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사회참여/외부특강 > 학술세미나

학술세미나

[교재] 십이연기(十二緣起)[중(中) → 고(苦)] 약술

0 855 2018.02.24 22:02

십이연기(十二緣起)[중(中) → 고(苦)] 약술


부처님 가르침은 이렇게 이해됩니다. ㅡ ‘사실에 괴리된 삶은 괴로움을 만들고[고(苦)], 사실에 부합한 삶은 행복을 만든다[고멸(苦滅)].’


이때, 사실은 존재 일반의 조건 관계의 측면에서는 삼법인(三法印)[제행무상(諸行無常)-제행개고(諸行皆苦)-제법무아(諸法無我)]이고, 괴로움의 발생의 조건 관계의 측면에서는 연기(緣起) 즉 십이연기(十二緣起)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법(法)]은 원래 있는 것[아(我)]가 아니라 생겨난 것입니다[무아(無我)]. 그 중에 열반(涅槃)을 제외한 나머지[행(行)]은 조건적입니다. 조건에 의해서 생겨났기 때문에 조건이 달라지면 따라서 달라져야 하는 것이고[무상(無常)], 조건의 다양함 때문에 원하는 결과를 만들지 못합니다[고(苦)].


• 노사(老死) ← 생(生)


원하는 결과를 만들지 못함 즉 불만족으로의 고(苦)는 나의 삶에서도 관찰됩니다. 생(生)-노사(老死)-수비고우뇌(愁悲苦憂惱) 등 일체 괴로움의 무더기입니다. 태어남이라는 불만족의 상황 때문에 늙고 죽고 그 삶의 과정에서 슬픔-비탄-고통-고뇌-절망 등 다양한 괴로움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태어나지 않으면 늙음-죽음과 슬픔-비탄-고통-고뇌-절망 등 다양한 괴로움을 겪지 않게 됩니다. 태어남이 버려져야 하는 이유입니다.


• 생(生) ← 유(有)


그러면 왜 태어나는 것입니까? 그것은 현실의 문제입니다. 중생(衆生)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삶의 현실인 것입니다. 중생은 유신(有身)이라고 정의됩니다. 몸과 함께하는 상태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유신(有身)은 곧 오취온(五取蘊)[색취온(色取蘊)-수취온(受取蘊)-상취온(想取蘊)-행취온(行取蘊)-식취온(識取蘊)]이어서 마음[식(識)]이 몸[색(色)]과 함께하는 상태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①마음인 식(識)과 ②몸인 색(色)을 포함하는 명색(名色)이 함께한 상태입니다. 이런 상태를 존재[유(有)]라고 하는데, 욕계중생(慾界衆生)-색계중생(色界衆生)-무색계중생(無色界衆生)[욕유(慾有)-색유(色有)-무색유(無色有)]로 구분됩니다.


식(識)과 명색(名色)으로 구성된 존재[유(有)]이기 때문에 식(識)과 명색(名色)의 관계에 지배되는데, 서로 조건 됨입니다. 식(識)이 있다는 것은 명색(名色)이 함께한다는 것이고, 명색(名色)이 있다는 것은 식(識)이 함께하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서로 조건 되는 식(識)과 명색(名色)은 생존기간의 불균형을 보여줍니다. 식(識)은 수명의 한계가 특정되지 않는데 반해 명색(名色)은 색(色) 즉 몸을 포함하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100년 안팎의 수명의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몸의 수명의 한계 안에서는 식(識)과 명색(名色)이 함께하여 ‘나’를 구성하고 살아가지만, 몸의 수명이 다하면 명색(名色)은 버려지고 수명의 한계가 특정되지 않는 식(識)은 서로 조건 됨의 관계 때문에 새로운 몸 새로운 명색(名色)과 만나 새로운 ‘나’를 구성하여 새로운 몸과 함께하는 존재[유(有)]로서의 새로운 삶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식(識)은 지난 삶의 과정에서 누적된 것과 지금 삶의 과정을 사는 것의 두 가지가 있습니다. 지금 삶의 과정을 사는 식(識)은 ①생겨나고, ②삶의 과정을 통해 변화하고 ③그 결과로 중생 세상[욕계(慾界)-색계(色界)-무색계(無色界)]에 머뭅니다. 이렇게 지금 삶의 결과로 머문 식(識)은 같은 과정의 과거 삶을 통해 머문 식(識)들이 쌓여 있는 무더기에 더해집니다. 식(識)의 무더기 즉 식온(識蘊)은 이런 방법으로 삶의 순간순간 달라집니다. 이런 방법으로 식(識)이 머물고 증장하면 변화된 식온(識蘊)에 상응하여 변화된 명색(名色)이 참여합니다. 지금의 삶을 통해 변화한 새로운 식(識)과 명색(名色)으로 구성된 새로운 존재[유(有)]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런 존재[유(有)]는 몸이 유지되는 동안에는 식(識)과 명색(名色)의 변화 과정으로 살아갑니다[무아(無我)]. 그러다 몸이 죽으면 몸 따라 죽지 못하는 식(識)은 새로운 몸 새로운 명색(名色)과 함께 새로운 존재[유(有)]가 되어 삶을 이어갑니다[윤회(輪廻)].


