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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재] 【첨부1-2】 아홉 가지 덕성(德性)의 포괄적 이해

0 522 2018.03.02 19:51

【첨부1-2】 아홉 가지 덕성(德性)의 포괄적 이해


• 아라한(阿羅漢)                  모든 번뇌 떠나신 분            

• 정등각(正等覺)                  스스로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신 분

• 명행족(明行足)                  밝음과 실천을 갖추신 분               

• 선서(善逝)                      진리의 길 보이신 분                   

• 세간해(世間解)                  세상일을 모두 훤히 아시는 분          

• 무상조어장부(無上調御丈夫)      어리석은 이도 잘 이끄시는 위없는 분 

  [여래십호(如來十號) → 무상사(無上士) & 조어장부(調御丈夫)]

• 천인사(天人師)                  모든 천상과 인간의 스승                

• 불(佛)                          깨달으신 분                            

• 세존(世尊)                      존귀하신 분                           


여래십호(如來十號)로 잘 알려져 있지만, 부처님의 아홉 가지 덕성의 측면에서 여래구덕(如來九德)으로 불리는 이 아홉 가지는 부처님 스스로 제자들에게 알려준 깨달음에 대한 정의입니다. 


즉 「①번뇌를 떠난 자이고 완전한 깨달음을 이룬 자이고 밝음과 실천을 갖춘 자이어서, ②앞서 가 닿은 진리의 자리를 드러내 보여줌으로써 길을 제시하였고, ③그럼으로써 세상일을 잘 알고 모두를 잘 이끌어 천상과 인간의 스승이라고 찬탄 받는 자, ④그가 곧 깨달은 자[불(佛)-부처]이고 존귀한 존재[세존(世尊)]」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1. 깨달은 자[불(佛)-부처] - 아라한(阿羅漢)-정등각(正等覺)-명행족(明行足)


그렇다면 여래는 깨달은 자[불(佛)-부처]이고, 부처는 번뇌를 떠난 자[아라한(阿羅漢)], 완전한 깨달음을 이룬 자[정등각(正等覺)], 밝음과 실천을 갖춘 자[명행족(明行足)]의 세 가지 측면에서 접근하면 바르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부처 또는 불교의 본질은 번뇌-깨달음-밝음-실천을 중심으로 구성된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괴로움[고(苦)]의 근원이 되는 번뇌가 부서진 상태로의 밝음과 밝음을 갖추는 과정으로의 실천, 번뇌의 부숨에 의해 괴로움이 소멸[고멸(苦滅)]하는 것으로의 깨달음이라고 하겠습니다.


1) 아라한(阿羅漢)


아라한은 번뇌 다한 자입니다. 많은 경전들에서 아라한은 두 가지 형태로 서술됩니다.


① arahaṃ khīṇāsavo ㅡ 번뇌 다한 아라한


② arahaṃ khīṇāsavo vusitavā katakaraṇīyo ohitabhāro anuppattasadattho parikkhīṇabhavasaṃyojano sammadaññāvimutto


 ㅡ 번뇌가 다했고 삶을 완성했으며 해야 할 바를 했고 짐을 내려놓았으며 최고의 선(善)      을 성취했고 존재의 족쇄를 완전히 부수었으며 바른 무위의 앎으로 해탈한 아라한


아라한(阿羅漢)은 ‘번뇌가 다한 자’입니다[khīṇāsavā arahanto]. 「번뇌 다한 아라한」의 용례를 첨부하였습니다.


