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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재]【삶의 메커니즘 - ①1차 인식】

0 792 2018.02.24 20:51

【삶의 메커니즘 - ①1차 인식


「삶의 메커니즘에는 두 번의 인식작용이 있습니다. 진행 순서에 의해 1차 인식과 2차 인식으로 이름 붙였는데, 내입처(內入處)-외입처(外入處)-욕탐(欲貪)에 의한 표면의 인식작용[감각작용]은 1차 인식이고, 식(識)-수(受)-상(想)에 의한 내면의 인식작용은 2차 인식입니다.」


삶은 유신(有身)[sakkāya → sa-(k)-kāya]입니다. 몸[kāya]과 함께하는[sa] 상태이고, 오취온(五取蘊)이라고 정의됩니다. 오온(五蘊)[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에 집착[취(取)]가 함께한 상태를 말하는데, 오온(五蘊) 각각에 대한 ‘나의 것-나-나의 자아’라는 집착을 통해 스스로 내가 되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삶은 결과를 만듭니다. 지금을 살면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의 알갱이를 만들어 각각의 무더기에 쌓음으로써 누적된 삶을 바꿉니다. 그래서 누적된 삶은 지난 삶의 결과들의 쌓임으로 구성되는 몸과 마음의 과정입니다. 


그런데 누적된 삶과 지금의 삶은 연결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누적된 삶은 지금의 삶의 근거가 되고, 지금의 삶은 누적된 삶의 변화를 만들 수 있습니다. 이때, 두 삶의 연결 역할을 맡는 것은 작의(作意)[manasikāra]와 촉(觸)[phassa]입니다. 그렇다면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 오온(五蘊)의 누적된 삶이 작의(作意)와 촉(觸)에 의해 지금의 삶으로 연결되어 지금을 살고 그 결과를 쌓아 누적된 삶을 바꾼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온(五蘊) 즉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의 누적은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와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의 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각각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와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으로 배분되어 쌍(雙)을 이루고, 그 대응 관계로써 지금의 삶을 구성합니다. 그리고 이런 누적과 배분의 관계 위에서 작의(作意)와 촉(觸)의 작용에 의해 지금의 삶으로 연결됩입니다.


이때, 작의(作意)와 촉(觸)에 의한 연결은 식(識)과 명색(名色)의 정의를 통해 설명할 수 있습니다. vibhaṅgasuttaṃ (SN 12.2)[분석 경]에 의하면, 식(識)과 명색(名色)은 이렇게 정의됩니다.


• katamañca, bhikkhave, viññāṇaṃ? chayime, bhikkhave, viññāṇakāyā — cakkhuviññāṇaṃ, sotaviññāṇaṃ, ghānaviññāṇaṃ, jivhāviññāṇaṃ, kāyaviññāṇaṃ, manoviññāṇaṃ. idaṃ vuccati, bhikkhave, viññāṇaṃ.


비구들이여, 무엇이 식(識)인가? 비구들이여, 이런 여섯 가지 식(識)이 있다. ㅡ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 비구들이여, 이것이 식(識)이라고 불린다.


• katamañca, bhikkhave, nāmarūpaṃ? vedanā, saññā, cetanā, phasso, manasikāro — idaṃ vuccati nāmaṃ. cattāro ca mahābhūtā, catunnañca mahābhūtānaṃ upādāyarūpaṃ. idaṃ vuccati rūpaṃ. iti idañca nāmaṃ, idañca rūpaṃ. idaṃ vuccati, bhikkhave, nāmarūpaṃ.


비구들이여, 무엇이 명색(名色)인가? 수(受), 상(想), 사(思), 촉(觸), 작의(作意) ㅡ 이것이 명(名)이라 불린다. 사대(四大)와 사대조색(四大造色) ㅡ 이것이 색(色)이라 불린다. 이렇게 이것이 명(名)이고 이것이 색(色)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명색(名色)이라고 불린다. 