그러고 보면 존재[유(有)]는 무아(無我)와 윤회(輪廻)라는 두 개념을 연결해 주는데, 식(識)의 머묾이란 사건에 수반되는 누적된 식(識)의 변화를 주제로 설명됩니다. 식(識)이 머무는 현상 때문에 변화하는 과정으로의 존재[유(有)]가 선언되고, 몸의 유지 여부에 따라 무아(無我)와 윤회(輪廻)라는 두 개념을 연장선상에서 설명해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식(識)이 머물지 않아서 누적된 식(識)의 변화 과정을 중지시키면 중생으로의 존재[유(有)]는 선언되지 않을 것인데, 윤회에서 벗어남의 실천과정인 수행(修行)의 중심 주제입니다.


• 유(有) ← 취(取) ← 애(愛)


그러면 식(識)은 왜 머무는 것입니까? 보(報)를 초래하는 업(業) 때문입니다. 업(業)은 「심(心)을 원인으로 하는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입니다. 이때, 심(心)이 오염원들 즉 탐진치(貪嗔癡)와 함께하면 심(心)을 원인으로 하는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도 오염됩니다. 그리고 오염된 업(業)은 과(果)와 보(報)를 초래합니다.


과(果)와 보(報)를 초래하는 오염된 업(業)은 식(識)을 머물게 합니다. 이렇게 오염된 업(業)을 집착[취(取)]라고 하는데, 소유의 집착-견해의 집착-계율과 의례의식의 집착-아(我)에 대한 교리의 집착[욕취(慾取)-견취(見取)-계금취(戒禁取)-아어취(我語取)]입니다. 또한, 집착[취(取)]는 원인인 심(心)의 오염 상태인 갈애[애(愛)]를 조건으로 하는 업(業)입니다.


※ 애(愛)가 ‘식(識)-탐(貪)-nandi’이기도 하고 ‘탐(貪)-nandi’이기도 한 것처럼 취(取)도 ‘행위-오염’이기도 하고 ‘오염’이기도 합니다. ‘식(識)-탐(貪)-nandi’와 ‘행위-오염’은 메커니즘적으로 몸통과 수반된 것을 함께 나타내는 경우이고, ‘탐(貪)-nandi’와 ‘오염’은 상황의 필요에 의해 몸통은 배제하고 수반된 것만을 제한적으로 말하는 경우입니다. 경이 설해진 상황에 따라 구분해서 해석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애(愛)를 조건으로 하는 취(取) 때문에 식(識)은 머물고 존재[유(有)]의 변화를 이끌게 됩니다.


• 애(愛) ← [takka] ← 수(受)


취(取)의 조건인 애(愛)는 욕애(慾愛)-유애(有愛)-무유애(無有愛)[소유의 갈애-존재의 갈애-존재않음의 갈애]로 분류됩니다. 또는 욕애(慾愛)-색애(色愛)-무색애(無色愛)[욕계의 갈애-색계의 갈애-무색계의 갈애]로 분류되기도 합니다.


