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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재] [4] 윤회의 선언 → 단견(斷見) 또는 단멸론(斷滅論)의 극복

0 578 2018.02.24 17:35

[4] 윤회의 선언 단견(斷見) 또는 단멸론(斷滅論)의 극복

 

<빠야시 경(D23)> 외에도 많은 경전 특히 십선업(十善業)을 설하는 경전들은 의업(意業)에 속하는 견해의 바름에 대한 정의를 통해 저 세상은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니 부처님과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믿음을 가진 불교신자에게는 저 세상이 실제로 있는 것입니다. 윤회하는 삶의 현실에 대해 바르게 알고, 부처님에게서 바른 방법을 배워 실천함으로써 그 윤회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할 때 비로소 불교신자라고 불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저 세상이 있어서 윤회한다는 견해를 가지는 것은 가르침에 의지하는 불교신자의 삶입니다. 그러나 윤회하지 않는다는 견해를 가지는 것은 외도의 가르침에 의지하거나 자기 스스로의 판단에 따르는 비불교(非佛敎)적 오류인데, 단견(斷見) 또는 단멸론(斷滅論)입니다. 부처님이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한 분이고, 그의 가르침이 완전한 가르침이라면 이것은 사실입니다. 이런 사실 위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불교신자입니다.

 

이렇게 바른 견해를 가진 불교신자에게는 두 가지 측면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1.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이 쉬워짐

 

부처님은 삼명(三明)[숙주명(宿住明)-천안명(天眼明)-누진명(漏盡明)]을 갖춘 분입니다[삼명(三明) 아라한]. 그런데 부처님 당시부터 불교 안에 보편적인 깨달음의 과정은 혜해탈자(慧解脫者)입니다. 숙주명(宿住明)과 천안명(天眼明)의 과정 없이 누진명(漏盡明)으로 깨달음을 성취한 아라한들입니다. <자자(自恣) (S8:7)> 참조.

 
“imesampi khvāhaṃ, sāriputta, pañcannaṃ bhikkhusatānaṃ na kiñci garahāmi kāyikaṃ vā vācasikaṃ vā. imesañhi, sāriputta, pañcannaṃ bhikkhusatānaṃ saṭṭhi bhikkhū tevijjā, saṭṭhi bhikkhū chaḷabhiññā, saṭṭhi bhikkhū ubhatobhāgavimuttā, atha itare paññāvimuttā”ti. <자자(自恣) (S8:7)>

 

사리뿟따여, 이들 오백 명의 비구들이 몸이나 말로써 행한 것들 가운데 내가 책망해야 할 것은 없다. 비구들이여, 이들 오백 명의 비구들 가운데 60명의 비구들은 삼명(三明)을 갖추었고, 60명의 비구들은 육신통(六神通)을 갖추었고, 60명의 비구들은 양면해탈자(兩面解脫者)이고, 나머지는 혜해탈자(慧解脫者)이다."

 

스승 없이 깨달음을 성취한 부처님은 스스로 알아야 했기에 삼명(三明)의 과정을 통해 전생들을 직접 보아 확인하고[숙주명(宿住明)], 죽고 다시 태어남의 과정 즉 윤회의 과정을 직접 본[천안명(天眼明)] 이후에 비로소 윤회의 원인인 번뇌를 부수고 해탈[누진명(漏盡明)]하였지만 부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진 제자들은 믿음에 의해서 윤회하는 줄 알기 때문에 숙주명(宿住明)-천안명(天眼明)의 과정 없이 직접 번뇌를 부수고 해탈[누진명(漏盡明)]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믿음의 힘은 이렇게 깨달음의 난이도를 낮춰주는 것입니다.

 

2. 행위의 제어에 도움 됨 자책 경(A4:121)

 

비구들이여, 네 가지 두려움이 있다. 무엇이 넷인가? 자책에 대한 두려움, 남의 책망에 대한 두려움, 형벌에 대한 두려움, 악처에 대한 두려움이다.

