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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재] 2. atakka ㅡ takka[갈애의 형성 또는 자기화(自己化) 과정]을 넘어섬

0 698 2018.03.02 23:12

2. atakka ㅡ takka[갈애의 형성 또는 자기화(自己化) 과정]을 넘어섬


asmi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atthi의 1인칭 단수 활용입니다. atthi가 영어로는 be동사이기 때문에 이 단어는 ‘i am!’이 됩니다. ‘나는 있다.’입니다.


그런데 중생에게서 asmi 즉 ‘i am’은 상락아정(常樂我淨)의 전도된 상(想) 즉 무명루(無明漏)[무명(無明)의 번뇌]의 영향을 받는 상태이기 때문에 여기서의 나는 참된 것입니다. 그러나 참된 것으로의 나는 설정된 것이지 사실이 아닙니다. 참되지 않은 나에 대한 참된 것이라는 설정은 삶의 문제의 근원이 됩니다.


⇒ samanupassanāsuttaṃ(SN 22.47)[관찰 경] 참조


이렇게 번뇌의 영향으로 참되지 않은 존재를 참된 것으로 잘못 설정하는 것이 자기화[māna – 자만(自慢)]이고, 유애(有愛)[존재의 갈애]입니다. 그리고 이런 설정에 의해 자기화 된 삶 즉 갈애가 전제된 삶에서 고(苦)의 발생과정을 설명하는 것이 십지연기(十支緣起)이고, 사식(四食)의 교리와 대응합니다. 이때, 대응하는 대상은 nimitta[상(相)]입니다.


그런가하면 자기화 즉 갈애의 형성과정을 포함해서 고(苦)의 발생과정을 설명하는 것은 십이연기(十二緣起)이고, 오취온(五取蘊)의 교리와 대응합니다. 이때, 대응하는 대상은 자기화의 과정 즉 takka 내면의 과정에서는 cittassa nimitta[심상(心相)]이고, 자기화 된 삶의 영역 즉 십지연기(十支緣起)의 영역에서는 nimitta[상(相)]입니다. cittassa nimitta[심상(心相)]을 대상으로 자기화하여 nimitta[상(相)]을 대상으로 세상을 사는 것입니다.


구분

고집(苦集)

대응 교리

십지연기(十支緣起)

자기화를 전제

유애(有愛)

; nimitta 대상

사식(四食) 단식(段食)-촉식(觸食)-의사식(意思識)-식식(識食)

십이연기(十二緣起)

자기화의 과정 포함

; cittassa nimitta

& nimitta 대상

오취온(五取蘊) 색취온(色取蘊)-수취온(受取蘊)-상취온(想取蘊)-행취온(行取蘊)-식취온(識取蘊)


그런데 asmi는 삶의 골격을 이루는 자리에 반복 사용됩니다.


• sammādiṭṭhisuttaṃ (MN 9)


“yato kho, āvuso, ariyasāvako evaṃ akusalaṃ pajānāti, evaṃ akusalamūlaṃ pajānāti, evaṃ kusalaṃ pajānāti, evaṃ kusalamūlaṃ pajānāti, so sabbaso rāgānusayaṃ pahāya, paṭighānusayaṃ paṭivinodetvā, ‘asmī’ti diṭṭhimānānusayaṃ samūhanitvā, avijjaṃ pahāya vijjaṃ uppādetvā, diṭṭhevadhamme dukkhassantakaro hoti — ettāvatāpi kho, āvuso, ariyasāvako sammādiṭṭhi hoti, ujugatāssa diṭṭhi, dhamme aveccappasādena samannāgato, āgato imaṃ saddhamman”ti. 


도반들이여, 성스러운 제자가 이렇게 무익(無益)을 분명히 알고, 이렇게 무익(無益)의 뿌리를 분명히 알고, 이렇게 유익(有益)을 분명히 알고 이렇게 유익(有益)의 뿌리를 분명히 알 때, 그는 완전하게 탐(貪)의 잠재성향을 버리고, 저항의 잠재성향을 제거하고, ‘나는 있다!’라는 견해와 자기화와 잠재성향을 뿌리 뽑고, 무명(無明)을 버리고 명(明)을 생기게 하고서 지금여기에서 괴로움을 끝냅니다. ㅡ 도반들이여, 그만큼 성스러운 제자는 바른 견해이고 올곧은 견해입니다. 가르침들을 확실한 믿음에 의해 구족한 자이고, 이 바른 가르침에게 온 자입니다.