그러면 갈애[애(愛)]는 어떻게 생기는 것입니까? 갈애[애(愛)]의 형성과정은 takka라는 영역에 의해서 설명됩니다. 지금 삶의 과정을 사는 식(識)이 생겨나서 같이 생기는 경험[수(受)]를 인식하는 과정을 통해 몸집을 부풀리면 심(心)이 되는데, 심(心)이 다시 몸집을 부풀리면 애(愛)가 됩니다. 즉 식(識)이 두 번 몸집을 부풀려서 오염된 업(業)[취(取)]의 원인으로의 자격을 갖추면 애(愛)가 되는 이것이 갈애[애(愛)]의 형성과정이고 이 형성의 영역을 takka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영역에는 식(識)과 수(受)만이 포함되는 것이 아닙니다. 식(識)이 수(受)를 인식할 때 제3자인 상(想)이 간섭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식(識)이 상(想)의 간섭 가운데 수(受)를 인식함으로써 몸집을 부풀려 심(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애의 형성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식(識)과 수(受) 그리고 상(想)의 세 가지를 알아야 합니다.


• 유(有) → 식(識)↔명색(名色)


먼저, 식(識)과 수(受)는 함께 생기는데, 식(識)과 명색(名色)의 서로 조건 됨에 의한 존재[유(有)]로부터 시작됩니다. 


식(識)은 과거 삶의 과정에서 머문 식(識)들의 누적이어서 ①한순간 삶의 기억을 몸통으로 하고, ②의도-기대를 속성으로 하며, ③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식(意識)의 육식(六識)으로 구성됩니다.


명색(名色)은 사대(四大)와 사대조색(四大造色)인 색(色)과 수(受)-상(想)-사(思)-촉(觸)-작의(作意)로 구성된 명(名)의 결합입니다. 이때, 사(思)는 오온(五蘊)의 행(行)이어서 명(名)은 수(受)-상(想)-행(行)-촉(觸)-작의(作意)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명색(名色)은 색(色)-수(受)-상(想)-행(行)의 네 가지 온(蘊)과 촉(觸)-작의(作意)로 구성됩니다.


그런데 식(識)과 명색(名色)은 서로 조건 됩니다. 그래서 식(識)과 명색(名色)은 항상 함께 있습니다. 그래서 식(識)-수(受)-상(想)-행(行)-색(色) 즉 오온(五蘊)과 촉(觸)-작의(作意)가 함께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오온(五蘊)은 삶의 누적으로의 오취온(五取蘊) 즉 유신(有身)인 ‘나’입니다. 그리고 촉(觸)과 작의(作意)는 지금 삶을 전개하는 작용입니다. 따라서 식(識)과 명색(名色)은 누적된 삶으로의 ‘나’ 즉 오취온(五取蘊)과 오취온(五取蘊)에 의한 지금 삶의 전개를 합한 개념입니다.


이렇게 식(識)과 명색(名色)의 서로 조건 됨은 누적된 삶으로의 나와 지금 삶의 출발자리를 포괄합니다. 그런 가운데 지금 삶의 출발은 구분해서 독립적으로 설명됩니다. 


• 식(識)↔명색(名色) → 육입(六入)


식(識)은 지금 인식해야 하는 대상 즉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에 대응하여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식(意識)의 육식(六識)으로 배분됩니다. 색(色)은 몸을 구성하는 물질과 몸 밖의 물질로 배분되는데, 안근(眼根)-이근(耳根)-비근(鼻根)-설근(舌根)-신근(身根)의 오근(五根)과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의 소유의 대상입니다. 식(識)은 다시 의근(意根)으로도 역할 하여 육근(六根)을 구성합니다. 이때 식(識)과 근(根)이 함께한 감각주관을 처(處) 또는 입(入) 또는 입처(入處)라고 하여 육내입처(六內入處)가 구성됩니다. 그리고 남아 있는 수(受)-상(想)-행(行)은 법(法)으로 포괄되어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의 육외입처(六外入處)를 구성합니다. 이렇게 육내입처(六內入處)가 육외입처(六外入處)를 감각해 분별하는 인식작용이 설명됩니다. 이때, 내입처(內入處) 즉 식(識)이 근(根)과 함께 외입처(外入處)를 주목하여 감각하는 작용을 작의(作意)라고 합니다. 