명(名)은 수(受)-상(想)-사(思)-촉(觸)-작의(作意)인데, 사(思)는 행(行)이므로 수(受)-상(想)-행(行)과 촉(觸)-작의(作意)로 나누어집니다. 그러면 명색(名色)은 색(色)-수(受)-상(想)-행(行)과 촉(觸)-작의(作意)입니다. 


그런데 식(識)과 명색(名色)은 서로 조건 됩니다. 그래서 함께하는 하나의 개념으로 이해해야 하는데,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과 촉(觸)-작의(作意)입니다. 즉 누적된 삶으로의 오온(五蘊)과 지금의 작용으로의 촉(觸)-작의(作意)입니다.


※ 식(識)과 명색(名色)의 서로 조건 됨과 윤회의 선언 ㅡ mahānidānasuttaṃ(D15)[대인연경]


• ‘viññāṇapaccayā nāmarūpan’ti – 식(識)을 조건으로 명색(名色)이 있다.

• ‘nāmarūpapaccayā viññāṇan’ti – 명색(名色)을 조건으로 식(識)이 있다.


• ettāvatā vaṭṭaṃ vattati itthattaṃ paññāpanāya yadidaṃ nāmarūpaṃ saha viññāṇena aññamaññapaccayatā pavattati. - 이렇게 하여 윤회가 있고, 금생의 선언이 있다. 즉 명색(名色)이 식(識)과 함께 서로 조건이 되어 나아가는 것이다.


식(識)과 명색(名色)은 


• 누적된 삶의 측면에서는 서로 조건 됨에 의해 명색(名色)은 죽음을 통해 버려지고 식(識) 혼자서 다음 생으로 윤회합니다.


• 지금의 삶의 측면에서는 서로 조건 됨에 의해 인식작용을 진행시켜 식(識)과 수(受)를 생겨나게 합니다. 


이때, 명(名)에 속한 작의(作意)는 새로운 식(識)을 생겨나게 하고 촉(觸)은 새로운 수(受)를 생겨나게 하는 작용입니다. 반면에 수(受)-상(想)-사(思)는 삶의 과정에서 누적된 것 즉 온(蘊)입니다[수온(受蘊)-상온(想薀)-행온(行蘊)].


bālapaṇḍitasuttaṃ (SN 12.19)[우현(愚賢) 경]은


“avijjānīvaraṇassa, bhikkhave, bālassa taṇhāya sampayuttassa evamayaṃ kāyo samudāgato. iti ayañceva kāyo bahiddhā ca nāmarūpaṃ, itthetaṃ dvayaṃ, dvayaṃ paṭicca phasso saḷevāyatanāni, yehi phuṭṭho bālo sukhadukkhaṃ paṭisaṃvedayati etesaṃ vā aññatarena”.


“비구들이여, 무명에 덮이고 갈애에 묶여서 어리석은 자에게 이와 같이 이 몸이 일어난다. 이처럼 이 몸과 밖의 명색(名色)이 있고, 이렇게 여기에 이 쌍이 있고, 쌍을 조건으로 육촉처(六觸處)가 있고, 이들 가운데 어떤 것에 닿아 어리석은 자는 즐거움과 괴로움을 경험한다.”


라고 합니다. 이 경은 samanupassanāsuttaṃ(SN 22.47)[관찰 경]과 연결해서 이해해야 하는데, 존재에 대한 잘못된 관찰이 ‘나는 있다[asmī]’를 사라지지 않게 하고 그때 안근(眼根)-이근(耳根)-비근(鼻根)-설근(舌根)-신근(身根)의 다섯 가지 기능이 삶에 참여한다고 합니다. 즉 몸이 일어난다는 것은 몸이 마음[식(識)]과 만나 삶에 참여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이 경은 식(識) 외에 몸과 밖의 명색으로 쌍(雙)을 구성한다고 말하는 것인데, 식(識)과 몸 그리고 밖의 명색에 의한 쌍(雙)입니다. 