※ khandhasuttaṃ(SN 22.48)[온(蘊) 경]은 오취온(五取蘊)에 대해 번뇌와 함께하고 집착되기 마련인 것[sāsavaṃ upādāniyaṃ]이라고 합니다. 이때, 오취온(五取蘊)은 유신(有身)인데 중생인 나입니다. 그렇다면 번뇌와 함께함 즉 번뇌 때문에 집착하여 오취온(五取蘊) 즉 중생인 내가 된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upādānaparipavattasuttaṃ (SN 22.56)[취착의 양상 경] 등에서는 「염오(厭惡)하고 이탐(離貪)하고 소멸하여 집착 없이 해탈한 자들은 잘 해탈한 자들이니, 잘 해탈한 자들은 완전히 성취한 아라한이고, 완전히 성취한 아라한들에게 윤회의 선언은 없다.」고 하는데, 여기서 ‘완전히 성취한 아라한’은 kevalin입니다. 아라한의 동의어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이해 위에서 번뇌가 다한 상태라는 것은 더 이상 중생의 영역에 속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것이 아라한을 정의하는 구체적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번뇌(煩惱)[누(漏)-āsava]는 삶의 메커니즘에 의하면 2차 인식에 간섭하는 내적 경향[상(想)]의 병듦 상태입니다. 오온(五蘊)이 아(我)라면 병으로 인도되지 않을 것인데, 무아(無我)이기 때문에 병이 들게 됩니다<무아상경(S22:59)>. 이때, 상(想)이 병들면 번뇌라고 불린다는 것이 우리 법회의 이해입니다.


[참고] 공(空)에 대한 작은 경(M121)은 ‘suññamidaṃ saññāgataṃ araññasaññāyā’ti pajānāti[‘숲의 상(想) 상태의 상(想)에 속하는 것은 공(空)하다’라고 분명히 안다]로부터 시작해 ‘suññamidaṃ saññāgataṃ nevasaññānāsaññāyatanasaññāyā’ti pajānāti[‘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의 상(想) 상태의 상(想)에 속하는 것은 공(空)하다’라고 분명히 안다]까지 세상의 관점에서 단계적으로 설명한 뒤에 번뇌로 관점을 바꾸어 이렇게 설명합니다.


‘suññamidaṃ saññāgataṃ kāmāsavenā’ - ‘욕루(慾漏) 상태의 상(想)에 속한 것은 공(空)하다.’

‘suññamidaṃ saññāgataṃ bhavāsavenā’ - ‘유루(有漏) 상태의 상(想)에 속한 것은 공(空)하다.’

‘suññamidaṃ saññāgataṃ avijjāsavenā’ - ‘무명루(無明漏) 상태의 상(想)에 속한 것은 공(空)하다.’


즉 욕루(慾漏)-유루(有漏)-무명루(無明漏)의 번뇌 상태로 있는 상(想)을 말하는 것인데 곧 번뇌가 상(想)에 속하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병든 상(想)이 곧 번뇌라는 것은 이런 경증(經證)을 가집니다.


<마하삿짜까 경(M36)>은 


「“yassa kassaci, aggivessana, ye āsavā saṃkilesikā ponobbhavikā sadarā dukkhavipākā āyatiṃ jātijarāmaraṇiyā appahīnā, tamahaṃ ‘sammūḷho’ti vadāmi. āsavānañhi, aggivessana, appahānā sammūḷho hoti. yassa kassaci, aggivessana, ye āsavā saṃkilesikā ponobbhavikā sadarā dukkhavipākā āyatiṃ jātijarāmaraṇiyā pahīnā, tamahaṃ ‘asammūḷho’ti vadāmi. āsavānañhi, aggivessana, pahānā asammūḷho hoti.


악기웻사나여, 누구든지 오염원이고 다시 존재로 이끌고 두렵고 괴로운 보(報)를 가져오고 미래의 태어남과 늙음과 죽음을 초래하는 번뇌들을 버리지 못한 자, 그를 나는 미혹한 사람이라고 부른다. 악기웻사나여, 번뇌를 버리지 못한 자가 미혹한 사람이다.

 

악기웻사나여, 누구든지 오염원이고 다시 존재로 이끌고 두렵고 괴로운 보(報)를 가져오고 미래의 태어남과 늙음과 죽음을 초래하는 번뇌들을 버린 자, 그를 나는 미혹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부른다. 악기웻사나여, 번뇌를 버린 자가 미혹하지 않은 사람이다.」