한편, 인식작용은 식(識)-수(受)-상(想)에 의한 인식작용을 포함해 두 단계로 진행됩니다. 그래서 여기의 인식작용은 ‘1차 인식’, 식(識)-수(受)-상(想)에 의한 인식작용은 ‘2차 인식’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그런데 1차 인식 또한 2차 인식과 마찬가지로 내입처(內入處)와 외입처(外入處)의 양자 간에 진행되는 것은 아닙니다. 무명(無明)의 요소라고 불리는 욕탐(欲貪)이 간섭하여 3자간에 이루어지는데, 욕탐(欲貪)은 이전 순간의 행위 과정을 실고 지금 삶의 1차 인식에 참여함으로써 삶의 연속성을 확보합니다[과거와 현재의 연결 → 작은 순환 고리]. 이때, 제3자의 간섭이 무명(無明)의 요소이면 비여리작의(非如理作意), 명(明)의 요소이면 여리작의(如理作意)라고 하는데, 무명의 요소의 간섭이 인식작용의 질을 결정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차 인식의 결과는 외입처의 앎입니다. 작의(作意)한 대상에 대한 분별된 앎입니다. 즉 내입처(內入處)가 욕탐(欲貪)의 간섭 가운데 외입처(外入處)를 작의(作意)하면 외입처에 대한 앎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앎은 단순한 앎이 아닙니다. 외입처의 앎을 몸통으로 하는 새로운 식(識) 즉 마음입니다. 내입처 즉 누적된 식(識)이 몸과 함께 외입처를 인식하여 외입처의 앎을 몸통으로 하는 새로운 식(識) 알갱이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식(識)을 새끼 쳐진 식(識)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내입처(內入處)-외입처(外入處)-욕탐(欲貪)에 의해 식(識)을 새끼치는 과정을 육입(六入)이라고 부릅니다. 


• 육입(六入) → 촉(觸) → 수(受)


1차 인식의 과정과 결과 즉 내입처와 외입처 그리고 새끼 쳐진 식(識)은 동시입니다. 새끼쳐진 식(識)의 몸통이 지금 작의(作意)하고 있는 대상에 대한 앎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입처-외입처-새끼 쳐진 식(識)은 함께 만나는데, 삼사화합(三事和合)이라 부르는 이 현상이 촉(觸)입니다. 그리고 촉(觸)하면 수(受)가 생깁니다. 내입처가 외입처를 주목하면 ①외입처가 무언지 알고[식(識)], ②외입처의 인식에 따르는 락(樂)-고(苦)-불고불락(不苦不樂)의 느낌을 경험하는 것[수(受)]입니다.


이렇게 식(識)과 수(受)는 1차 인식의 두 결과입니다. 그리고 넓은 측면에서는 식(識)과 명색(名色)의 서로 조건 됨에 의한 누적된 삶이 만드는 지금 삶의 두 결과입니다.


• 수(受) → [takka] → 애(愛)


반면에 상(想)은 행위에서 생깁니다. 보(報)를 초래하는 업(業) 때문에 식(識)이 머물 때 상(想)도 함께 잠재합니다. 지금 삶에서 잠재하는 상(想)의 누적이어서 상온(想薀)입니다. 그리고 상온(想薀) 중에서 선택된 상(想)이 2차 인식의 과정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 잠재 순환 고리


그리고 이렇게 알려지는 식(識)이 상(想)-수(受)의 과정 즉 2차 인식을 통해 몸집을 부풀려서 심(心)이 되고, 심(心)은 한 번 더 몸집을 부풀려 갈애[애(愛)]가 형성되는 것인데, 이 과정을 포괄하는 영역이 takka입니다.


• 십지연기(十支緣起)


이런 서술에 의하면, 삶은 애(愛)의 형성 과정인 takka를 중심에 두고 takka에 입력되는 식(識)-수(受)-상(想)의 형성 과정과 takka에서 출력되는 애(愛) 이후의 과정으로 설명됩니다. 


즉, 식(識)과 명색(名色)의 서로 조건 됨에 의해서 육입(六入)이 있고, 육입(六入)을 조건으로 촉(觸)이, 촉(觸)을 조건으로 수(受)가, 수(受)를 조건으로 takka의 과정을 거쳐 애(愛)가, 애(愛)를 조건으로 취(取)가, 취(取)를 조건으로 유(有)가 있고, 유(有)를 구성하는 새로운 식(識)과 명색(名色)의 서로 조건 됨에 의해 ①몸이 유지 되는 동안은 다시 식(識)과 명색(名色)으로 이어져 이 과정을 순환적으로 반복하고[무아(無我) → 큰 순환 고리], ②몸이 죽으면 새로운 명색(名色)과 만나 태어나기 때문에[윤회(輪廻)] 유(有)를 조건으로 생(生)이, 생(生)을 조건으로 노사(老死), 수비고우뇌(愁悲苦憂惱) 등 일체 고온(苦蘊)의 일어남으로 정리됩니다.