이때 마음 즉 식(識)은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식(意識)의 육식(六識)입니다. 이런 식(識)에 안근(眼根)-이근(耳根)-비근(鼻根)-설근(舌根)-신근(身根)의 다섯 가지 기능으로의 몸이 참여하고, 의식(意識)은 의근(意根)을 겸하여 육근(六根)이 형성됩니다. 그러면 식(識)과 근(根)이 함께한 것으로의 감각주관인 처(處)가 완성되는데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의 육처(六處)-육입(六入)-육내입처(六內入處)입니다.


이런 식(識)과 근(根)이 밖의 명색(名色)과 함께 쌍(雙)을 이룬다는 것인데,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의 육외입처(六外入處)와의 대응관계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이때, 명색(名色)은 명(名)과 색(色)이고, 색(色)은 몸과 몸 밖의 물질입니다. 그러므로 밖의 명색(名色) 즉 몸 밖의 물질과 명(名)이 곧 육외입처(六外入處)와 동일한 것이어서 감각주관인 육내입처와 쌍(雙)을 이루는 감각객관인 것입니다.


특히, 식(識)과 명색(名色)의 서로 조건 됨 가운데 작의(作意)와 촉(觸)은 지금여기의 삶을 진행하는 작용이고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 오온(五蘊)은 누적인 점을 감한하면 밖의 명색(名色)은 색(色)-수(受)-상(想)-행(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이 색(色)이므로 수(受)-상(想)-행(行)은 법(法)으로 대응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경과 유사하게 인식과정을 나타내는 경우로는 imasmiñca saviññāṇake kāye bahiddhā ca sabbanimittesu[식(識)과 함께하는 이 몸과 밖의 모든 상(相)들에서]의 용례가 있습니다. 즉 이 경이 말하는 '몸과 밖의 명색'이 '식(識)과 함께하는 이 몸과 밖의 모든 상(相)들'이라는 표현으로 대체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경이 말하는 '무명-갈애 때문에 일어나는 몸'이 '식(識)과 함께하는 이 몸'이고 '밖의 명색'이 '밖의 모든 상(相)[nimitta]들'인 것입니다. 


이렇게 형성된 ①육내입처-육외입처 또는 ②식(識)-몸과 밖의 명색의 쌍 또는 ③식(識)과 함께하는 이 몸과 밖의 모든 상(相)들은 인식과정입니다. 식(識)이 근(根)[몸]과 함께 육내입처가 되어서 육외입처-밖의 명색-밖의 모든 상(相)들이라는 대상을 인식하는 과정인 것입니다. 육내입처-육외입처로 대표되고, 식(識)-몸-명색(名色)-상(相) 등의 개념을 사용해 그 의미를 자세히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때, 식(識)이 근(根)과 함께 대상을 주목하여 감각해 들이는 작용을 작의(作意) [manasikāra]라고 합니다. 작의는 무명(無明)의 요소 즉 욕탐(欲貪)의 간섭을 받으면 비여리작의(非如理作意)이고, 무명(無明)이 버려져 명(明)이 참여하면 여리작의(如理作意)입니다.


작의(作意)에 의해 인식하면 대상 즉 외입처에 대한 앎이 생겨나는데, 단순한 앎이 아니라 외입처의 앎을 몸통으로 하면서 마음으로서의 활동성을 가지는 새로운 식(識)입니다. → 새끼쳐진 식(識)


식(識)과 명색(名色)이 배분되어 육내입처와 육외입처가 되고 작의(作意)하여 식(識)을 새끼치는 인식 과정을 육입(六入)[saḷāyatana]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새끼쳐진 식(識)은 인식작용의 결과이지만 인식작용과 동시입니다. 지금 작의하고 있는 대상에 대한 앎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입처와 외입처와 식의 세 가지는 동시에 있습니다. 함께 만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 가지가 함께 만나면 비로소 대상인 외입처를 경험하게 되는데, 수(受)입니다. 이때, 세 가지가 함께 만나 수(受)를 생겨나게 하는 작용을 삼사화합(三事和合) 촉(觸)[phassa]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촉(觸)을 조건으로 생겨나는 수(受)는 무명(無明)의 요소의 영향으로 락(樂)-고(苦)-불고불락(不苦不樂)의 세 가지 느낌으로 경험됩니다.


