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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재]【삶의 메커니즘 - ②takka[애(愛)의 형성 과정]】

0 973 2018.02.24 20:59

【삶의 메커니즘 - ②takka[애(愛)의 형성 과정]】


• 2차 인식 : 심(心)의 형성과정[심행(心行)=상(想)-수(受)] ㅡ 무명(無明)과 탐(貪)으로써 심(心)의 몸통을 설명. ⇒ 「사마타 → 이탐(離貪)[탐(貪)의 제거] → 심해탈(心解脫), 위빳사나 → 소멸(消滅)[무명(無明)의 제거] → 혜해탈(慧解脫)」의 근거가 됨.


• 심(心)의 내적 활동 : 애(愛)의 형성 과정 ㅡ 심(心)의 활동을 설명. ⇒ 「사념처(四念處) → 여실지견(如實知見) → 염오(厭惡)[nandi의 제거] → upasama[들뜸의 가라앉음] → 실다운 지혜」의 근거가 됨.


지금의 삶의 시작자리에서 의(意)[식(識) with 몸]은 1차 인식하여 알갱이로의 식(識)을 새끼치고 이어지는 동시에 수(受)를 만듭니다. 그러면 삶은 2차 인식으로 전개되는데, 몸통은 외입처의 앎이지만 구체적으로는 마음인 식(識)의 활동입니다. 단지 정적(靜的)인 앎이 아니라 동적(動的)인 마음이기 때문에 가지는 활동성인 것입니다. 


2차 인식은 식(識)이 상(想)의 간섭 아래 수(受)를 인식하는 것인데, 상(想)의 병듦 즉 번뇌[루(漏)]의 영향 때문에 무명(無明)과 탐(貪) 또는 진(嗔)을 만듭니다. 번뇌의 단계적 간섭으로 무명(無明)과 탐(貪) 또는 진(嗔)이 순서적으로 생기는데, 1차 인식의 결과로 식(識)과 수(受)가 생기는 것과 같은 과정입니다.


이때, 무명(無明)과 탐(貪) 또는 진(嗔)은 수(受)에 대한 왜곡된 앎입니다. 외입처가 욕탐 때문에 상(相)[nomitta]으로 왜곡 인식되듯이 수(受) 또한 번뇌의 영향으로 무명(無明)과 탐(貪) 또는 진(嗔)으로 왜곡 인식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명(無明)은 수(受)가 지속되는 것, 상(常)한 것이라는 왜곡된 앎이고, 탐(貪)은 지속되기 때문에 붙잡아야 하는 락(樂)의 수(受)라는 왜곡된 앎입니다. 마찬가지로 진(嗔)은 지속되기 때문에 밀쳐내야 하는 고(苦)의 수(受)라는 왜곡된 앎입니다. 그리고 번뇌[루(漏)]와 무명(無明)은 합해서 치(癡)라고 부릅니다. 심(心)의 오염원인 탐진치(貪嗔癡)는 이렇게 정의됩니다. 그리고 탐진치(貪嗔癡)의 상태는 유위(有爲)입니다.


1차 인식과 2차 인식의 과정을 포괄하면, 외입처의 앎을 몸통으로 하는 새끼쳐진 식(識)이 상(想)과 수(受)의 과정을 통해 무명(無明) 위에 있는 탐(貪) 또는 진(嗔)을 만드는 과정입니다. 그런데 1~2차 인식의 포괄된 과정은 인식입니다. 인식과정을 통해 [외입처의 앎+탐(貪)]이라는 포괄적 앎[지(知)]를 만드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외입처의 앎을 몸통으로 하는 식(識)이 탐(貪)으로 몸집을 부풀려 앎[외입처의 앎+탐(貪)]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식(識)이 몸집을 부풀린 것으로의 앎을 심(心)이라고 부릅니다. 심(心)은 이렇게 식(識)이 몸집을 부풀린 것으로의 앎을 몸통으로 하는 마음입니다. 인식의 결과로 완성된 마음이고, 행위 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업(業)은 「심(心)을 원인으로 하는 신(身)-구(口)-의(意)의 행위」라고 정의됩니다.