이런 정리를 순환적 반복을 배제하고 순서를 배열하면, 「③식(識)↔④명색(名色)→⑤육입(六入)→⑥촉(觸)→⑦수(受)→⑧애(愛)→⑨취(取)→⑩유(有)→⑪생(生)→⑫노사(老死)」의 십지연기(十支緣起)가 성립하게 됩니다.


• 연기(緣起)하는 식(識)의 윤회(輪廻)


이 과정 즉 십지연기(十支緣起)는 식(識)을 중심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①과거 삶의 누적인 식(識)이 몸과 함께 대상을 인식하면 식(識) 알갱이를 새끼치고, ②새끼 쳐진 식(識)은 두 단계로 몸집을 부풀려 애(愛)가 된 후 ③행위의 결과로 머물러 누적된 식(識)의 무더기에 더해짐으로써 ④누적된 식(識)의 상태를 바꿉니다. 몸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이 몸과 함께한 존재 상태를 바꾸고[무아(無我)], 몸이 죽으면 새로운 몸과 함께 새로운 존재 상태로 태어나 변화의 과정을 지속합니다[윤회(輪廻)]. 요약하면, 누적된 식(識)이 알갱이로의 식(識)을 새끼치고, 새끼 쳐진 식(識)은 변화와 머묾의 과정을 거쳐 누적된 식(識)에 더해져서 그 상태의 변화를 가져옵니다. 이 과정을 ‘자기 증식에 의한 변화’라고 이름 붙였는데, 밖의 원인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내면에서 씨앗을 만들어 스스로 성장한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새끼 쳐진 식(識)이 떨어져 나가 독립적 개체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쌓임으로써 자기를 변화하는 것인데, 이런 이유로 존재 상태는 변화하면서도 자기 자신을 유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 십지연기(十支緣起) → 십이연기(十二緣起)


한편, 십지연기(十支緣起)는 takka 내면의 설명을 통해 십이연기(十二緣起)로 확장되는데, 이 과정에서 takka 내면의 과정에 의해 애(愛)가 생기면 취(取)-유(有)의 과정을 거쳐 순환적으로 새로운 식(識) 즉 변화한 누적된 식(識)으로 연결되는 것은 주목해야 합니다. takka 내면의 과정을 조건으로 식(識)으로 직접 연결되는 조건 관계의 이해입니다.


1차 인식에 의해서 새끼쳐진 식(識)과 수(受)가 생기면, 식(識)은 상(想)의 간섭 가운데 수(受)[락(樂)-고(苦)-불고불락(不苦不樂)]을 인식하는데, 2차 인식입니다. 


• takka ① 번뇌[루(漏)] ↔ 무명(無明)


중생에게 상(想)은 병들어 있습니다. 상락아정(常樂我淨)으로의 병듦은 존재에 대한 오해[사실과의 괴리]여서 중생[욕유(慾有)-색유(色有)-무색유(無色有)]의 영역에 들게 합니다. 존재에 대한 오해는 다시 현상적 구분으로 설명되는데, 욕상(慾想)-색상(色想)-무색상(無色想)[욕유(慾有) 수준의 병든 상(想)-색유(色有) 수준의 병든 상(想)-무색유(無色有) 수준의 병든 상(想)] 또는 저항의 상(想)입니다. 그러나 상(想)은 치유됩니다. 그래서 치유된 상(想)은 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부정(不淨)의 상(想)입니다.