• khemakasuttaṃ (SN 22.89)


“kiñcāpi, āvuso, ariyasāvakassa pañcorambhāgiyāni saṃyojanāni pahīnāni bhavanti, atha khvassa hoti — ‘yo ca pañcasu upādānakkhandhesu anusahagato asmīti māno, asmīti chando, asmīti anusayo asamūhato. so aparena samayena pañcasu upādānakkhandhesu udayabbayānupassī viharati — iti rūpaṃ, iti rūpassa samudayo, iti rūpassa atthaṅgamo; iti vedanā. iti saññā. iti saṅkhārā. iti viññāṇaṃ, iti viññāṇassa samudayo, iti viññāṇassa atthaṅgamo’ti. tassimesu pañcasu upādānakkhandhesu udayabbayānupassino viharato yopissa hoti pañcasu upādānakkhandhesu anusahagato ‘asmī’ti, māno ‘asmī’ti, chando ‘asmī’ti anusayo asamūhato, sopi samugghātaṃ gacchati. 


도반들이여, 성스러운 제자에게 오하분결(五下分結)이 제거되었다 하더라도 오취온(五取蘊)에서 최소한으로 수반되는 ‘나는 있다’라는 자기화, ‘나는 있다’라는 찬다, ‘나는 있다’라는 잠재성향은 뿌리 뽑히지 않습니다. 그는 나중에 오취온(五取蘊)에서 일어남과 사라짐을 이어 보며 머뭅니다. ㅡ ‘이것이 색(色)이다. 이것이 색(色)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색(色)의 사라짐이다. 이것이 수(受) … 이것이 상(想) … 이것이 행(行) … 이것이 식(識)이다. 이것이 식(識)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식(識)의 사라짐이다.’라고. 그가 오취온(五取蘊)에서 일어남과 사라짐을 이어 보며 머물 때 그에게 오취온(五取蘊)에서 최소한으로 수반되는 ‘나는 있다’라는 자기화, ‘나는 있다’라는 찬다, ‘나는 있다’라는 잠재성향이 뿌리 뽑힙니다.


이 두 개의 경에 의하면, asmi는 anusaya[잠재성향]-māna[자기화]-diṭṭhi[견해]-chanda[찬다]에서 동일하게 사용되는데, 자기화[māna – 자만(自慢)]을 중심에 두고 cittassa nimitta[심상(心相)]를 대상으로 하는 자기화의 과정[anusaya]와 자기화 된 내가 nimitta[상(相)]을 대상으로 세상을 보는 시각[diṭṭhi] 그리고 행위를 인식으로 되돌림[chanda]입니다. ‘나는 있다’라는 잠재성향의 작용에 의해 ‘나는 있다’라고 자기화 되면 ‘나는 있다’라는 견해로 세상을 보고[행위의 씨앗이 되고], ‘나는 있다’에 입각한 사유를 싣고 인식에 참여하고, 인식은 다시 가공의 과정으로 연결되어 재차 자기화 되는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삶의 문제 즉 불완전의 해소는 자기화[māna – 자만(自慢)]하지 않는 삶의 실현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갈애가 형성되지 않는 삶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cittassa nimitta[심상(心相)]을 대상으로 하는 자기화의 과정[anusaya]을 제어하여 자기화[māna – 자만(自慢)]하지 않음으로써 nimitta[상(相)]을 대상으로 하는 자기화 하지 않은 견해[diṭṭhi]을 갖추고 그런 행위를 인식으로 되돌려야합니다[chanda]. ‘나는 있다’라는 잠재성향을 뿌리 뽑아 ‘나는 있다’라고 자기화 되지 않으면 ‘나는 있다’라는 견해로 세상을 보지 않고[행위의 씨앗이 되고], ‘나는 있다’에 입각하지 않은 사유를 싣고 인식에 참여하고, 인식은 다시 가공의 과정으로 연결되어 재차 자기화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화 하지 않는 삶의 완성은 고멸(苦滅)의 실현입니다. 이런 삶을 「atakka」 즉 「takka를 넘어섬」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처님은 바로 이것으로써 당신의 깨달음을 정의하는 것입니다.


aniccasaññāsuttaṃ(SN 22.102)[무상(無常)의 상(想) 경]은 이런 깨달음을 설명해 줍니다.


“aniccasaññā, bhikkhave, bhāvitā bahulīkatā sabbaṃ kāmarāgaṃ pariyādiyati, sabbaṃ rūparāgaṃ pariyādiyati, sabbaṃ bhavarāgaṃ pariyādiyati, sabbaṃ avijjaṃ pariyādiyati, sabbaṃ asmimānaṃ samūhanati”. 


비구들이여, 무상(無常)의 상을 닦고 많이 행하면 모든 욕탐(慾貪)을 없애게 되고, 모든 색탐(色貪)을 없애게 되고, 모든 유탐(有貪)을 없애게 되고, 모든 무명(無明)을 없애게 되고, 모든 나는 있다는 자기화를 뿌리 뽑게 된다.


여기서 욕탐(慾貪)과 색탐(色貪)과 유탐(有貪)은 탐(貪)입니다. 그래서 이 문장은 무상(無常)의 상(想)을 닦으면 탐(貪)과 무명(無明)을 없애게 되고 그럼으로써 모든 ‘나는 있다’라는 자기화[māna – 자만(自慢)]를 뿌리 뽑게 된다는 것입니다.