 

자책에 대한 두려움[hiri] 여기 어떤 자는 이렇게 숙고한다. '내가 만일 몸으로 나쁜 행위를 저지르고 말로 나쁜 행위를 저지르고 마음으로 나쁜 행위를 저지른다면 계()에 관한 한 내가 내 자신을 어찌 비난하지 않겠는가?' 그는 자책에 대한 두려움에 겁이 나서 몸으로 짓는 나쁜 행위를 버리고 몸으로 짓는 좋은 행위를 닦고 말로 짓는 나쁜 행위를 버리고 말로 짓는 좋은 행위를 닦고 마음으로 짓는 나쁜 행위를 버리고 마음으로 짓는 좋은 행위를 닦아서 청정한 자신을 유지한다. 이를 일러 자책에 대한 두려움이라 한다.

 

남의 책망에 대한 두려움[ottappa] 여기 어떤 자는 이렇게 숙고한다. '내가 만일 몸으로 나쁜 행위를 저지르고 말로 나쁜 행위를 저지르고 마음으로 나쁜 행위를 저지른다면 계()에 관한 한 남들이 나를 어찌 비난하지 않겠는가?' 그는 남의 책망에 대한 두려움에 겁이 나서 몸으로 짓는 나쁜 행위를 버리고 몸으로 짓는 좋은 행위를 닦고 말로 짓는 나쁜 행위를 버리고 말로 짓는 좋은 행위를 닦고 마음으로 짓는 나쁜 행위를 버리고 마음으로 짓는 좋은 행위를 닦아서 청정한 자신을 유지한다. 이를 일러 남의 책망에 대한 두려움이라 한다.

 

형벌에 대한 두려움 여기 어떤 자는 형벌에 대한 두려움에 겁이 나서 남의 재산을 강탈하는 짓을 하지 않는다. 이를 일러 형벌에 대한 두려움이라 한다.

 

악처에 대한 두려움 여기 어떤 자는 이렇게 숙고한다. '몸으로 나쁜 행을 저지르면 다음 생에 악한 보()가 있다. 말로 나쁜 행을 저지르면 다음 생에 악한 보()가 있다. 마음으로 나쁜 행을 저지르면 다음 생에 악한 보()가 있다. 내가 만약 몸과 말과 마음으로 나쁜 행위를 저지른다면 몸이 무너져 죽은 뒤 그 때문에 처참한 곳, 불행한 곳, 파멸처, 지옥에 태어나지 않겠는가?' 그는 악처에 대한 두려움에 겁이 나서 몸으로 나쁜 행위를 저지르지 않고 좋은 행위를 닦고, 말과 마음으로도 나쁜 행위를 저지르지 않고 좋은 행위를 닦아서 자신을 청정하게 만든다. 이를 일러 악처에 대한 두려움이라 한다.

 

이런 네 가지 두려움은 신구의(身口意)로 악업(惡業)을 짓지 않고 선업(善業)을 짓게 하는 동력이 됩니다. 이때, 자책[hiri]과 남의 책망[ottappa]이 스스로의 내적 성찰에 의한 제어라면 형벌과 악처는 구체적이고 강제적인 제어라고 해야 합니다. 그런데 만일 윤회에 대한 바른 견해가 없다면 구체적이고 강제적인 두 가지 제어 중 한 가지를 잃는 것입니다. 그럴 경우에는 죽을 때까지 들키지 않을 수만 있다면 그래서 형벌을 받지 않을 수만 있다면 어떤 악업이든지 지을 수 있는 나쁜 소지를 남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른 견해를 가진 불교신자에게는 행위의 제어를 위한 구체적이고 강제적인 방법이 함께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악업(惡業)을 짓지 않고 선업(善業)을 짓게 되고, 그만큼 고()가 아닌 락()의 결실을 맺게 되는 것입니다.

 

※ 「세 가지 질문 질문3.윤회가 우리 삶, 우리 사회에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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