2차 인식의 과정도 두 단계로 진행됩니다. 먼저 상락아정(常樂我淨)의 상(想)이 간섭하면 수(受)를 지속되는 것, 변치 않는 것으로 잘못 알게 되는데, 이런 왜곡된 앎이 무명(無明)입니다. 무명(無明) 위에서 락(樂)의 수(受)는 욕상(慾想)-색상(色想)-무색상(無色想)에 의해 지속되는 즐거움으로 잘못 알려지는데, 그로 인해 붙잡아야 하는 락(樂)의 수(受)라는 왜곡된 앎이 생기는데, 탐(貪)입니다. 또한, 고(苦)의 수(受)는 지속되는 괴로움으로 잘못 알려지고, 저항의 상(想)의 간섭에 의해 밀쳐내야 하는 고(苦)의 수(受)라는 왜곡된 앎이 생기는데, 진(嗔)입니다. 이렇게 2차 인식의 과정을 통해 무명(無明)-탐(貪)-진(嗔)이라는 수(受)에 대한 왜곡된 앎이 생깁니다. 이때, 병든 상(想)은 번뇌[루(漏)]입니다. 그리고 번뇌와 무명(無明)을 합해 치(癡)라고 합니다. 이렇게 탐(貪)-진(嗔)-치(癡)가 정의됩니다.


• takka ② 심행(心行) = 상(想)-수(受)


식(識)은 1차 인식에서 외입처의 앎을 몸통으로 생겨난 마음입니다. 그리고 2차 인식을 통해 무명(無明)-탐(貪)-진(嗔)이라는 수(受)의 앎을 만듭니다. 즉 1차 인식의 결과인 외입처의 앎과 2차 인식의 결과인 수(受)의 앎이 있습니다. 이때, 포괄적 인식의 결과는 1차 인식과 2차 인식의 합 즉 외입처의 앎과 수(受)의 앎을 더한 포괄적 앎입니다. 이 포괄적 앎을 ‘앎[지(知)]’라고 하고, 이 앎을 몸통으로 하는 마음이 심(心)입니다. 이렇게 심(心)은 외입처의 앎을 몸통으로 하는 식(識)이 2차 인식 즉 상(想)-수(受)의 과정을 통해 수(受)의 앎을 만들어 몸집을 부풀림으로써 완성된 마음입니다. 그래서 상(想)과 수(受)의 과정 즉 2차 인식은 심(心)을 만드는 과정 즉 심(心)의 형성작용[심행(心行)]입니다.


• takka ③ 애(愛)의 형성


그런데 심(心)은 몸통의 일부가 수(受)의 앎 즉 탐(貪)입니다. 락(樂)의 수(受)의 경우 지속되기 때문에 붙잡아야 하는 즐거움이라는 왜곡된 성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心)은 내적으로 수(受)를 즐기고 환영하고 묶여 있게 되는데, 그 결과로 nandi[즐김]이 생깁니다. 그리고 이렇게 탐(貪)과 nandi가 함께한 상태를 애(愛)라고 합니다.


이렇게 식(識)-수(受)-상(想)의 2차 인식으로부터 심(心)이 만들어지고 다시 심(心)의 내적 활동에 의해 애(愛)가 만들어지는 과정이 애(愛)의 형성과정인 takka입니다. 그리고 십지연기(十支緣起)에서는 이런 takka의 영역을 전제로 ‘수(受)를 조건으로 애(愛)가 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 takka ④ 무명(無明) → 행(行)


한편, 병든 상(想) 즉 번뇌와 무명(無明)은 서로 조건 되는 관계입니다. 번뇌가 간섭하는 2차 인식에 의해 무명(無明)이 생겨나고, 무명(無明)의 연장선상에서 애(愛)을 원인으로 하는 집착된 행위[취(取)]는 병든 상(想) 즉 번뇌를 잠재시키기 때문입니다.


이런 서로 조건 됨의 측면에서 이해할 때 상(想)과 수(受) 즉 2차 인식은 무명(無明)을 거쳐 심(心)을 형성하는 순서를 역행하여 무명(無明)을 조건으로 하는 심행(心行)이라고 설명될 수 있습니다. 즉 심행(心行)은 상(想)-수(受)이지만 중생에게는 무명(無明)을 조건으로 하는 것이고, 이렇게 무명(無明) 위에서 잠재한 상(想) 즉 번뇌 때문에 탐(貪)으로 부풀려진 오염된 심(心)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takka내면의 과정을 무명(無明)을 중심으로 설명하면 십지연기(十支緣起)는 십이연기(十二緣起)로 확장됩니다. 무명(無明)과 무명(無明)을 조건으로 하는 행(行)이 식(識) 앞에 설명됨으로써 10개의 지분이 12개의 지분으로 확장되는 것입니다.


