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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재] 【첨부1-2-1】 arahaṃ khīṇāsavo[번뇌 다한 아라한]의 용례

0 490 2018.03.02 19:56

【첨부1-2-1】 arahaṃ khīṇāsavo[번뇌 다한 아라한]의 용례


arahaṃ khīṇāsavo vusitavā katakaraṇīyo ohitabhāro anuppattasadattho parikkhīṇabhavasaṃyojano sammadaññāvimutto


번뇌가 다했고 삶을 완성했으며 해야 할 바를 했고 짐을 내려놓았으며 최고의 선(善)을 성취했고 존재의 족쇄를 완전히 부수었으며 바른 무위의 앎으로 해탈한 아라한



1. 아라한의 성취 상태를 말하는 용례


• aggaññasuttaṃ(D26)[세기(世起) 경] 


ㅡ 끄샤뜨리야-바라문-와이샤-수드라의 네 계급 중 어느 계급에서 출가하였든 비구가 「번뇌가 다했고 삶을 완성했으며 해야 할 바를 했고 짐을 내려놓았으며 최고의 선(善)을 성취했고 존재의 족쇄를 완전히 부수었으며 바른 무위의 앎으로 해탈한 아라한」이 되면 그들 가운데 으뜸이라 함.


• pāsādikasuttaṃ(D29)[정신(淨信) 경] 


ㅡ 아라한이 범할 수 없는 아홉 가지 


①고의로 살아있는 생명을 죽일 수 없음, 

②도둑질이라 불리는 주지 않은 것을 가질 수 없음, 

③성행위를 할 수 없음, 

④알면서 거짓을 말할 수 없음, 

⑤이전에 재가자였을 때처럼 쌓아두고 소유의 삶을 즐길 수 없음, 

⑥찬다 때문에 잘못된 길을 갈 수 없음, 

⑦진(嗔) 때문에 잘못된 길을 갈 수 없음, 

⑧치(癡) 때문에 잘못된 길을 갈 수 없음, 

⑨두려움 때문에 잘못된 길을 갈 수 없음


• mūlapariyāyasuttaṃ(M1)[근본 법문의 경] 


ㅡ 사대(四大)~열반을 아우르는 모든 존재에 대한 인식과 행위에 대한 범부(凡夫)-유학(有學)-아라한(阿羅漢)-여래(如來)의 차이를 설명함. 이때, 아라한은 존재에 대해 ①완전히 알고 ②탐(貪)-진(嗔)-치(癡)를 떠났고, 여래는 존재에 대해 ①완전히 알고 ②nandi가 고(苦)의 뿌리라고 알아서 존재[bhava]로부터 생(生)이 있고, 누적된 것[bhūta]에게 노(老)-사(死)가 있다고 앎. 그래서 ‘여래는 갈애의 완전한 부숨-이탐(離貪)-소멸(消滅)-포기-놓음에 의해서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깨달았다.’고 말함.


 ; 범부 ㅡ 법에 인도되지 않았음 → 존재를 즐김. 완전히 알지 못했기 때문.

   유학 ㅡ 존재를 실다운 지혜로 잘 앎

          → 즐기지 않아야 함 → 완전히 알아야 하기 때문.

   아라한 ㅡ 존재를 실다운 지혜로 잘 앎.

          → 즐기지 않음. → ①완전히 알고 ②탐(貪)-진(嗔)-치(癡)를 떠났기 때문.

   여래 ㅡ 존재를 실다운 지혜로 잘 앎.

          → 즐기지 않음. → ①완전히 알고 ②nandi가 고(苦)의 뿌리라고 알기 때문.


• sandakasuttaṃ (MN 76) 


ㅡ 범행(梵行) 아닌 것과 안식을 주지 못하는 범행(梵行) 그리고 범행(梵行)의 구분


→ 1) 아라한이 범할 수 없는 다섯 가지 : ①고의로 살아있는 생명을 죽일 수 없음, ②도둑질이라 불리는 주지 않은 것을 가질 수 없음, ③성행위를 할 수 없음, ④알면서 거짓을 말할 수 없음, ⑤이전에 재가자였을 때처럼 쌓아두고 소유의 삶을 즐길 수 없음.


