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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재] 주제2. 무엇을 위한 깨달음인가?

0 506 2018.03.02 20:20

주제2. 무엇을 위한 깨달음인가?


tayodhammasuttaṃ (AN 10.76)[세 가지 법 경]은 세 가지 법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여래(如來)]-아라한(阿羅漢)-정등각(正等覺)이 세상에 출현하지 않을 것이고 여래가 설한 법(法)과 율(律)도 세상에 드러나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즉 세 가지 법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여래-아라한-정등각이 세상에 출현하고 법과 율이 설해지는 이유라는 것입니다.


“tayome, bhikkhave, dhammā loke na saṃvijjeyyuṃ, na tathāgato loke uppajjeyya arahaṃ sammāsambuddho, na tathāgatappavedito dhammavinayo loke dibbeyya. 


그렇다면 세 가지 법은 무엇입니까? 경은 태어남-늙음-죽음[생(生)-노(老)-사(死)]의 세 가지가 그것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태어나고 늙고 죽는 현상이 세상에 있고, 우리가 그 현상에 적용받기 때문에 여래-아라한-정등각이 세상에 출현하여 법과 율을 설한다는 의미입니다.


katame tayo? jāti ca, jarā ca, maraṇañca — ime kho, bhikkhave, tayo dhammā loke na saṃvijjeyyuṃ, na tathāgato loke uppajjeyya arahaṃ sammāsambuddho, na tathāgatappavedito dhammavinayo loke dibbeyya. yasmā ca kho, bhikkhave, ime tayo dhammā loke saṃvijjanti tasmā tathāgato loke uppajjati arahaṃ sammāsambuddho, tasmā tathāgatappavedito dhammavinayo loke dibbati.


수비고우뇌(愁悲苦憂惱)[슬픔-비탄-고통-고뇌-절망] 등 세상에는 많은 불만족[고(苦)]의 문제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는 많은 스승들이 이런 문제들의 해소를 위해 가르침[법(法)과 율(律)]을 설합니다. 부처님도 그런 스승 중의 한 분이라고 해야 합니다.


그런데 왜 이 경은 부처님이 출현해야 하는 이유로 이 세 가지 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것입니까?


세상에 있는 많은 불만족[고(苦)]의 문제들은 대부분 다른 많은 스승들의 가르침에 의해서도 해소될 수 있는데, 이 세 가지 법의 문제만큼은 부처님 아닌 다른 어떤 스승의 가르침으로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함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법은 왜 부처님이 아니고는 해결할 수 없는 것입니까? 


일반적으로 스승들은 나[아(我)]의 삶에 수반되는 불만족에 대한 답을 제시합니다. 내가 세상을 상대로 살아가는 과정에서 생기는 문제의 해소입니다. 그런데 생(生)-노(老)-사(死)는 세상과의 관계에서 생기는 문제가 아닙니다. 오취온(五取蘊)으로 정의되는 삶에 내재한 문제입니다. 유신(有身)[sakkāya]이라 불리는, 몸과 함께하는 삶을 살아가는 중생인한 거부할 수 없는 내재한 문제인 것입니다.


십이연기(十二緣起)에 의하면, 생(生)은 유(有)[bhava-존재]를 조건으로 있게 됩니다. 유(有)[bhava-존재]로서의 삶에 생(生)과 노사(老死)가 있다는 것입니다. 경은 욕계(慾界)-색계(色界)-무색계(無色界)의 중생으로의 보(報)를 초래하는 행위의 결과로 식(識)이 머물고 쌓이면 명색(名色)이 참여하여 새로운 유(有)[bhava-존재]를 구성(*)하는데, 욕유(慾有)-색유(色有)-무색유(無色有)입니다. 이때, 이 몸으로의 삶의 기간 즉 살아있는 동안에는 bhūta(누적된 것)[식(識)과 명색(名色)]이라고 불리고. 죽으면 몸을 포함하는 명색(名色)은 버려지고 몸 따라 죽지 않는 식(識)이 새로운 명색(名色)을 만나 새로운 bhūta(누적된 것)[식(識)과 명색(名色)]이 되어 다음 생을 살아가는 것이 생(生)[태어남]입니다. 이렇게 생(生)은 유(有)를 조건으로 있게 되는 것입니다. 


