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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재] 【깨달음 - 요약】

0 505 2018.02.26 06:48

깨달음 - 요약

 

불교(佛敎)는 사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지금을 사는 이야기입니다. 과거 삶의 결과를 누적해 형성된 내가 지금 인식하고 행위 하고 그 결과를 다시 누적하는 삶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불교는 나는 누구인가?’의 질문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리고 내년, 3차 세미나를 통해 상세히 공부할 이 주제를 통해 설명되는 내가 인식하고 행위 하는 것으로의 지금을 분석하는 것이 이어지는 주제인데, 금년 제2차 세미나의 주제인 깨달음입니다.

 

현존하는 것으로의 지금여기의 삶은 인식과 행위입니다. 그런데 인식과 행위는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직접 연결된 것은 아니고 매개를 통해 연결됩니다. 행위는 매개를 통해 인식으로 전달되고, 인식은 매개를 통해 행위로 전달됩니다.

 

그러면 인식과 행위는 무엇을 매개로 전달됩니까?

 

행위를 인식으로 전달하는 매개는 욕()[chanda]입니다. 찬다에 의해서 행위는 인식으로 직접 전달되어 인식의 질을 결정합니다. 그런데 인식을 행위로 전달하는 과정은 다릅니다. 인식을 직접 전달하지 않고 가공하여 전달하는 것입니다.

 

주목해야 합니다! 인식은 가공되어 행위로 전달됩니다. 그리고 이 현상이 삶의 질을 결정합니다. 가공의 과정이 불완전하면 불완전한 행위를 유발하여 삶의 질을 낮추는데, 중생의 삶입니다. 가공의 과정이 완전하면 완전한 행위를 유발하여 삶의 질은 완전해지는데, 해탈된 삶입니다.

 

인식을 가공하는 이 과정은 takka[딱까]입니다. 딱까에 의해서 인식은 가공되고 행위로 전달되어 행위의 질을 결정합니다. 그리고 행위는 찬다를 매개로 다음 삶의 인식으로 되돌아가 삶의 연속성을 확보하고, 결과를 나에게 다시 쌓아 누적된 나를 바꿉니다.

 

그런데 딱까는 불완전한 가공과정(*)을 지칭합니다. 중생의 삶에 적용되는 가공과정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의미를 직접 지시하는 것은 번뇌[()-āsava]입니다. 번뇌를 조건으로 진행되는 이 과정은 인식을 불완전하게 가공하여 결과를 만드는데, 갈애[()-taṇhā]입니다. 갈애는 자기화[māna]를 포함하는데, 자기화는 참된 것[()-atman]이라는 나에 대한 거짓 설정입니다. 이런 참된 나라는 설정을 담고 갈애는 행위의 원인이 되어 고()를 결과 맺는 중생의 삶을 이끕니다. 그래서 갈애는 괴로움의 원인[고집(苦集)]이라고 정의됩니다.

 

(*) 여기서 완전과 불완전은 기계적 상태[삶의 골격의 구성]을 말하지 않습니다. 식품관리에서 농약이 잔존하는 식품은 불완전한 식품으로, 농약이 잔존하지 않는 식품은 완전한 식품으로 분류할 수 있듯이 모든 오염원의 근원인 번뇌의 영향 하에 있는 가공과정을 불완전한 것이라고 나타내었고, 번뇌의 영향에서 벗어난 가공과정은 완전한 것이라고 나타내었습니다.

 

이제 깨달음은 정의될 수 있습니다. 딱까의 조건인 번뇌를 부숨으로써 결과인 갈애의 형성을 배제하는 것입니다[자기화의 뿌리 뽑음 포함]. 그래서 번뇌 없는 삶 즉 완전한 가공과정의 실현을 딱까를 넘어섬[atakka]’이라고 하는데, 부처님에 의해 선언된 깨달음의 중심 개념입니다.

 

이렇게 번뇌를 부수어 깨달음을 성취하는 것이 누진(漏盡)입니다. ()-고집(苦集)[()]-고멸(苦滅)[애멸(愛滅)]-고멸도(苦滅道)()-루집(漏集)-루멸(漏滅)-루멸도(漏滅道)로 설명되는데, 딱까의 결과와 조건에 대한 불완전의 해소입니다.

 

sāmaññaphalasuttaṃ (DN 2)[사문과경(沙門果經)]

 

“so evaṃ samāhite citte parisuddhe pariyodāte anaṅgaṇe vigatūpakkilese mudubhūte kammaniye ṭhite āneñjappatte āsavānaṃ khayañāṇāya cittaṃ abhinīharati abhininnāmeti. so idaṃ dukkhanti yathābhūtaṃ pajānāti, ayaṃ dukkhasamudayoti yathābhūtaṃ pajānāti, ayaṃ dukkhanirodhoti yathābhūtaṃ pajānāti, ayaṃ dukkhanirodhagāminī paṭipadāti yathābhūtaṃ pajānāti. ime āsavāti yathābhūtaṃ pajānāti, ayaṃ āsavasamudayoti yathābhūtaṃ pajānāti, ayaṃ āsavanirodhoti yathābhūtaṃ pajānāti, ayaṃ āsavanirodhagāminī paṭipadāti yathābhūtaṃ pajānāti. tassa evaṃ jānato evaṃ passato kāmāsavāpi cittaṃ vimuccati, bhavāsavāpi cittaṃ vimuccati, avijjāsavāpi cittaṃ vimuccati, ‘vimuttasmiṃ vimuttami’ti ñāṇaṃ hoti, ‘khīṇā jāti, vusitaṃ brahmacariyaṃ, kataṃ karaṇīyaṃ, nāparaṃ itthattāyā’ti pajānāti.

 

그가 이와 같이 마음이 삼매를 닦고, 청정하고, 깨끗하고, 흠이 없고, 오염원이 사라지고, 부드럽고, 자기 활동성을 회복하고, 안정되고, 흔들림이 없는 상태에 이르렀을 때 번뇌들을 부숨[누진(漏盡)]의 앎으로 마음을 향하게 하고 기울게 합니다. 그는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압니다.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압니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압니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실천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압니다. ‘이것이 번뇌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압니다. ‘이것이 번뇌의 일어남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압니다. ‘이것이 번뇌의 소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압니다. ‘이것이 번뇌의 소멸로 이끄는 실천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압니다.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는 그는 소유의 번뇌[욕루(慾漏)]로부터 마음이 해탈합니다. 존재의 번뇌[유루(有漏)]로부터 마음이 해탈합니다. 무명의 번뇌[무명루(無明漏)]로부터 마음이 해탈합니다. 해탈했을 때 해탈했다는 앎이 있습니다. ‘태어남은 다했다. 범행은 완성되었다. 해야 할 일을 했다. 다음에는 현재 상태[()]가 되지 않는다.'라고 꿰뚫어 압니다.”

 

깨달음 요약 그림.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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