이런 과정으로 심(心)이 생기는 과정을 심행(心行) 즉 심(心)의 형성작용[심(心)을 형성하는 작용]이라고 합니다. 구체적으로는 식(識)이 상(想)과 수(受)의 과정을 통해 심(心)을 형성하기 때문에 「심행(心行)=상(想)-수(受)」입니다. 심(心)이라는 본질적인 마음[참된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식(識)이 몸집을 부풀리는 과정에서 조건적으로 형성되는 심(心)의 과정인 것입니다. 십이연기(十二緣起)의 두 번째 지분인 행(行)은 신행(身行)-구행(口行)-심행(心行)으로 구성되는데, 여기서 심행(心行)이 상(想)과 수(受)라는 정의가 바로 이 내용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청정도론(淸淨道論)의 저자인 붓다고사 스님은 맛지마 니까야의 주석서인 멸희론소(滅戱論疏)[Pps. = Papañcasūdanī]에서 심행(心行)을 심(心)이 상(想)과 수(受)를 형성하는 작용이라고 반대로 해석하였습니다. 붓다고사 스님 이래로 불교가 부처님 설하신 바대로의 삶의 현실에서 벗어나 추상화되고 형이상(形而上)화 하는 이유가 되는 해석의 오류입니다. 근본경전연구회-해피법당이 선언한 「부처님 가르침의 진정(眞正) 찾기」는 바로 이 오류의 발견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어쨌든 심(心)은 이렇게 식(識)의 부풀림 상태 즉 [식(識)+탐(貪)]입니다. 「지속되기 때문에 붙잡아야 하는 락(樂)의 수(受)라는 왜곡된 앎[탐(貪)]」이 몸통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왜곡은 심(心)에게 붙잡는 행위를 유발시키는데, 「즐기고 환영하고 묶여 있음으로써 nandi[즐김]을 생기게 함」이라는 심(心)의 내적 활동 과정입니다. 탐(貪)으로 부풀려져 심(心)이 된 식(識)이 nandi를 만들어 한 번 더 부풀려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nandi와 함께한 심(心) 즉 「nandi와 탐(貪)과 함께한 식(識)」을 애(愛)라고 부릅니다. 


※ 애(愛)는 nandi와 탐(貪)의 함께함 즉 식(識)을 부풀리는 것들만을 지칭하기도 합니다.


번뇌 또는 무명의 영향 위에 있는 중생에게 식(識)은 이렇게 두 번 부풀려져서 애(愛)가 됩니다. 그래서 그 과정의 영역인 takka는 「애(愛)의 형성 과정」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takka의 영역에서 형성된 애(愛)는 업(業)의 오염된 원인이어서 고(苦)를 유발합니다. 즉 사성제(四聖諦)의 고집성제(苦集聖諦)입니다.


한편, 이 과정은 높은 수행의 영역을 이해하기 위한 근거가 됩니다. 특히, 즐기지 않고 환영하지 않고 묶여 있지 않으면 nandi가 생기지 않는데, 이런 수행 과정을 염오(厭惡)라고 합니다. 


염오(厭惡) 즉 심(心)의 내적 활동을 단속하여 완전히 가라앉히면[upasama] 심(心)의 형성상태가 드러납니다. 이런 성취 수준의 지혜[paññā]를 실다운 지혜[abhiññā]라고 합니다. 그러면 실다운 지혜로 심(心)의 형성과정의 문제[존재에 내재한 불만족]을 해소하게 되는데, 마음을 닦음으로써 이탐(離貪)[탐(貪)의 제거]하여 심해탈(心解脫)하는 사마타와 지혜를 닦음으로써 소멸(消滅)[무명(無明)의 제거]하여 혜해탈(慧解脫)하는 위빳사나입니다. 


그래서 심오한 영역을 설명하는 사성제(四聖諦)는 사마타-위빳사나로써 유애(有愛)와 무명(無明)을 버림으로써 해탈(解脫)과 명(明)을 실현한다고 하는데, 심해탈(心解脫)-혜해탈(慧解脫)에 의한 부동(不動)의 심해탈(心解脫)입니다. 형성과정에서 존재에 내재한 불만족을 해소함으로써 삶을 완성하는 수행입니다.


