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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재] 1. takka[갈애의 형성 또는 자기화(自己化) 과정]

0 1,259 2018.03.02 23:06

1. takka[갈애의 형성 또는 자기화(自己化) 과정] ㅡ 「인식을 가공하여 행위로 연결하는 매개 과정」


부처님이 깨달음을 성취한 후 법을 설할 것인지 고민하는 장면은 유명합니다. 범천(梵天)의 권청(勸請)이라고 불리는 이 장면은 법을 설해달라는 사함빠띠 범천의 요청을 받아들여 법을 설하기로 결정하는 과정입니다. 이때, 부처님의 고민은 이렇게 나타납니다.


“tassa mayhaṃ, bhikkhave, etadahosi — ‘adhigato kho myāyaṃ dhammo gambhīro duddaso duranubodho santo paṇīto atakkāvacaro nipuṇo paṇḍitavedanīyo. ālayarāmā kho panāyaṃ pajā ālayaratā ālayasammuditā. ālayarāmā kho panāyaṃ pajā ālayaratāya ālayasammuditāya duddasaṃ idaṃ ṭhānaṃ yadidaṃ — idappaccayatā paṭiccasamuppādo. idampi kho ṭhānaṃ duddasaṃ yadidaṃ — sabbasaṅkhārasamatho sabbūpadhipaṭinissaggo taṇhākkhayo virāgo nirodho nibbānaṃ. ahañceva kho pana dhammaṃ deseyyaṃ, pare ca me na ājāneyyuṃ, so mamassa kilamatho, sā mamassa vihesā’ti.


비구들이여, 그런 나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 ‘내가 성취한 이 법은 심오하고, 보기 어렵고, 깨닫기 어렵고, 평화롭고, 숭고하고, takka[갈애의 형성 또는 자기화(自己化) 과정]의 영역을 넘어섰고, 독창적이고, 현자에게만 경험될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집착의 경향을 즐기고 집착의 경향을 좋아하고 집착의 경향을 기뻐한다. 집착의 경향을 즐기고 집착의 경향을 좋아하고 집착의 경향을 기뻐하는 사람들은 이런 토대 즉 이것의 조건성인 연기(緣起)를 보기 어렵다. 또한 이러한 토대 즉 모든 행(行)들의 그침이고, 모든 재생을 초래하는 붙잡음을 놓음이고, 갈애의 부숨이고, 이탐(離貪)이고, 소멸(消滅)이고, 열반(涅槃)을 보기 어렵다. 그러니 내가 이 법을 설한다 해도 저들이 알지 못한다면 그것은 나만 피로하고 나만 불편해질 것이다.’라고.


pāsarāsisuttaṃ (MN 26)[성구경] & bodhirājakumārasuttaṃ (MN 85)[왕자 보디의 경] & brahmāyācanasuttaṃ (SN 6.1)[범천의 권청 경]에서 반복되는 이 장면은 mahāpadānasuttaṃ (DN 14)[대전기경]에서는 위빳시 부처님의 일화로도 나타납니다.


이 장면은 부처님이 성취한 법[내가 성취한 이 법]의 특성과 중생들의 특성을 단적으로 비유해 줍니다.


• 부처님이 성취한 법 ㅡ 「심오하고, 보기 어렵고, 깨닫기 어렵고, 평화롭고, 숭고하고, takka[갈애의 형성 또는 자기화(自己化) 과정]의 영역을 넘어섰고, 독창적이고, 현자에게만 경험될 수 있는 법」


• 중생의 특성 ㅡ 「집착의 경향[ālaya]을 즐기고 집착의 경향을 좋아하고 집착의 경향을 기뻐함」


• 이 법의 토대 ㅡ ①이것의 조건성인 연기(緣起), ②모든 행(行)들의 그침이고, 모든 재생을 초래하는 붙잡음을 놓음이고, 갈애의 부숨이고, 이탐(離貪)이고, 소멸(消滅)이고, 열반(涅槃)


• 중생들은 이 법의 토대를 보기 어려움.


이때, 부처님이 성취한 법은 분석되는데, ‘심오하고, 보기 어렵고, 깨닫기 어렵고, 평화롭고, 숭고하고, 독창적이고, 현자에게만 경험될 수 있는’은 어떤 것에 대한 수식이고, 그 어떤 것은 ‘takka[갈애의 형성 또는 자기화(自己化) 과정]의 영역을 넘어섰고’입니다. 즉 ‘takka의 영역을 넘어선 법’에 대해 ‘심오하고, 보기 어렵고, 깨닫기 어렵고, 평화롭고, 숭고하고, 독창적이고, 현자에게만 경험될 수 있는 것’이라고 수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1) 부처님이 성취한 법의 본질은 ‘takka[갈애의 형성 또는 자기화(自己化) 과정]의 영역을 넘어섬’이고, 


2)‘심오하고, 보기 어렵고, 깨닫기 어렵고, 평화롭고, 숭고하고, 독창적이고, 현자에게만 경험될 수 있다.’고 수식되는 


3)이 법은 토대를 가지는데 ①이것의 조건성인 연기(緣起), ②모든 행(行)들의 그침이고, 모든 재생을 초래하는 붙잡음을 놓음이고, 갈애의 부숨이고, 이탐(離貪)이고, 소멸(消滅)이고, 열반(涅槃)


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부처님이 성취한 법의 본질 즉 깨달음의 중심 개념인 ‘takka[갈애의 형성 또는 자기화(自己化) 과정]의 영역을 넘어섬’은 무엇입니까?