→ 2) 아라한에게는 언제나 ‘나의 번뇌들이 다했다.’는 지(知)와 견(見)이 현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반조할 때 ‘나의 번뇌들이 다했다.’라고 앎.


• bhikkhusuttaṃ (SN 17.23)[비구 경(S17:30)]


ㅡ 이득과 존경과 명성은 번뇌 다한 아라한인 비구에게도 장애가 됨. 

→ 지금여기의 행복한 머묾[diṭṭhadhammasukhavihāra]에 장애가 됨.


• yamakasuttaṃ (SN 22.85)[야마까 경]


ㅡ 사리뿟따 존자가 ‘내가 세존이 설하신 법을 이해하기로는 번뇌 다한 비구는 몸이 무너지면 단멸하고 파멸하여 죽은 후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야마까 비구의 견해를 바로 잡아 줌. 


→ “도반 야마까여, 만일 그대에게 묻기를 ‘도반 야마까여, 번뇌 다한 아라한인 비구는 몸이 무너져 죽은 후에는 어떻게 됩니까?’라고 한다면 그대는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도반이여, 만일 제게 묻기를 ‘도반 야마까여, 번뇌 다한 아라한인 비구는 몸이 무너져 죽은 후에는 어떻게 됩니까?’라고 한다면 저는 이렇게 설명하겠습니다. ‘도반들이여, 색(色)은 무상(無常)합니다.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요 괴로움인 것은 소멸되었고 사라졌습니다. 수(受)는 … 상(想)은 … 행(行)은 … 식(識)은 무상(無常)합니다.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요 괴로움인 것은 소멸되었고 사라졌습니다.’ 도반이여, 저는 이렇게 대답하겠습니다.”


• uṇṇābhabrāhmaṇasuttaṃ (SN 51.15)[운나바 바라문 경]


ㅡ ‘번뇌가 다했고 삶을 완성했으며 해야 할 바를 했고 짐을 내려놓았으며 최고의 선(善)을 성취했고 존재의 족쇄를 완전히 부수었으며 바른 무위의 앎으로 해탈한 아라한’인 비구에게는 전에는 아라한과를 얻기 위한 찬다-정진-마음-관찰이 있었지만 아라한과를 얻은 뒤에는 가라앉음.


• ambapālivanasuttaṃ (SN 52.9)[암바빨리 숲 경]


ㅡ ‘번뇌가 다했고 삶을 완성했으며 해야 할 바를 했고 짐을 내려놓았으며 최고의 선(善)을 성취했고 존재의 족쇄를 완전히 부수었으며 바른 무위의 앎으로 해탈한 아라한’인 비구는 사념처에 잘 확립된 마음[심(心)]으로 대부분 머묾.


• catumahārājasuttaṃ (AN 3.37)[사대왕 경]


ㅡ “cātuddasiṃ pañcadasiṃ, yā ca pakkhassa aṭṭhamī.

    pāṭihāriyapakkhañca, aṭṭhaṅgasusamāgataṃ.

    uposathaṃ upavaseyya, yopissa mādiso naro”ti. 

 

    나처럼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14일, 15일, 상현과 하현의 8일에

    여덟 가지를 갖춘 포살을 준수해야 하고

    연속적으로 행하는 [포살]을 해야 하리.


탐진치(貪嗔癡)에서 벗어나지 못한 신들의 왕 삭까가 이 게송을 읊은 것은 잘못 읊은 것이고, 탐진치에서 벗어난 ‘번뇌가 다했고 삶을 완성했으며 해야 할 바를 했고 짐을 내려놓았으며 최고의 선(善)을 성취했고 존재의 족쇄를 완전히 부수었으며 바른 무위의 앎으로 해탈한 아라한’이 이 게송을 읊는 것은 적절함.


이어지는 경[dutiyacatumahārājasuttaṃ (AN 3.38)]에서는 신들의 왕 삭까는 생(生)-노(老)-사(死)-수비고우뇌(愁悲苦憂惱)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고 아라한은 벗어났기 때문이라고 함.