(*) paṭhamabhavasuttaṃ(AN 3.77)[존재 경1], dutiyabhavasuttaṃ(AN 3.78)[존재 경2],

     atthirāgasuttaṃ(SN 12.64)[탐(貪) 있음 경] 참조


특히, mūlapariyāyasuttaṃ(M1)[근본 법문의 경]은 「존재[bhava]로부터 생(生)이 있고, 누적된 것[bhūta]에게 노(老)-사(死)가 있다[‘nandī dukkhassa mūlan’ti — iti viditvā ‘bhavā jāti bhūtassa jarāmaraṇan’ti]」라고 하는데, 유(有)를 조건으로 생(生) 즉 태어나면 그 삶의 기간에는 다시 누적된 것[bhūta]로서 노사(老死)의 과정을 산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이제 ‘무엇을 위한 깨달음인가?’의 주제는 ‘나’에 대한 이해의 차이라는 관점에서 다시 정리됩니다. 다른 스승들은 ‘나’에 대한 본질[sat-유(有)-atman]이라는 설정 위에서 삶의 문제를 설명하였지만 설정된 값은 ‘나’ 자신의 문제[내재한 불만족]에 대해서는 답을 주지 못합니다. 오직 부처님만이 아무런 설정 없이 있는 그대로 ‘나’를 보아내서 알려주는데, bhava[유(有)-존재]입니다. 그런데 bhava는 본질이 아닙니다. 번뇌 또는 무명으로부터 비롯된 오취온(五取蘊)이어서 유신(有身)이라고 불리는 불완전한 존재 상태입니다. 그런데 중생들은 이런 bhava를 참된 것[아(我)-asmi]이라고 오해[māna-자기화]하기 때문에 사실과의 괴리(乖離)에서 고(苦)가 생깁니다. 다른 스승들과의 유(有) 즉 존재에 대한 시각의 차이를 분명히 드러내 주는 것입니다.


• 나는 누구인가? ㅡ 존재[유(有)-bhava]

                 ㅡ 「과정의 불완전을 조건으로 형성된 불완전한 존재」


그러나 이렇게 유(有)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관찰은 유(有)[bhava]에 내재한 문제에 대한 답을 줍니다. 그래서 생(生)-노(老)-사(死)의 문제를 해소할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오취온(五取蘊)으로의 고달픈 삶을 모면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유(有) 즉 존재에 대한 지견(知見)의 차이! 이것이 부처님과 다른 스승들의 차이이고, 이것이 불교(佛敎)가 으뜸 된 가르침, 으뜸 된 종교(宗敎)인 이유입니다.


한편, 십이연기(十二緣起)는 괴로움의 발생의 조건 관계를 밝힌 부처님 깨달음의 중심 교리인데, 이런 이해에 의하면 존재[유(有)-bhava]를 오취온(五取蘊) 또는 유신(有身)이라고 설명하는 위에서 존재로서의 삶에 수반되는 현상으로의 생(生)-노사(老死) 그리고 존재가 불완전한 상태로 생겨나는 과정의 조건 관계로서의 무명(無明)~취(取)로 구성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존재를 중심에 둔 십이연기 - 약화.png


※ 첨부 「존재[유(有)-bhava]를 중심에 둔 십이연기(十二緣起)」 참조


경(經)은 다시 존재로 이끄는 것[ponobbhavikā] 즉 식(識)을 머물게 하는 조건들을 알려줍니다. ①번뇌[루(漏)], ②네 가지 속박[소유-존재-견해-무명의 속박], ③악업(惡業), ④갈애[애(愛)]인데, 번뇌를 근원으로 하는 삶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다시 존재로 이끄는 것들은 번뇌를 근원으로 하여 삶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불선법(不善法)들입니다.