• 2차 인식 : 심(心)의 형성과정[심행(心行)=상(想)-수(受)] ㅡ 무명(無明)과 탐(貪)으로써 심(心)의 몸통을 설명. ⇒ 「사마타[심(心)을 닦음] → 이탐(離貪)[탐(貪)의 제거] → 심해탈(心解脫), 위빳사나[혜(慧)를 닦음] → 소멸(消滅)[무명(無明)의 제거] → 혜해탈(慧解脫)」


• 심(心)의 내적 활동 : 애(愛)의 형성 과정 ㅡ 심(心)의 활동을 설명. ⇒ 「사념처(四念處) → 여실지견(如實知見) → 염오(厭惡)[nandi의 제거] → upasama[들뜸의 가라앉음] → 실다운 지혜」


※ 「즐기고 환영하고 묶여 있음[nābhinandati nābhivadati nājjhosāya tiṭṭhati]」은 삶의 이해에 있어 가장 중요한 자리 중의 하나입니다. 관련 경전을 소개합니다.


1. ‘즐기고 환영하고 묶여 있으면 nandi가 생긴다.’라고 말하는 경전들

  ㅡ abhinandato abhivadato ajjhosāya tiṭṭhato uppajjati nandī.


; mahātaṇhāsaṅkhayasuttaṃ (MN 38), puṇṇovādasuttaṃ (MN 145), samādhisuttaṃ (SN 22.5), paṭhamamigajālasuttaṃ (SN 35.46), dutiyamigajālasuttaṃ (SN 35.47), puṇṇasuttaṃ (SN 35.71)


2. '즐기고 환영하고 묶여 있으면'의 중요성을 강조한 경전들


1) <단속 경(S35:98)> 


만일 비구가 그것을 즐기고 환영하고 묶여있으면 그 비구는 이렇게 알아야 한다. '나는 유익한 법들로부터 쇠퇴한다. 왜냐하면 세존께서는 이런 것을 쇠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라고. 비구들이여, 이것이 단속하지 못함이다.


만일 비구가 그것을 즐기지 않고 환영하지 않고 묶여있지 않으면 그 비구는 이렇게 알아야 한다. '나는 유익한 법들로부터 쇠퇴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세존께서는 이런 것을 쇠퇴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라고. 비구들이여, 이것이 단속이다.


2) <마라의 덫 경(S35:114)>


만일 비구가 그것을 즐기고 환영하고 묶여 있으면 이를 일러 비구는 마라의 소굴로 들어갔다, 마라의 지배를 받는다, 마라의 덫에 걸렸다고 한다. 그는 마라의 속박에 묶여버려 마라 빠삐만이 원하는 대로 하게 된다.


만일 비구가 그것을 즐기지 않고 환영하지 않고 묶여 있지 않으면 이를 일러 비구는 마라의 소굴로 들어가지 않았다, 마라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마라의 덫에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마라의 속박에서 풀려나 마라 빠삐만이 원하는 대로 하지 않게 된다.


3. <어부 비유 경(S35:230)>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낚시꾼이 미끼가 달린 낚싯바늘을 깊은 물속에 던지면 미끼를 발견한 어떤 물고기가 그것을 삼키는 것과 같다. 그러면 낚시꾼의 낚싯바늘을 삼킨 그 물고기는 곤경에 처하고 재앙에 처하게 되며, 낚시꾼은 자기가 하고자 하는 대로 할 수 있게 된다.


만일 비구가 그것을 즐기고 환영하고 묶여 있으면 이를 일러 비구는 마라의 낚싯바늘을 삼켜버렸다고 한다. 그는 곤경에 처했고 재난에 처했으며, 마라 빠삐만은 그를 가지고 원하는 대로 하게 된다.


만일 비구가 그것을 즐기지 않고 환영하지 않고 묶여 있지 않으면 이를 일러 비구는 마라의 낚싯바늘을 삼키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곤경에 처하지 않았고 재난에 처하지 않았으며, 마라 빠삐만은 그를 가지고 원하는 대로 하지 못한다.


3. 「만일 비구가 그것을 즐기고 환영하고 묶여 있으면 그가 그것을 즐기고 환영하고 묶여 있기 때문에 그의 식(識)은 그것을 의지하고 그것을 집착한다.[Tañce bhikkhu abhinandati abhivadati ajjhosāya tiṭṭhati. Tassa taṃ abhinandato abhivadato ajjhosāya tiṭṭhato tannissitaṃ viññāṇaṃ hoti tadupādānaṃ.] 신들의 왕이여, 집착이 있는 비구는 완전한 열반에 들지 못한다.」라고 설하는 경전들


; 삭카의 질문 경(S35:118)-빤짜시까의 경(S35:119)-웨살리 경(S35:124)-왓지 경(S35:125)-날란다 경(S35:126)-소나 경(S35:128)-나꿀라삐따 경(S35:131)


식의 의지와 집착.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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