• 행(行) = 업(業)을 위한 신(身)-구(口)-의(意)-심(心)을 형성하는 작용


이때, 행(行)은 몸과 말과 심(心)의 형성작용[신행(身行)-구행(口行)-심행(心行)]으로 정의됩니다. 행(行)은 업(業)의 측면에서 이해해야 하는데, 업(業)은 「심(心)을 원인으로 하는 신업(身業)-구업(口業)-의업(意業)」입니다. 그런데 업(業) 즉 행위는 행위 주체가 있어야 합니다. 신업(身業)을 위해서는 신(身) 즉 몸이 있어야 하고, 구업(口業)을 위해서는 구(口) 즉 말이 있어야 하며, 의업(意業)을 위해서는 의(意)가 있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원인인 심(心)의 작용을 위해서는 심(心)이 있어야 합니다. 행은 바로 이 문제를 설명해 줍니다. 신행(身行)은 신업(身業)을 위한 신(身)의 형성작용이고, 구행(口行)은 구업(口業)을 위한 구(口)의 형성작용이며, 심행(心行)은 심(心)의 작용을 위한 심(心)의 형성작용인 것입니다. 그리고 의(意)는 심(心)이 몸과 함께한 상태이기 때문에 심행(心行)이 설명되면 의행(意行)은 더 설명을 필요치 않습니다.


• 십이연기(十二緣起)의 완성 : 행(行) → 식(識)


이렇게 정의되는 행(行)이 무명(無明)을 조건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신행(身行)-구행(口行)-심행(心行)에 의해 만들어진 신(身)-구(口)-의(意)-심(心)으로 구성된 업(業)은 중생의 업(業) 즉 취(取)가 되어 식(識)을 머물게 합니다. 그래서 십이연기(十二緣起)는 십지연기(十支緣起)의 확장지분인 무명(無明)과 행(行)을 식(識) 앞에 배정하여 완성됩니다. 그리고 서로 조건 됨에 의해 무명(無明)을 조건 지우는 번뇌[루(漏)]가 그 앞에 자리하는 것입니다.


「ⓞ루(漏) ↔ ①무명(無明)→②행(行)→③식(識)↔④명색(名色)→⑤육입(六入)→⑥촉(觸)→⑦수(受)→⑧애(愛)→⑨취(取)→⑩유(有)→⑪생(生)→⑫노사(老死)」


※ 「행(行) = 업(業)을 위한 신(身)-구(口)-의(意)-심(心)을 형성하는 작용」이라고 설명하였는데, 이런 설명은 아직까지 불교 안에서 없었던 것입니다. 그만큼 이 설명은 해석하기 어렵지만 중요한 개념입니다. 그런데 부미자 경과 의도 경은 이 해석의 타당성을 확인해 줍니다.


• bhūmijasuttaṃ (SN 12.25)[부미자 경] & cetanāsuttaṃ (AN 4.171)[의도 경]


“kāye vā hānanda, sati kāyasañcetanāhetu uppajjati ajjhattaṃ sukhadukkhaṃ. vācāya vā hānanda, sati vacīsañcetanāhetu uppajjati ajjhattaṃ sukhadukkhaṃ. mane vā hānanda, sati manosañcetanāhetu uppajjati ajjhattaṃ sukhadukkhaṃ avijjāpaccayā ca.


아난다여, 몸이 있을 때 몸의 의도를 원인으로 안으로 락(樂)과 고(苦)가 일어난다. 아난다여, 말이 있을 때 말의 의도를 원인으로 안으로 락(樂)과 고(苦)가 일어난다. 아난다여, 의(意)가 있을 때 의(意)의 의도를 원인으로 안으로 락(樂)과 고(苦)가 일어난다. 이것들은 무명(無明)에 조건 지어진 것이다.


이 경들은 언뜻 그 의미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무명을 조건으로 하는 몸과 말과 의(意)라는 말 속에 무명(無明)을 조건으로 하는 행(行)에 의해 생긴 몸과 말과 심(心)-의(意)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 「십이연기(十二緣起)는 십지연기(十支緣起)의 확장지분인 무명(無明)과 행(行)을 식(識) 앞에 배정하여 완성됩니다.」라고 하였는데, 이런 설명 또한 아직까지 불교 안에서 없었던 것입니다. 그만큼 이 설명도 해석하기 어렵지만 중요한 개념입니다. 그런데 완전한 검증 경은 이 해석의 타당성을 확인해 줍니다. 