• khemasuttaṃ (AN 6.49)[케마 경]


ㅡ 케마 존자는 세존에게 “‘번뇌가 다했고 삶을 완성했으며 해야 할 바를 했고 짐을 내려놓았으며 최고의 선(善)을 성취했고 존재의 족쇄를 완전히 부수었으며 바른 무위의 앎으로 해탈한 아라한’인 비구는 ‘내가 더 낫다’라는 것이 있다거나 ‘나와 동등하다’라는 것이 있다거나 ‘내가 더 못하다’라는 것이 있다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고,


수마나 존자는 “‘번뇌가 다했고 삶을 완성했으며 해야 할 바를 했고 짐을 내려놓았으며 최고의 선(善)을 성취했고 존재의 족쇄를 완전히 부수었으며 바른 무위의 앎으로 해탈한 아라한’인 비구는 ‘내가 더 낫다’라는 것이 없다거나 ‘나와 동등하다’라는 것이 없다거나 ‘내가 더 못하다’라는 것이 없다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함.


세존께서는 침묵으로 동의하신 뒤에 “좋은 가문의 아들들은 이와 같이 무위(無爲)의 앎을 설명한다. 의미는 분명히 말하지만 자기 자신을 드러내지는 않는다.”라고 함.


• soṇasuttaṃ (AN 6.55)[소나 경]


ㅡ 아라한과를 얻은 소나 존자는 세존에게 무위(無爲)의 앎을 말씀드림.


“세존이시여, ‘번뇌가 다했고 삶을 완성했으며 해야 할 바를 했고 짐을 내려놓았으며 최고의 선(善)을 성취했고 존재의 족쇄를 완전히 부수었으며 바른 무위의 앎으로 해탈한 아라한’인 비구는 여섯 가지 경우로 이끌려 있습니다. ㅡ 출리(出離)로 이끌렸고, 여읨으로 이끌렸고, 진에(瞋恚) 없음으로 이끌렸고, 갈애의 부숨으로 이끌렸고, 집착의 부숨으로 이끌렸고, 어리석지 않음으로 이끌렸습니다.”


→ 이런 이끌려 있음은 탐(貪)-진(嗔)-치(癡)가 부수어졌기 때문임. 


→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이 강하게 나타나더라도 그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하고 그의 마음에 섞이지 않아서 그의 마음은 안정되고 흔들림이 없는 상태에 도달하며 다시 사라짐을 관찰함.


• sutavāsuttaṃ (AN 9.7)[수따와 경]


ㅡ 수따와 유행승이 세존에게 ‘번뇌가 다했고 삶을 완성했으며 해야 할 바를 했고 짐을 내려놓았으며 최고의 선(善)을 성취했고 존재의 족쇄를 완전히 부수었으며 바른 무위의 앎으로 해탈한 아라한’인 비구는 ①고의로 살아있는 생명을 죽일 수 없음, ②도둑질이라 불리는 주지 않은 것을 가질 수 없음, ③성행위를 할 수 없음, ④알면서 거짓을 말할 수 없음, ⑤이전에 재가자였을 때처럼 쌓아두고 소유의 삶을 즐길 수 없음의 다섯 가지 경우를 범할 수 없다고 세존에게서 직접 배웠는데 바르게 이해한 것이냐고 질문함.


→ 세존은 바르게 이해한 것이라고 하면서 ‘번뇌가 다했고 삶을 완성했으며 해야 할 바를 했고 짐을 내려놓았으며 최고의 선(善)을 성취했고 존재의 족쇄를 완전히 부수었으며 바른 무위의 앎으로 해탈한 아라한’인 비구는 아홉 가지 경우를 범할 수 없다고 하는데, 앞의 다섯 가지에 ⑥찬다 때문에 잘못된 길을 갈 수 없음, ⑦진(嗔) 때문에 잘못된 길을 갈 수 없음, ⑧치(癡) 때문에 잘못된 길을 갈 수 없음, ⑨두려움 때문에 잘못된 길을 갈 수 없음을 더 설함.


• sajjhasuttaṃ (AN 9.8)


ㅡ 삿자 유행승으로 주인공만 바뀌어서 sutavāsuttaṃ과 같은 가르침이 설해짐.