라고 하여,


오염원인 번뇌가 ①다시 존재로 이끌고 ②두렵고 ③괴로운 보(報)를 가져오고 ④미래의 태어남과 늙음과 죽음을 초래 한다


는 것을 알려줍니다. 또한, 날라까빠나 경(M68)[naḷakapānasuttaṃ]에서 부처님은


“sādhu sādhu, anuruddhā! tathāgatassa, anuruddhā, ye āsavā saṃkilesikā ponobbhavikā sadarā dukkhavipākā āyatiṃ jātijarāmaraṇiyā, pahīnā te ucchinnamūlā tālāvatthukatā anabhāvaṃkatā āyatiṃ anuppādadhammā. seyyathāpi, anuruddhā, tālo matthakacchinno abhabbo punavirūḷhiyā; evameva kho, anuruddhā, tathāgatassa ye āsavā saṃkilesikā ponobbhavikā sadarā dukkhavipākā āyatiṃ jātijarāmaraṇiyā, pahīnā te ucchinnamūlā tālāvatthukatā anabhāvaṃkatā āyatiṃ anuppādadhammā; tasmā tathāgato saṅkhāyekaṃ paṭisevati, saṅkhāyekaṃ adhivāseti, saṅkhāyekaṃ parivajjeti, saṅkhāyekaṃ vinodeti”.


훌륭하고 훌륭하다, 아누룻다들이여. 여래에게서 오염원이고 다시 존재로 이끌고 두렵고 괴로운 보(報)를 가져오고 미래의 태어남과 늙음과 죽음을 초래하는 번뇌들은 모두 버려졌고 뿌리 뽑혔고 윗부분이 잘린 야자수처럼 되었고 존재하지 않게 되었고 미래에 생겨나지 않는 상태가 되었다. 아누룻다들이여, 예를 들면 윗부분이 잘린 야자수가 다시 자랄 수 없는 것처럼, 여래에게서 오염원이고 다시 존재로 이끌고 두렵고 괴로운 보(報)를 가져오고 미래의 태어남과 늙음과 죽음을 초래하는 번뇌들은 모두 버려졌고 뿌리 뽑혔고 윗부분이 잘린 야자수처럼 되었고 존재하지 않게 되었고 미래에 생겨나지 않는 상태가 되었다. 그래서 여래는 헤아린 뒤에 어떤 것을 수용하고, 헤아린 뒤에 어떤 것을 참고, 헤아린 뒤에 어떤 것을 피하고, 헤아린 뒤에 어떤 것을 버린다.


라고 합니다. 여래(如來) 스스로 아라한이라는 여래의 덕성을 구족하고 있음을 밝혀주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때, 번뇌의 버림[pahīnā]은 번뇌의 부숨[āsavakkhaya]으로 나타나는데 누진(漏盡)이라고 한역(漢譯) 되었습니다. 육신통(六神通)에서는 누진통(漏盡通)이고 삼명(三明)에서는 누진명(漏盡明)입니다[āsavakkhayañāṇa]. 그리고 부처님 당시 제자들의 보편적 깨달음을 나타내는 혜해탈자(慧解脫者)는 다른 성취의 길 없이 사마타-위빳사나에 의해 직접 번뇌를 부순 경우입니다[누진아라한(漏盡阿羅漢)]. 고멸(苦滅)이라는 하나의 가치를 향해 직접 나아가 성취한 자를 일컫는 말인데, 고(苦)-집멸도集滅道)와 루(漏)-집멸도集滅道)로 설명됩니다. 고(苦)의 근본이 번뇌이므로 현상으로 드러나는 고의 집멸도는 근본원인인 번뇌의 집멸도와 함께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번뇌를 부순 자를 아라한이라고 하며, 이것이 부처님을 정의하는 첫 번째 특성입니다.


※ 이때 번뇌의 부숨이란 상(想)의 병듦의 치유[healing]하여 욕루(慾漏)-유루(有漏)-무명루(無明漏)의 상태로 가지 않게 하는 것이고, ①다시 존재로 이끎, ②두려움, ③괴로운 보(報), ④미래의 태어남과 늙음과 죽음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오염의 상태에 속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몇 개의 게송에서는 khīṇāsavā arahanto[번뇌 다한 아라한들] 또는 khīṇāsavaṃ arahantaṃ[번뇌 다한 아라한]으로 나타납니다. 특히, khīṇāsavaṃ arahantaṃ, tamahaṃ brūmi brāhmaṇaṃ.[번뇌 다한 아라한,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고 말한다]라고 하여 아라한을 바라문이라고 합니다. 바라문에 대한 설명을 첨부하였습니다.