• parivīmaṃsanasuttaṃ (SN 12.51)[완전한 검증 경]


“avijjāgato yaṃ, bhikkhave, purisapuggalo puññaṃ ce saṅkhāraṃ abhisaṅkharoti, puññūpagaṃ hoti viññāṇaṃ. apuññaṃ ce saṅkhāraṃ abhisaṅkharoti, apuññūpagaṃ hoti viññāṇaṃ. āneñjaṃ ce saṅkhāraṃ abhisaṅkharoti āneñjūpagaṃ hoti viññāṇaṃ. yato kho, bhikkhave, bhikkhuno avijjā pahīnā hoti vijjā uppannā, so avijjāvirāgā vijjuppādā neva puññābhisaṅkhāraṃ abhisaṅkharoti na apuññābhisaṅkhāraṃ abhisaṅkharoti na āneñjābhisaṅkhāraṃ abhisaṅkharoti. anabhisaṅkharonto anabhisañcetayanto na kiñci loke upādiyati; anupādiyaṃ na paritassati, aparitassaṃ paccattaññeva parinibbāyati. ‘khīṇā jāti, vusitaṃ brahmacariyaṃ, kataṃ karaṇīyaṃ, nāparaṃ itthattāyā’ti pajānāti.


“비구들이여, 무명(無明)에 빠진 사람이 만일 공덕이 되는 유위(有爲)적 행위를 하면 공덕을 경험할 식(識)이 있게 되고, 만일 공덕이 되지 않는 유위(有爲)적 행위를 하면 공덕을 경험하지 않을 식(識)이 있게 되고, 만일 흔들림 없는 유위(有爲)적 행위를 하면 흔들림 없음을 경험할 식(識)이 있게 된다. 비구들이여, 그러나 비구에게 무명(無明)이 버려지고 명(明)이 일어나면 그에게 무명이 버려지고 명이 일어났기 때문에 그는 공덕이 되는 유위(有爲)적 행위도 하지 않고 공덕이 되지 않는 유위(有爲)적 행위도 하지 않고 흔들림 없는 유위(有爲)적 행위도 하지 않는다. 유위(有爲)적으로 행위 하지 않고 유위(有爲)적으로 의도하지 않을 때 세상에서 아무 것도 집착하지 않는다. 집착하지 않으면 갈망하지 않는다. 갈망하지 않으면 개별적으로 완전히 꺼진다. ‘태어남은 다했다. 범행은 완성되었다. 해야 할 일을 했다. 다음에는 현재 상태[유(有)]가 되지 않는다.’라고 분명히 안다.


이 경은 이런 방법으로 「무명(無明) [→ 십이연기의 행(行)] → 오온의 행(行) → 식(識)」의 연결 관계를 보여줍니다. 경은 이어서 


“taṃ kiṃ maññatha, bhikkhave, api nu kho khīṇāsavo bhikkhu puññābhisaṅkhāraṃ vā abhisaṅkhareyya apuññābhisaṅkhāraṃ vā abhisaṅkhareyya āneñjābhisaṅkhāraṃ vā abhisaṅkhareyyā”ti? “no hetaṃ, bhante”. 


“비구들이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번뇌 다한 비구가 공덕이 되는 유위(有爲)적 행위를 하거나 공덕이 되지 않는 유위(有爲)적 행위를 하거나 흔들림 없는 유위(有爲)적 행위를 하겠는가?” “아닙니다. 대덕이시여.”


“sabbaso vā pana saṅkhāresu asati, saṅkhāranirodhā api nu kho viññāṇaṃ paññāyethā”ti? “no hetaṃ, bhante”.


“그러면 모든 면에서 유위(有爲)적 행위가 없고 유위(有爲)적 행위가 소멸했는데도 식(識)이 알려질 수 있겠는가?” “아닙니다. 대덕이시여.”


라고 하여 좀 더 구체적인 설명을 제시합니다. 번뇌 다한 비구는 유위적 즉 무명에 조건지어진 신(身)-구(口)-심(心)을 형성하지 않으므로 어떤 형태로든 유위적 행위를 하지 않고, 그러면 식(識)이 알려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경은 이런 방법으로 「무명(無明) → 행(行) → 식(識)」의 연결 관계를 설명해 줍니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