2. 아라한의 성취 조건을 말하는 용례


• mahāvacchasuttaṃ (MN 73)[왓차 큰 경]


ㅡ 갈애가 버려졌고, 뿌리가 잘렸고, 윗부분이 잘린 야자수처럼 만들어졌고, 멸절되어 미래에 생겨나지 않은 법이 되었기 때문.


• kosambisuttaṃ (SN 12.68) [꼬삼비 경]


ㅡ 십이연기(十二緣起)에 의해 고집(苦集)과 고멸(苦滅)을 아는 것에 더해 ‘존재의 소멸이 열반이다[bhavanirodho nibbānan’ti]‘라고 알고 보는 자 즉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써 잘 본다고 해서 아라한인 것은 아님 


“도반 무실라여, 믿음과 다른 곳에, 개인적 좋아함과 다른 곳에, 구전과 다른 곳에, 마음의 일어남의 상태와 다른 곳에, 견해에 의한 통찰과 인내와 다른 곳에 개별적인 앎이 있습니까? ㅡ ‘생(生)을 조건으로 노사(老死)가 있다.’라고.” “도반 빠윗타여, 믿음과 다른 곳에, 개인적 좋아함과 다른 곳에, 구전과 다른 곳에, 마음의 일어남의 상태와 다른 곳에, 견해에 의한 통찰과 인내와 다른 곳에서 나는 이렇게 알고 이렇게 봅니다. ㅡ ‘생(生)을 조건으로 노사(老死)가 있다.’라고.”


~ “도반 무실라여, 믿음과 다른 곳에, 개인적 좋아함과 다른 곳에, 구전과 다른 곳에, 마음의 일어남의 상태와 다른 곳에, 견해에 의한 통찰과 인내와 다른 곳에 개별적인 앎이 있습니까? ㅡ ‘무명(無明)을 조건으로 행(行)이 있다.’라고.” “도반 빠윗타여, 믿음과 다른 곳에, 개인적 좋아함과 다른 곳에, 구전과 다른 곳에, 마음의 일어남의 상태와 다른 곳에, 견해에 의한 통찰과 인내와 다른 곳에서 나는 이렇게 알고 이렇게 봅니다. ㅡ ‘무명(無明)을 조건으로 행(行)이 있다.’라고.”


“도반 무실라여, 믿음과 다른 곳에, 개인적 좋아함과 다른 곳에, 구전과 다른 곳에, 마음의 일어남의 상태와 다른 곳에, 견해에 의한 통찰과 인내와 다른 곳에 개별적인 앎이 있습니까? ㅡ ‘생(生)의 멸(滅)로부터 노사(老死)의 멸(滅)이 있다.’라고.” “도반 빠윗타여, 믿음과 다른 곳에, 개인적 좋아함과 다른 곳에, 구전과 다른 곳에, 마음의 일어남의 상태와 다른 곳에, 견해에 의한 통찰과 인내와 다른 곳에서 나는 이렇게 알고 이렇게 봅니다. ㅡ ‘생(生)의 멸(滅)로부터 노사(老死)의 멸(滅)이 있다.’라고.”


~ “도반 무실라여, 믿음과 다른 곳에, 개인적 좋아함과 다른 곳에, 구전과 다른 곳에, 마음의 일어남의 상태와 다른 곳에, 견해에 의한 통찰과 인내와 다른 곳에 개별적인 앎이 있습니까? ㅡ ‘무명(無明)의 멸(滅)로부터 행(行)의 멸(滅)이 있다.’라고.” “도반 빠윗타여, 믿음과 다른 곳에, 개인적 좋아함과 다른 곳에, 구전과 다른 곳에, 마음의 일어남의 상태와 다른 곳에, 견해에 의한 통찰과 인내와 다른 곳에서 나는 이렇게 알고 이렇게 봅니다. ㅡ ‘무명(無明)의 멸(滅)로부터 행(行)의 멸(滅)이 있다.’라고.”