이때, 누적된 삶인 식(識)과 명색(名色)의 배분에 의한 지금의 삶을 육내입처와 육외입처의 쌍에 의한 식(識)의 발생 즉 육입(六入)으로 이해하는 것은 삶에 대한 중요한 이해입니다. 그런데 이런 이해의 타당성은 대인연경(D15)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대인연경은 「식(識)↔명색(名色) → 촉(觸)→수(受)→애(愛)→취(取)→유(有)→생(生)→노사(老死)」의 구지연기(九支緣起)를 설하는데, 명색(名色)과 촉(觸)의 사이에 육입(六入)이 생략된 형태입니다. 그렇다면 식(識)과 명색(名色)이 곧 육입(六入)이어서 육입(六入)을 생략하고 「식(識)↔명색(名色) → 촉(觸)」으로 설명하였다고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관찰 경은 


이렇게 관찰하면 '나는 있다!'가 사라지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나는 있다!'가 사라지지 않으면 안근(眼根), 이근(耳根), 비근(鼻根), 설근(舌根), 신근(身根)이라는 다섯 가지 기능이 [삶에] 참여한다. 비구들이여, 거기에는 의(意)가 있고 법(法)들이 있고 무명(無明)의 요소가 있다.


고 합니다. 


‘나는 있다[asmī]’가 사라지지 않으면 다섯 가지 몸의 기능 즉 몸이 삶에 참여하는데 거기에 의(意)와 법(法) 외에 무명(無明)의 영향을 받는 제3의 요소가 있다는 것입니다.


의(意)는 식(識)이 몸과 함께할 때의 이름입니다. 그래서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식(意識)이 몸과 함께하면서 의근(意根)의 기능을 겸하는 것이 의(意)입니다. 그래서 다섯 가지 기능의 참여와 의(意)의 존재는 육내입처(六內入處)의 형성을 의미합니다. 또한, 다섯 가지 기능의 참여는 대응하는 감각대상인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이 함께하는 것이기 때문에 법(法)의 존재는 육외입처의 형성입니다. 이렇게 몸의 참여와 함께하는 의(意)와 법(法)은 육내입처와 육외입처의 형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함께 있는 무명(無明)의 요소는 무엇입니까?


1차 인식에는 감각의 주관-객관인 육내입처-육외입처 외에 제3의 참여자가 있다는 것인데, 욕탐(欲貪)[chandarāga]이 육내입처와 육외입처에 족쇄로서 참여하는 제3의 요소입니다. 이때, 욕탐(欲貪)은 한 순간 이전의 내면의 상황을 실고 인식작용에 참여하는 것인데, 과거로서 현재에 참여함으로써 삶의 연속성을 부여한다는 특성을 가집니다. 또한, 번뇌(煩惱)-무명(無明)의 영향 하에 있기 때문에 무명(無明)의 요소라고 불리는 것인데, 번뇌(煩惱)-무명(無明)의 강도에 의해 인식의 질(質)을 결정합니다. 


한편, saṃyojaniyasuttaṃ (SN 22.120)[족쇄 경]과 upādāniyasuttaṃ (SN 22.121)[집착 경], saṃyojaniyasuttaṃ (SN 35.92)[족쇄 경]과 upādāniyasuttaṃ (SN 35.93)[집착 경], saṃyojaniyadhammasuttaṃ (SN 35.105)[족쇄에 묶인 인 법 경]과 upādāniyadhammasuttaṃ (SN 35.106)[집착에 묶인 법 경] 등에 의하면, 족쇄 또는 집착에 묶이게 될 법들은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 그리고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와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이고, 족쇄 또는 집착은 욕탐(欲貪)이라고 합니다. 내입처와 외입처를 조건으로 일어나는 욕탐이 누적된 삶으로의 오온(五蘊)과 지금의 삶을 위해 배분된 것으로의 내입처(內入處)와 외입처(外入處)를 묶는 족쇄이고 집착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식주관인 내입처는 욕탐에 묶여서 이치[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부정(不淨)]에 어긋나게 작의 하는데, 비여리작의(非如理作意)입니다. 인식객관인 외입처도 욕탐에 묶여서 왜곡되는데, 상(相)[nimitta]입니다. 즉 상(相)은 욕탐에 의해 왜곡된 외입처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자리를 '식(識)과 함께하는 이 몸과 밖의 모든 상(相)들'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 밖의 모든 상(相)들 : 색상(色相)-성상(聲相)-향상(香相)-미상(味相)-촉상(觸相)-법상(法相)