[참고] 여래(如來)의 반열반(般涅槃) 이후에 아라한을 찬탄하는 표현이 두 개의 경전에서 발견됩니다. 여래(如來) 재세(在世)시 여래구덕(如來九德)으로 부처님을 찬탄하는 것과 같은 경우입니다.


• nāradasuttaṃ (AN 5.50)[나라다 경]


taṃ kho panāyasmantaṃ nāradaṃ evaṃ kalyāṇo kittisaddo abbhuggato — ‘paṇḍito viyatto medhāvī bahussuto cittakathī kalyāṇapaṭibhāno vuddho ceva arahā ca’.


그분 나라다 존자께는 이러한 좋은 명성이 따른다. ㅡ '그는 현명한 분, 성취한 분, 앎의 달인, 많이 배운 분, 훌륭하게 법을 설하는 분, 유익하게 말하는 분, 존경받는 분, 아라한이시다.'라고.


• madhurasuttaṃ (MN 84)[마두라 경]


taṃ kho pana bhavantaṃ kaccānaṃ evaṃ kalyāṇo kittisaddo abbhuggato — ‘paṇḍito viyatto medhāvī bahussuto cittakathī kalyāṇapaṭibhāno vuddho ceva arahā ca’.


그분 깟짜나 존자께는 이러한 좋은 명성이 따른다. ㅡ '그는 현명한 분, 성취한 분, 앎의 달인, 많이 배운 분, 훌륭하게 법을 설하는 분, 유익하게 말하는 분, 존경받는 분, 아라한이시다.'라고.


• 빠야시경(D23) 비교 → 부처님 사후에 설해진 경일까?


taṃ kho pana bhavantaṃ kumārakassapaṃ evaṃ kalyāṇo kittisaddo abbhuggato — ‘paṇḍito byatto medhāvī bahussuto cittakathī kalyāṇapaṭibhāno vuddho ceva arahā ca. sādhu kho pana tathārūpānaṃ arahataṃ dassanaṃ hotī’”ti.


2) 정등각(正等覺)


정등각 경(S22:58)은 정등각(正等覺)을 정의해 줍니다.


 「여래-아라한-정등각은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의 염오(厭惡)-이탐(離貪)-소멸(消滅)에 의해 집착 없이 해탈한 정등각이라 불린다.<정등각 경(S22:58)>」


이때, 염오(厭惡)-이탐(離貪)-소멸(消滅)은 갈애가 형성되는 내적인 영역의 문제를 해소하는 과정인데, 사념처(四念處)의 완성[염오(厭惡)→사띠토대]과 사마타[이탐(離貪)→심해탈(心解脫)]-위빳사나[소멸(消滅)→혜해탈(慧解脫)]의 완성과정입니다.


한편, 경은 여래-아라한-정등각과 혜해탈한 비구 즉 제자인 아라한의 다른 점을 알려주는데, 「비구들이여, 세존-아라한-정등각은 생기지 않은 도(道)를 생기게 한 자이고, 일어나지 않은 도(道)를 일으킨 자이고, 선언되지 않은 도(道)를 선언한 자이고, 도(道)를 아는 자이고, 도(道)에 능숙한 자이고, 도(道)에 정통한 자이다. 비구들이여, 지금의 제자들은 도(道)를 따라 머물고 나중에 구족한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여래-아라한-정등각과 혜해탈자인 비구 사이의 다른 점이다.」라고 합니다.


3) 명행족(明行足)


마찬가지로 부처님은 명(明)[밝음]과 행(行)[실천]을 구족한 자라고 불립니다. 이때 명(明)과 행(行)은 「귀의불 양족존(歸依佛兩足尊)[한문으로 하는 삼귀의 - 두 가지를 구족하여 귀하신 부처님께 돌아가 의지합니다.]」에서 말하는 두 가지로서 수행의 과정에 대한 구분입니다.


사선(四禪)-삼명(三明)의 수행체계에서는 제4선(第四禪)까지의 과정은 행(行)이고 삼명(三明)은 명(明)입니다. 반면에 사문과경(沙門果經)(D2) 등이 제시하는 포괄적인 수행 체계에서는 제4선(第四禪)의 성취까지의 수행자의 삶은 행(行)이고, 제4선 다음의 과정은 명(明)입니다. 