아마도 스승들의 가르침은 소유의 속박에 따르는 문제를 해소하고 존재를 오롯이 드러냄으로써 구체적 행위의 영역에서 악업(惡業)을 짓지 않는 존재[유(有)-bhava]로서의 삶의 완성을 목적으로 한다고 할 것입니다. 이때, 이 존재는 참된 것 즉 자아[아(我)-sat/ atman/attan]라고 설정되는데, 스승들의 눈이 존재에 내재한 문제의 조건 관계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해야 합니다. 우리 법회에서는 이런 설정 위에서 삶의 문제를 해소하는 노력을 아(我)의 산(山)[아산(我山)]을 오른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수행자 고따마도 아산(我山)을 올랐습니다. 그러나 그 정상에서도 삶의 문제가 완전히 해소되지 못함을 자각합니다. 보디 왕자 경(M85) 등은 무소유처(無所有處)와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라는 존재의 최상위에 오른 수행자 고따마의 감상을 이렇게 전합니다. ㅡ 「이 법은 염오(厭惡)로 이탐(離貪)으로 소멸(消滅)로 가라앉음으로 실다운 지혜로 깨달음으로 열반으로 이끌지 못한다. 단지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에 다시 태어남으로 이끌 뿐이다.」 그 법에 만족하지 못하고 낙담하여 떠난 수행자 고따마는 다시 고행(苦行)을 통해 삶의 문제의 완전한 해소를 시도하지만 고행(苦行) 또한 바른 방법이 되지 못함을 자각하고 이렇게 말합니다. ㅡ 「과거의 어떤 사문들이나 바라문들이 느꼈던 격렬하고 괴롭고 혹독하고 사무치고 호된 느낌 중에서 이것을 능가하는 다른 것이 더 있지 않았다. 미래의 어떤 사문들이나 바라문들이 느낄 괴롭고 혹독하고 사무치고 호된 느낌 중에서 이것을 능가하는 다른 것이 더 있지 않을 것이다. 현재의 어떤 사문들이나 바라문들이 느끼는 격렬하고 괴롭고 혹독하고 사무치고 호된 느낌 중에서 이것을 능가하는 다른 것이 더 있지 않다. 그러나 나는 이 극심한 고행으로도 인간의 법을 능가하는 성자에게 어울리는 특별한 지(知)와 견(見)을 증득하지 못했다. 깨달음을 위한 다른 길이 없을까?」


마침내 다른 길을 찾은 수행자 고따마는 드디어 아산(我山) 너머에 있는 무아(無我)의 산(山)[무아산(無我山)]을 발견합니다. 아산(我山)을 오르는 과정에서 해결되지 않는 아(我)에 내재한 문제의 조건 관계[십이연기(十二緣起)]와 그 해소 과정[팔정도(八正道)]입니다. 


팔정도(八正道)라는 전혀 새로운 길을 따라 아(我)에 적용된 참된 것이라는 설정을 깨뜨리고 무아(無我)의 산(山)[bhava – 유(有) - 불완전한 존재의 선언]을 오른 것입니다. 번뇌의 부숨[누진(漏盡)]에 의해 존재-견해-무명의 속박에서 풀려나는 것이고, 갈애를 완전히 부수어 다시는 존재[bhava]로 이끌리지 않게 되는 과정입니다.