[참고] 교리문답의 큰 경(M43)은 탐(貪)도 진(嗔)도 치(癡)도 상(相)을 만든다고 하는데, 탐진치(貪嗔癡)를 실고 인식에 참여하는 욕탐의 역할입니다. 


이렇게 내입처(內入處)가 욕탐(欲貪)의 간섭 하에 외입처(外入處)를 인식하면 외입처의 앎을 몸통으로 하고 마음으로의 활동성을 가지는 식(識)을 새끼칩니다. 그리고 내입처-외입처-새끼쳐진 식의 삼사화합(三事和合)이 촉(觸)이고, 촉(觸)을 조건으로 락(樂)-고(苦)-불고불락(不苦不樂)의 느낌이 경험됩니다[수(受)]. 1차 인식은 이렇게 식(識)과 수(受)라는 두 가지 결과를 만듭니다. 


1차 인식이 두 가지 결과를 만든다는 것은 주목해야 합니다. 수행(修行)의 측면에서 감각기능이 단속이 이 두 가지의 단속을 지시하고, 사념처(四念處)의 신념처(身念處)[호흡]과 수념처(受念處)가 이 두 가지를 대상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1차 인식의 결과

()

()

기능의 단속

()을 붙잡지 않음

뒤따르는 수()를 붙잡지 않음

사념처(四念處)

신념처(身念處)[호흡]

수념처(受念處)

 



• [참고] 기능의 단속


“kathañca, mahārāja, bhikkhu indriyesu guttadvāro hoti? idha, mahārāja, bhikkhu cakkhunā rūpaṃ disvā na nimittaggāhī hoti nānubyañjanaggāhī. yatvādhikaraṇamenaṃ cakkhundriyaṃ asaṃvutaṃ viharantaṃ abhijjhā domanassā pāpakā akusalā dhammā anvāssaveyyuṃ, tassa saṃvarāya paṭipajjati, rakkhati cakkhundriyaṃ, cakkhundriye saṃvaraṃ āpajjati. sotena saddaṃ sutvā ... pe ... ghānena gandhaṃ ghāyitvā ... pe ... jivhāya rasaṃ sāyitvā ... pe ... kāyena phoṭṭhabbaṃ phusitvā ... pe ... manasā dhammaṃ viññāya na nimittaggāhī hoti nānubyañjanaggāhī. yatvādhikaraṇamenaṃ manindriyaṃ asaṃvutaṃ viharantaṃ abhijjhā domanassā pāpakā akusalā dhammā anvāssaveyyuṃ, tassa saṃvarāya paṭipajjati, rakkhati manindriyaṃ, manindriye saṃvaraṃ āpajjati. so iminā ariyena indriyasaṃvarena samannāgato ajjhattaṃ abyāsekasukhaṃ paṭisaṃvedeti. evaṃ kho, mahārāja, bhikkhu indriyesu guttadvāro hoti.