“도반 무실라여, 믿음과 다른 곳에, 개인적 좋아함과 다른 곳에, 구전과 다른 곳에, 마음의 일어남의 상태와 다른 곳에, 견해에 의한 통찰과 인내와 다른 곳에 개별적인 앎이 있습니까? ㅡ ‘유(有)의 멸(滅)이 열반(涅槃)이다.’라고.” “도반 빠윗타여, 믿음과 다른 곳에, 개인적 좋아함과 다른 곳에, 구전과 다른 곳에, 마음의 일어남의 상태와 다른 곳에, 견해에 의한 통찰과 인내와 다른 곳에서 나는 이렇게 알고 이렇게 봅니다. ㅡ ‘유(有)의 멸(滅)이 열반(涅槃)이다.’라고.”


“그러면 무실라 존자는 번뇌 다한 아라한입니까?”


이렇게 말하자 무실라 존자는 침묵하였다.


→ 나라다 존자가 대화를 이어받아 답함.


→ 우물 속의 물을 보고 ‘저기 물이 있다’라고 아는 것과 물을 길어 올려 마시는 것을 통해 갈증의 해소를 직접 경험하는 것은 다름[tassa ‘udakan’ti hi kho ñāṇaṃ assa, na ca kāyena phusitvā vihareyya].


→ 나라다 존자 : “그와 같이 나는 ‘존재의 소멸이 열반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써 잘 보았지만 나는 번뇌 다한 아라한이 아닙니다.”


• khemakasuttaṃ (SN 22.89)[케마까 경]


ㅡ “오취온(五取蘊)에서 어떤 것도 아(我)거나 아(我)에 속하는 것으로 관찰하지 않는다면 번뇌 다한 아라한입니까?”


“오취온(五取蘊)에서 어떤 것도 아(我)거나 아(我)에 속하는 것으로 관찰하지 않지만 번뇌 다한 아라한이 아닙니다. 나는 오취온(五取蘊)에서 ‘나는 있다’라는 자기화의 상태에 있지만 ‘이것이 나다’라고는 관찰하지 않습니다.”


“성스러운 제자에게 오하분결(五下分結)이 제거되었다 하더라도 오취온(五取蘊)에서 최소한으로 수반되는 ‘나는 있다’라는 자기화, ‘나는 있다’라는 찬다, ‘나는 있다’라는 잠재성향은 뿌리 뽑히지 않습니다. 그는 나중에 오취온(五取蘊)에서 일어남과 사라짐을 이어 보며 머뭅니다. ㅡ ‘이것이 색(色)이다. 이것이 색(色)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색(色)의 사라짐이다. 이것이 수(受) … 이것이 상(想) … 이것이 행(行) … 이것이 식(識)이다. 이것이 식(識)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식(識)의 사라짐이다.’라고. 그가 오취온(五取蘊)에서 일어남과 사라짐을 이어 보며 머물 때 그에게 오취온(五取蘊)에서 최소한으로 수반되는 ‘나는 있다’라는 자기화, ‘나는 있다’라는 찬다, ‘나는 있다’라는 잠재성향이 뿌리 뽑힙니다.”


• arahantasuttaṃ (SN 22.110) & (SN 23.8)


ㅡ 오취온(五取蘊)의 일어남-사라짐-매력(魅力)-위험(危險)-해방(解放)을 있는 그대로 안 뒤에 집착 없이 해탈했기[yathābhūtaṃ viditvā anupādāvimutto hoti] 때문에 ‘번뇌가 다했고 삶을 완성했으며 해야 할 바를 했고 짐을 내려놓았으며 최고의 선(善)을 성취했고 존재의 족쇄를 완전히 부수었으며 바른 무위의 앎으로 해탈한 아라한’이라고 불림.


[참고] sotāpannasuttaṃ (SN 22.109) & (SN 23.7)


ㅡ 오취온(五取蘊)의 일어남-사라짐-매력(魅力)-위험(危險)-해방(解放)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기[yathābhūtaṃ pajānāti] 때문에 ‘벌 받는 존재를 넘어섰고, 한 방향이고, 깨달음이 결정된 예류자(預流者)’라고 불림.