⇒ 첨부2-1. 「다시 존재로 이끄는 것[ponobbhavikā]」


[참고] 중(中)[majjha] - 삶의 현실을 꿰뚫는 것 → 삶의 중심(中心)


【삶의 현실】 「고(苦)는 십이연기의 조건관계를 통해 발생하고, 그 조건관계의 해소를 통해서 소멸한다[고멸(苦滅)]」 → 조건관계의 해소방법 = 팔정도(八正道) → 팔정도(八正道)의 실천 = 중도(中道)[majjhimā paṭipadā]


ete te ubho ante anupagamma majjhena tathāgato dhammaṃ deseti— ‘avijjāpaccayā, bhikkhave, saṅkhārā; saṅkhārapaccayā viññāṇaṃ; viññāṇapaccayā nāmarūpaṃ; nāmarūpapaccayā saḷāyatanaṃ; saḷāyatanapaccayā phasso; phassapaccayā vedanā; vedanāpaccayā taṇhā; taṇhāpaccayā upādānaṃ; upādānapaccayā bhavo; bhavapaccayā jāti; jātipaccayā jarāmaraṇaṃ sokaparidevadukkhadomanassupāyāsā sambhavanti. evametassa kevalassa dukkhakkhandhassa samudayo hoti. avijjāya tveva asesavirāganirodhā saṅkhāranirodho; saṅkhāranirodhā viññāṇanirodho; viññāṇanirodhā nāmarūpanirodho; nāmarūpanirodhā saḷāyatananirodho; saḷāyatananirodhā phassanirodho; phassanirodhā vedanānirodho; vedanānirodhā taṇhānirodho; taṇhānirodhā upādānanirodho; upādānanirodhā bhavanirodho; bhavanirodhā jātinirodho; jātinirodhā jarāmaraṇaṃ sokaparidevadukkhadomanassupāyāsā nirujjhanti. evametassa kevalassa dukkhakkhandhassa nirodho hotī”ti. 

 

“이러한 양 끝에 접근하지 않고 중(中)으로 여래는 법을 설한다. ㅡ ”무명(無明)을 조건으로 행(行)이, 행(行)을 조건으로 식(識)이, 식(識)을 조건으로 명색(名色)이, 명색(名色)을 조건으로 육입(六入)이, 육입(六入)을 조건으로 촉(觸)이, 촉(觸)을 조건으로 수(受)가, 수(受)를 조건으로 애(愛)가, 애(愛)를 조건으로 취(取)가, 취(取)를 조건으로 유(有)가, 유(有)를 조건으로 생(生)이, 생(生)을 조건으로 노사(老死)와 수비고우뇌(愁悲苦憂惱)가 생긴다. 이와 같이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의 일어남이 있다. 그러나 무명(無明)의 남김없이 빛바랜 소멸에서 행(行)의 소멸이, 행(行)의 소멸에서 식(識)의 소멸이, 식(識)의 소멸에서 명색(名色)의 소멸이, 명색(名色)의 소멸에서 육입(六入)의 소멸이, 육입(六入)의 소멸에서 촉(觸)의 소멸이, 촉(觸)의 소멸에서 수(受)의 소멸이, 수(受)의 소멸에서 애(愛)의 소멸이, 애(愛)의 소멸에서 취(取)의 소멸이, 취(取)의 소멸에서 유(有)의 소멸이, 유(有)의 소멸에서 생(生)의 소멸이, 생(生)의 소멸에서 노사(老死)와 수비고우뇌(愁悲苦憂惱)가 소멸한다. 이와 같이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의 소멸이 있다.”


이렇게 번뇌를 부수어 삶을 완성하고 다시는 존재로 이끌리지 않아 생(生)-노(老)-사(死)의 세 가지 법의 문제를 해소함으로써 수행자 고따마는 아라한(阿羅漢)이라고도 정등각(正等覺)이라고도 불리는 여래(如來)가 된 것입니다. 이렇게 여래(如來)-아라한(阿羅漢)-정등각(正等覺)이 출현하고, 이렇게 불교(佛敎)가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 가지 법은 오직 여래(如來)-아라한(阿羅漢)-정등각(正等覺)의 출현에 의해서만 해소되는 것이고, 이런 의미를 담아 경은 「생(生)-노(老)-사(死)의 세 가지 법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여래(如來)]-아라한(阿羅漢)-정등각(正等覺)이 세상에 출현하지 않을 것이고 여래가 설한 법(法)과 율(律)도 세상에 드러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 생(生)-노(老)-사(死)의 세 가지 법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의 의미 ㅡ 존재에 내재한 문제가 있다는 것 → 나는 참된 것으로의 아(我)[attan]가 아님 → 무아(無我)-비아(非我)[anattan] → 존재의 실상(實相) = 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참되지 않은 것]