대왕이여, 어떻게 비구는 기능들에서 문을 보호하는가? 대왕이여, 여기 비구는 안(眼)으로 색(色)을 보면서 상(相)을 붙잡지 않고 뒤따르는 수(受)를 붙잡지 않는다. 만약 안근(眼根)을 제어하여 머물지 않으면 간탐(慳貪)과 고뇌(苦惱)와 악한 불선법(不善法)들이 흘러들어 올 것이므로, 그는 단속하기 위해 수행하고, 안근(眼根)을 보호하고, 안근(眼根)에서 단속한다. 이(耳)로 성(聲)을 들으면서 … 비(鼻)로 향(香)을 맡으면서 … 설(舌)로 미(味)를 맛보면서 … 신(身)으로 촉(觸)을 느끼면서 … 의(意)로 법을 인식하면서 상(相)을 붙잡지 않고 뒤따르는 수(受)를 붙잡지 않는다. 만약 의근(意根)을 제어하여 머물지 않으면 간탐(慳貪)과 고뇌(苦惱)와 악한 불선법(不善法)들이 흘러들어 올 것이므로, 그는 단속하기 위해 수행하고, 의근(意根)을 보호하고, 의근(意根)에서 단속한다. 그는 이러한 성스러운 기능의 단속을 갖추어 안으로 [탐(貪)이] 뿌려지지 않는 행복을 경험한다. 대왕이여, 이렇게 기능들에서 문을 보호한다.   <사문과경(D2)> 등

                               

한편, 식(識)의 작용에 대해서는 두 가지의 정의가 있습니다. 


• khajjanīyasuttaṃ (SN 22.79)[삼켜버림 경]


kiñca, bhikkhave, viññāṇaṃ vadetha? vijānātīti kho, bhikkhave, tasmā ‘viññāṇan’ti vuccati. kiñca vijānāti? ambilampi vijānāti, tittakampi vijānāti, kaṭukampi vijānāti, madhurampi vijānāti, khārikampi vijānāti, akhārikampi vijānāti, loṇikampi vijānāti, aloṇikampi vijānāti. vijānātīti kho, bhikkhave, tasmā ‘viññāṇan’ti vuccati.


비구들이여, 그러면 왜 식(識)이라 부르는가? 인식한다[분별해서 안다]고 해서 식(識)이라고 한다. 그러면 무엇을 인식하는가? 시다고 인식하고 쓰다고 인식하고 맵다고 인식하고 달다고 인식하고 떯다고 인식하고 떫지 않다고 인식하고 짜다고 인식하고 싱겁다고 인식한다. 비구들이여, 이처럼 인식한다고 해서 식(識)이라고 한다.


• mahāvedallasuttaṃ (MN 43)[교리문답의 큰 경]


“‘viññāṇaṃ viññāṇan’ti, āvuso, vuccati. kittāvatā nu kho, āvuso, viññāṇanti vuccatī”ti? “‘vijānāti vijānātī’ti kho, āvuso, tasmā viññāṇanti vuccati. “kiñca vijānāti? sukhantipi vijānāti, dukkhantipi vijānāti, adukkhamasukhantipi vijānāti. ‘vijānāti vijānātī’ti kho, āvuso, tasmā viññāṇanti vuccatī”ti. 


“도반이여, ‘식(識), 식(識)’이라고 부릅니다. 도반이여, 왜 식(識)이라고 부릅니까?” “도반이여, 인식한다, 인식한다.‘라고 해서 식(識)이라고 부릅니다. 무엇을 인식합니까? 락(樂)이라고 인식하고, 고(苦)라고 인식하고, 불고불락(不苦不樂)이라고 인식합니다. 도반이여, 인식한다, 인식한다.‘라고 해서 식(識)이라고 부릅니다.”


하나의 경에서는 맛을 인식한다고 하는데, 외입처에 대한 인식입니다. 그리고 다른 경에는 수(受)를 인식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누적된 식(識)이 몸과 함께 외입처를 인식하면 새끼쳐진 식(識)과 수(受)가 동시에 생깁니다. 그렇다면 교리문답의 큰 경이 말하는 수(受)를 인식하는 식(識)은 새끼쳐진 식(識)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두 개의 경전이 메커니즘적 전개의 순서대로 식(識)의 두 가지 인식작용을 정의해주는 것입니다. 즉 누적된 식(識)에 의한 1차 인식과 새끼쳐진 식(識)에 의한 2차 인식입니다.


이렇게 삶은 1차 인식에서 식(識)과 수(受)를 만든 후 식(識)과 수(受)에 의한 2차 인식으로 전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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