• paṭhamārahantasuttaṃ (SN 48.4)


ㅡ 다섯 가지 기능[믿음-정진-염(念)-정(定)-혜(慧)]의 매력(魅力)-위험(危險)-해방(解放)을 있는 그대로 안 뒤에 집착 없이 해탈했기[yathābhūtaṃ viditvā anupādāvimutto hoti] 때문에 ‘번뇌가 다했고 삶을 완성했으며 해야 할 바를 했고 짐을 내려놓았으며 최고의 선(善)을 성취했고 존재의 족쇄를 완전히 부수었으며 바른 무위의 앎으로 해탈한 아라한’이라고 불림.


[참고] paṭhamasotāpannasuttaṃ (SN 48.2)


ㅡ 다섯 가지 기능의 매력(魅力)-위험(危險)-해방(解放)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기[yathābhūtaṃ pajānāti] 때문에 ‘벌 받는 존재를 넘어섰고, 한 방향이고, 깨달음이 결정된 예류자(預流者)’라고 불림.


• dutiyārahantasuttaṃ (SN 48.5)


ㅡ 다섯 가지 기능의 일어남-사라짐-매력(魅力)-위험(危險)-해방(解放)을 있는 그대로 안 뒤에 집착 없이 해탈했기[yathābhūtaṃ viditvā anupādāvimutto hoti] 때문에 ‘번뇌가 다했고 삶을 완성했으며 해야 할 바를 했고 짐을 내려놓았으며 최고의 선(善)을 성취했고 존재의 족쇄를 완전히 부수었으며 바른 무위의 앎으로 해탈한 아라한’이라고 불림.


[참고] dutiyasotāpannasuttaṃ (SN 48.3)


ㅡ 다섯 가지 기능의 일어남-사라짐-매력(魅力)-위험(危險)-해방(解放)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기[yathābhūtaṃ pajānāti] 때문에 ‘벌 받는 존재를 넘어섰고, 한 방향이고, 깨달음이 결정된 예류자(預流者)’라고 불림.


• arahantasuttaṃ (SN 48.27)


ㅡ 여섯 가지 기능[안근(眼根)-이근(耳根)-비근(鼻根)-설근(舌根)-신근(身根)-의근(意根)]의 일러남-사라짐-매력(魅力)-위험(危險)-해방(解放)을 있는 그대로 안 뒤에 집착 없이 해탈했기[yathābhūtaṃ viditvā anupādāvimutto hoti] 때문에 ‘번뇌가 다했고 삶을 완성했으며 해야 할 바를 했고 짐을 내려놓았으며 최고의 선(善)을 성취했고 존재의 족쇄를 완전히 부수었으며 바른 무위의 앎으로 해탈한 아라한’이라고 불림.


[참고] sotāpannasuttaṃ (SN 48.26)


ㅡ 여섯 가지 기능의 일어남-사라짐-매력(魅力)-위험(危險)-해방(解放)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기[yathābhūtaṃ pajānāti] 때문에 ‘벌 받는 존재를 넘어섰고, 한 방향이고, 깨달음이 결정된 예류자(預流者)’라고 불림.


• arahantasuttaṃ (SN 48.33)


ㅡ 다섯 가지 기능[락근(樂根)-고근(苦根)-희근(喜根)-우근(憂根)-사근(捨根)]의 일어남-사라짐-매력(魅力)-위험(危險)-해방(解放)을 있는 그대로 안 뒤에 집착 없이 해탈했기[yathābhūtaṃ viditvā anupādāvimutto hoti] 때문에 ‘번뇌가 다했고 삶을 완성했으며 해야 할 바를 했고 짐을 내려놓았으며 최고의 선(善)을 성취했고 존재의 족쇄를 완전히 부수었으며 바른 무위의 앎으로 해탈한 아라한’이라고 불림.


[참고] sotāpannasuttaṃ (SN 48.32)


ㅡ 다섯 가지 기능의 일어남-사라짐-매력(魅力)-위험(危險)-해방(解放)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기[yathābhūtaṃ pajānāti] 때문에 ‘벌 받는 존재를 넘어섰고, 한 방향이고, 깨달음이 결정된 예류자(預流者)’라고 불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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