삶의 메커니즘은 여기에 답을 주는데, vitakka[vi + takka] 즉 ‘takka로부터의 떠남’에 대한 정의입니다.


삶은 인식과 행위의 반복 순환 과정입니다. 인식한 대상에게 행위하고, 행위는 다시 인식으로 돌아가 삶의 질을 결정합니다. 그런데 이런 인식과 행위의 연결 과정에는 매개가 있습니다. 


행위를 인식으로 되돌려 연결하는 매개역할은 찬다[chanda – 욕(欲)]의 몫입니다. 찬다를 매개로 하는 행위의 부대(附帶) 가운데 육내입처(六內入處)가 육외입처(六外入處)를 분별하여 아는 작용이 인식입니다. 이때, 이 3자 간의 과정에서 대상을 주목하여 받아들이는 작용을 작의(作意)[manasikāra]라고 하는데, 인식의 출발입니다. 


인식을 행위로 연결하는 매개역할을 하는 과정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매개는 단순한 매개가 아닙니다. 대상에 대한 인식을 가공하여 행위로 연결하는 것인데, 이렇게 가공된 인식은 자기화[māna – 자만(自慢)]을 포함하는 것으로의 갈애[taṇhā - 애(愛)]입니다. 


※ 인식의 결과인 식(識)은 가공 과정에서 두 번 몸집을 부풀려 애(愛)가 됩니다. 애(愛)는 욕애(慾愛)[소유의 갈애]-유애(有愛)[존재의 갈애]-무유애(無有愛)[존재 않음의 갈애]로 제시되는데, 이때, 유애(有愛)[존재의 갈애]를 자기화[māna – 자만(自慢)]이라고 이해하였습니다. 그래서 인식의 가공을 위한 이 과정을 「애(愛)의 형성 또는 자기화 과정」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특히, 이 과정은 어떤 가공이 행해지느냐에 따라 삶의 질을 결정하기 때문에 삶을 이해하고 향상으로 이끌기 위한 중심 자리가 됩니다.


애(愛)의 분류.png

 

 

가공된 인식 즉 자기화 된 갈애는 행위하고, 다시 순환적으로 인식으로 되돌려짐으로써 삶에 연속성을 부여하게 됩니다. 이때, 행위의 출발을 지칭하는 용어도 있는데, 위딱까[vitakka – 심(尋)]입니다. 위딱까는 [의도-기대-지향]의 과정을 거쳐서 사유(思惟)[saṅkappa]로 연결됩니다.


그런데 행위의 출발을 왜 위딱까라고 하는지는 잘 설명되지 않습니다. 다만, 조어적 분석으로는 vi + takka입니다. ‘vi-’는 여러 용례를 가지지만 우선적으로는 분리를 뜻하는 접두사입니다. 그래서 vitakka는 ‘takka로부터의 떠남’입니다.


이렇게 행위의 출발을 takka로부터의 떠남이라고 말하는 것은 「takka가 대상에 대한 인식을 가공하여 행위로 연결하는 매개 과정」이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그런데 중생에게서 삶은 집착의 경향[ālaya]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takka가 갈애의 형성과정이고, 자기화의 과정이 되는 것입니다. 무아(無我)인 나에 대한 아(我)라는 거짓 설정입니다. 


이제 부처님이 성취한 법의 본질 즉 깨달음의 중심 개념인 atakka 즉 ‘takka의 영역을 넘어섬’을 정의할 수 있습니다. 중생의 삶을 지배하는 집착의 경향[ālaya]을 극복함으로써 갈애를 형성하지 않고 자기화 되지 않은 삶 그래서 아(我)라는 거짓 설정을 해소하고 무아(無我)를 회복하여 집착 없이 해탈하는 것입니다. 이때, 집착의 경향[ālaya]은 상(想)[saññā]의 병듦 즉 번뇌[āsava - 루(漏)]이고 잠재성향[anusaya]입니다.

 

takka - 그림.png

 


이렇게 takka와 vitakka는 서로의 의미를 상호의존적으로 설명해줍니다.


※ 께왓따 경(D11)과 상가라와 경(A3:60)은 가르침의 비상(非常)함을 말하는데, 「이와 같이 위딱까 하고 이와 같이 위딱까 하지 마시오. 이와 같이 작의(作意)하고 이와 같이 작의하지 마시오. 이것은 버리고 이것은 구족하여 머무시오.」입니다. 행위의 출발자리인 위딱까와 인식의 출발 자리인 작의(作意)에 대한 기준을 제시하고 이어서 버릴 것과 구족할 것을 말하는데, 버릴 것은 다섯 가지 장애고 구족할 것은 바른 삼매에 이어지는 누진(漏盡) 즉 번뇌의 부숨입니다. 


이때, 바른 삼매에 이어지는 누진(漏盡)은 인식이 가공되는 내적인 영역 즉 takka의 제어입니다. 인식을 가공할 때 번뇌[루(漏)]의 작용을 ①억제하고, ②완전히 제거함으로써 갈애를 형성하지 못하고 자기화 되지 못하도록 하는 과정인 것입니다.


이렇게 부처님의 가르침은 ①인식과 ②행위 그리고 ③인식의 가공 과정의 제어에 그 중심을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르침의 중심 - [인식-행위-인식의 가공].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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