 네 가지 지금여기서 스스로 보아 알 수 있는 보시의 결실에 이어, 몸이 무너져 죽은 뒤 좋은 곳[善處]에 태어난다는 내생의 보시의 결실을 설합니다.

 

시하 장군과 부처님의 대화는 이렇게 이어집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말씀하신 지금여기서 스스로 보아 알 수 있는 네 가지 보시의 결실에 대해서는 단지 세존에 대한 믿음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저 자신도 또한 이 네 가지를 알고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보시를 행하는 보시의 주인인 저를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고 마음에 들어 합니다. 세존이시여, 보시를 행하는 보시의 주인인 저를 선하고 참된 사람들이 가까이합니다. 세존이시여, 보시를 행하는 보시의 주인인 제겐 좋은 명성이 따릅니다. 세존이시여, 보시를 행하는 보시의 주인인 저는 끄샤뜨리야의 회중이나 바라문의 회중이나 장자의 회중이나 사문의 회중이나 그 어떠한 회중에 다가가더라도 담대하고 기죽지 않고 다가갑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말씀하신 지금여기서 스스로 보아 알 수 있는 네 가지 보시의 결실에 대해서는 단지 세존에 대한 믿음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저 자신도 또한 이 네 가지를 알고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나 세존께서 '시하여, 보시를 행하는 보시의 주인은 몸이 무너져 죽은 뒤 좋은 곳[善處]에 태어난다.'라고 말씀하신 것에 대해서는 제가 알지 못합니다. 이 점에 대해서 저는 세존에 대한 믿음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하다, 시하여. 참으로 그러하다, 시하여. 시하여, 보시를 행하는 보시의 주인은 몸이 무너져 죽은 뒤 좋은 곳[善處]에 태어난다."

 

시하 장군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보아 알 수 있는 영역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가르침을 실천하는 삶의 과정에서 확인되기 때문에 바른 가르침이라고 공감하는 것이고, 스스로 보아 알지 못하는 심오한 영역의 문제에 대해서는 부처님에 대한 믿음으로 받아들여 삶의 기준으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주목해야 합니다! 윤회 등 심오한 영역의 문제는 바른 앎이 생기기 전에는 내가 직접 보아 확인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의지해서 그 문제의 답을 구해야 합니까? 불교신자인 시하 장군은 망설임 없이 부처님에게 의지해서 답을 구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불교신자라면, 스스로 알지 못하는 심오한 영역에 속하는 이야기, 종교의 영역에서 답을 찾아야 하는 이야기, 오직 부처님께서 높은 지혜로써 확인해 선언하는 이야기는 부처님에 대한 공감-동의-신뢰에 의해서 받아들이고 삶의 기준으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불교신자에게는 이것이 정답입니다! 이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종교의 영역에서 답을 구해야 하는 문제에 대해 부처님 아닌 다른 방법에 의지한다면, 그 방법을 설한 스승의 신자인 것이지 불교신자라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부처님과 시하 장군 간의 이 대화는 심오한 영역에 속하는 이야기는 스승이고 교주인 부처님에 의지해서 가르쳐주신 그대로에 공감하고 동의하고 신뢰하여 삶의 기준으로 삼는 사람이 불교신자라는 것을 극명하게 드러내 주는 일화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른 견해에 이어지는 바른 방법에 의해 바른 앎이 생길 때까지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지한 바른 견해로써 삶의 기준을 삼아야 하는데, 바로 경전입니다. 부처님 살아서 직접 설한 가르침을 모아 놓은 1차 결집된 공부의 기준이 바로 그것이고, 윤회에 대한 답도 여기에서 찾아야 합니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