⇒ 첨부1-2-3. 「명행족(明行足)[vijjācaraṇasampanna]의 이해」 참조


그렇다면 명행(明行)은 깨달음 즉 번뇌의 부숨을 실현하기 위한 수행의 전체 과정이어서 팔정도(八正道)를 의미한다고 말 할 수 있고, 명행족(明行足)은 고멸도(苦滅道)인 팔정도를 완성해서 고멸(苦滅)인 열반(涅槃)[명(明)-해탈(解脫)]을 실현한 자라는 의미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명행(明行)은 부처님의 가르침이고, 그 길을 따라가는 자들이 부처님의 제자인 불교신자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2. 선서(善逝)


‘잘 가신 분’이라는 원어[sugata]의 의미를 가지지만, 앞서 가 닿은 진리의 자리를 드러내 보여줌으로써 길을 제시하였다는 의미에서 ‘진리의 길 보이신 분’으로 이해하는 부처님의 덕성(德性)입니다.


한편, <선서의 율 경(A4:160)>은 부처님의 역할을 알려주는데, 「그는 법을 설한다. 그는 시작도 훌륭하고 중간도 훌륭하고 끝도 훌륭하게, 의미와 문자를 구족하여 법을 설하여,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고 지극히 청정한 범행(梵行)을 드러낸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선서의 율이다.」입니다. 세상 사람들을 위해 진리의 길을 보여주신 스승으로의 역할을 정의하였다고 할 것입니다. 


이때 부처님의 제자인 비구들의 역할도 같이 정해지는데, 「①단어와 문장들이 바르게 구성되어 잘 파악한 경을 가르친다. ②훈계하기 쉽다. ③경을 남에게 열심히 설해준다. ④열심히 정진한다.」입니다.


3. 세간해(世間解)


부처님은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고 벗어난 분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부처님이 해탈된 삶만을 가르치는 스승은 아닙니다. 해탈하지 못하고 자기존재로서 살아가는 중생들의 삶에 대해 잘 알아서, 세간살이에서의 행복을 안내하는 가운데 그 위에서 더 높은 삶으로의 향상을 안내해 줍니다. 그리고 그 끝에 세간살이에서의 벗어남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4. 무상조어장부(無上調御丈夫)


무상사(無上士)와 조어장부(調御丈夫)로 나누어 이해하기도 하지만 <께시 경(A4:111)>은 「세존이시여, 그런데 세존께서는 무상조어장부[無上調御丈夫]이십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세존께서는 어떻게 인간을 길들이십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1) 온화하게 길들이는 방법


「'이것이 몸으로 짓는 좋은 행위이고, 이것이 몸으로 짓는 좋은 행위의 보(報)이고, 이것이 말로 짓는 좋은 행위이고, 이것이 말로 짓는 좋은 행위의 보(報)이고, 이것이 마음으로 짓는 좋은 행위이고, 이것이 마음으로 짓는 좋은 행위의 보(報)이고, 이것이 신이고, 이것이 인간이다.」


2) 혹독하게 길들이는 방법


「'이것이 몸으로 짓는 나쁜 행위이고, 이것이 몸으로 짓는 나쁜 행위의 보(報)이고, 이것이 말로 짓는 나쁜 행위이고, 이것이 말로 짓는 나쁜 행위의 보(報)이고, 이것이 마음으로 짓는 나쁜 행위이고, 이것이 마음으로 짓는 나쁜 행위의 보(報)이고, 이것이 지옥이고, 이것이 축생계이고, 이것이 아귀계이다.」


3) 온화함과 혹독함 둘 다로 길들이는 방법


「'이것이 몸으로 짓는 좋은 행위이고, 이것이 몸으로 짓는 좋은 행위의 보(報)이고, 이것이 몸으로 짓는 나쁜 행위이고, 이것이 몸으로 짓는 나쁜 행위의 보(報)이고, … 이것이 마음으로 짓는 좋은 행위이고, 이것이 마음으로 짓는 좋은 행위의 보(報)이고, 이것이 마음으로 짓는 나쁜 행위이고, 이것이 마음으로 짓는 나쁜 행위의 보(報)이고, 이것이 신이고, 이것이 인간이고, 이것이 지옥이고, 이것이 축생계이고, 이것이 아귀계이다.」