부처님은 이렇게 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의 특성을 가지는 나를 오온(五蘊)[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에 집착[취(取)]된 상태 즉 오취온(五取蘊)으로 설명하는데, 색(色) 즉 몸과 함께한 상태입니다[유신(有身)-sakkāya]. 그리고 삶에 수반되는 불만족[고(苦)]를 포괄할 때 오취온고(五取蘊苦)라고 합니다. 삶의 과정에 수반되는 고(苦)와 유신(有身)에 내재한 고(苦)를 포괄하여 정의하는 것입니다.


이때, 깨달음은 정의됩니다. 삶의 과정에 수반되는 고(苦)의 소멸과정[아산(我山)]에 이어지는 내재한 고(苦)의 소멸과정[무아산(無我山)]입니다. 오취온(五取蘊)으로의 행복한 삶에 이어 오취온(五取蘊)의 상태를 모면하는 것이 바로 깨달음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위한 깨달음인가?」의 질문은 이런 답을 가집니다. ㅡ 「오취온(五取蘊)의 모면을 위한 깨달음! → 다시 존재가 되지 않음 → 생(生)-노(老)-사(死) 없음 → 윤회(輪迴)에서 벗어남」 


다시 말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이 이 세 가지 법의 문제만을 해소하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 이 세 가지의 문제가 해소되기 위해서는 수비고우뇌(愁悲苦憂惱)[슬픔-비탄-고통-고뇌-절망] 등 삶에 수반되는 모든 문제의 해소가 선행(先行) 되어야 합니다. 마치 속옷을 갈아입기 위해서는 겉옷부터 벗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이 세 가지 법의 문제를 해소할 수 있다는 것은 삶에 수반되는 모든 문제가 해소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만, 다른 스승들의 가르침으로는 여기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이 가르침을 완전한 가르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경은 이어서 탐(貪)과 진(嗔)과 치(癡)의 세 가지 법을 제거하지 못하면 생(生)-노(老)-사(死)의 세 가지 법을 제거할 수 없다고 합니다. 탐진치(貪嗔癡)가 바로 생(生)-노(老)-사(死)의 원인이어서 탐진치(貪嗔癡)를 제거하는 일을 통해서 이 가르침은 생(生)-노(老)-사(死)의 문제를 해소한다고 알려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탐진치(貪嗔癡)의 문제를 완전히 해소한 자가 번뇌 다한 아라한(阿羅漢) 즉 깨달음을 성취한 자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위한 깨달음인가?’의 질문은


  「탐진치(貪嗔癡)를 부숨으로써 생(生)-노(老)-사(死)의 문제에서 벗어나기 위한 깨달음」


이라는 확장된 답을 갖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한 깨달음은 생(生)-노(老)-사(死)의 문제 즉 윤회(輪迴)에서 벗어나기 위한 깨달음입니다. 이것이 삶의 현실에 대한 통찰 위에서 중생으로의 삶에 수반되는 고(苦)의 문제를 해소[고멸(苦滅)]하기 위한 가르침이고 그 완성으로의 깨달음인 것입니다.


깨달음에 어떤 환상도 얹지 않아야 합니다. 불교는 형이상학(形而上學)이 아닙니다. 오직 사는 이야기 즉 삶의 현실에 대한 통찰 위에서 삶에 수반되는 문제의 해소를 위한 가르침인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말합니다. ㅡ ‘나는 오직 고(苦)와 고멸(苦滅)을 말한다. <뱀의 비유 경(M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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