4) 온화한 방법으로도 길들여지지 않고 혹독한 방법으로도 길들여지지 않고 온화함과 혹독함 둘 다로도 길들여지지 않을 때는 '죽여 버림'


「께시여, 여래가 생명을 죽이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더라도 만일 사람을 길들일 때 그 사람이 온화한 방법으로도 길들여지지 않고 혹독한 방법으로도 길들여지지 않고 온화함과 혹독함 둘 다로도 길들여지지 않는다면, 그때는 여래는 그를 훈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교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범행을 닦는 지혜로운 동료수행자들도 그를 훈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교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께시여, 여래가 훈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교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범행을 닦는 동료 수행자들이 훈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교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그런 사람은 참으로 이 성스러운 율에서 살해된 자이니라.」


라고 답합니다. 무상조어장부(無上調御丈夫)라는 하나의 개념으로 이 이름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 실천행(實踐行)을 위한 무상조어장부(無上調御丈夫) ⇒ 육처분석 경(M137) 참조.


5. 천인사(天人師)


부처님은 스스로를 하늘사람과 인간의 스승이라고 말합니다. 아귀-축생-지옥 중생들의 스승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마도 부처님의 사랑이 그들에게 미치지 않아서가 아니라 바른 법을 배워 알고 실천해 실현하기에는 그들의 인지능력이 미치지 못하기 때문인 것으로 이해됩니다.


부처님은 가르침을 강제하지 않습니다. ‘다만, 길을 가리킬 뿐!<가나까목갈라나 경(M107)>’이라고 말하는 부처님에게 가리키는 길을 이해할 수 있는 지적 능력을 갖추지 못한 아귀-축생-지옥 중생들을 위한 스승이 되는 일은 현실적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경전은 맹구우목(盲龜遇木)의 비유를 들어 한 번 악처에 떨어지면 인간으로 태어나기가 어렵다고 말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 어리석은 자와 현명한 자의 경[Bālapaṇḍitasutta(M129)] 중에서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구멍이 하나 뚫린 멍에를 바다에 던져 넣는다. 동풍이 불면 그것은 서쪽으로 떠내려가고, 서풍이 불면 그것은 동쪽으로 떠내려가고, 북풍이 불면 그것은 남쪽으로 떠내려가고, 남풍이 불면 그것은 북쪽으로 떠내려간다. 그런데 그곳에 눈먼 거북이가 백년에 한 번씩 떠오른다. 비구들이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 눈먼 거북이가 백년에 한 번씩 떠올라서 그 구멍이 하나가 뚫린 멍에에 목을 끼워 넣을 수가 있겠는가?" 

 

"대덕이시여, 언젠가 어느 땐가 오랜 세월이 지나야 할 것입니다."

 

"비구들이여, 그 눈먼 거북이가 백년에 한 번씩 떠올라서 그 구멍이 하나 뚫린 멍에에 목을 끼워 넣는 것이, 비구들이여, 한번 악처(惡處)에 떨어진 어리석은 자가 인간의 지위를 획득하는 것보다 빠르다. 그것은 무슨 까닭이냐? 비구들이여, 거기에는 법의 실천이 없고, 바른 실천이 없고, 유익한 실천이 없고, 공덕의 실천이 없다. 비구들이여, 거기에는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는 약육강식(弱肉强食)만이 있다.[Na hettha, bhikkhave, atthi dhammacariyā samacariyā kusalakiriyā puññakiriyā. Aññamaññakhādikā ettha, bhikkhave, vattati dubbalakhādikā.] 


6. 세존(世尊)


이렇게 여덟 가지의 덕성을 갖춘 부처님은 참으로 세상에서 귀한 분입니다. 경전에서는 세존을 포함한 여래의 아홉 가지 덕성 가운데 가장 많은 경우에 세존(世尊)[bhagavant]이라는 이름으로 부처님을 호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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