한편, 무명(無明)은 십이연기의 첫 번째 지분이고 자기화는 여덟 번째 지분인 애(愛)에 포함됩니다. 보기에 따라서는 첫 번째 지분의 해소를 통해 여덟 번째 지분을 해소하는 것으로 깨달음을 설명하는 부조화를 지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화 된 삶이 문제의 본질[십지연기(十支緣起)]이기 때문에 삶의 문제 해소의 본질은 자기화의 해소[십이연기(十二緣起)]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위해서는 자기화를 가져오는 과정의 해소가 필요하다는 이해는 여기에 타당성을 부여합니다.


이런 이해는 부처님이 당신이 깨달은 법의 본질을 「atakka」 즉 「takka를 넘어섬」이라고 선언하는 것의 의미를 분명하게 드러내 줍니다.


● samanupassanāsuttaṃ(SN 22.47)[관찰 경]은 ‘asmi’ 즉 자기화 된 삶과 자기화에서 벗어난 삶에 대해 설명해 줍니다. 


samanupassanāsuttaṃ(SN 22.47)[관찰 경]


sāvatthinidānaṃ. “ye hi keci, bhikkhave, samaṇā vā brāhmaṇā vā anekavihitaṃ attānaṃ samanupassamānā samanupassanti, sabbete pañcupādānakkhandhe samanupassanti, etesaṃ vā aññataraṃ. katame pañca? idha, bhikkhave, assutavā puthujjano ariyānaṃ adassāvī ariyadhammassa akovido ariyadhamme avinīto, sappurisānaṃ adassāvī sappurisadhammassa akovido sappurisadhamme avinīto rūpaṃ attato samanupassati, rūpavantaṃ vā attānaṃ; attani vā rūpaṃ, rūpasmiṃ vā attānaṃ. vedanaṃ... saññaṃ... saṅkhāre... viññāṇaṃ attato samanupassati, viññāṇavantaṃ vā attānaṃ; attani vā viññāṇaṃ, viññāṇasmiṃ vā attānaṃ”.


비구들이여, 다양한 아(我)의 관찰자로서 관찰하는 사문-바라문들은 누구든지 모두 오취온(五取蘊)에서 관찰하는 것이지 그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무엇이 다섯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배우지 못한 범부는 성자들을 친견하지 못하고 성스러운 법에 능숙하지 못하고 성스러운 법에 인도되지 못하고 참된 사람들을 친견하지 못하고 참된 사람의 법에 능숙하지 못하여 색(色)을 아(我)라고 관찰하고, 색(色)을 가진 것이 아(我)라고 관찰하고, 색(色)이 아(我) 안에 있다고 관찰하고, 색(色) 안에 아(我)가 있다고 관찰한다. 그는 수(受)를 … 상(想)을 … 행(行)을 … 식(識)을 아(我)라고 관찰하고, 식(識)을 가진 것이 아(我)라고 관찰하고, 식(識)이 아(我) 안에 있다고 관찰하고, 식(識) 안에 아(我)가 있다고 관찰한다. 


“iti ayañceva samanupassanā ‘asmī’ti cassa avigataṃ hoti. ‘asmī’ti kho pana, bhikkhave, avigate pañcannaṃ indriyānaṃ avakkanti hoti — cakkhundriyassa sotindriyassa ghānindriyassa jivhindriyassa kāyindriyassa. atthi, bhikkhave, mano, atthi dhammā, atthi avijjādhātu. avijjāsamphassajena, bhikkhave, vedayitena phuṭṭhassa assutavato puthujjanassa ‘asmī’tipissa hoti; ‘ayamahamasmī’tipissa hoti; ‘bhavissan’tipissa hoti; ‘na bhavissan’tipissa hoti; ‘rūpī bhavissan’tipissa hoti; ‘arūpī bhavissan’tipissa hoti; ‘saññī bhavissan’tipissa hoti; ‘asaññī bhavissan’tipissa hoti; ‘nevasaññīnāsaññī bhavissan’tipissa hoti”.


이렇게 관찰하면 '나는 있다!'가 사라지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나는 있다!'가 사라지지 않을 때 안근(眼根), 이근(耳根), 비근(鼻根), 설근(舌根), 신근(身根)의 다섯 가지 기능[근(根)]이 [삶에] 참여한다. 비구들이여, 거기에는 의(意)가 있고 법(法)들이 있고 무명(無明)의 요소가 있다. 무명과 함께하는 촉(觸)[무명촉(無明觸)]에서 생긴 경험에 닿은 배우지 못한 범부는 '나는 있다.'라고로도 있고, '나는 이것이다.'라고로도 있고, '나는 있을 것이다.'라고로도 있고, '나는 있지 않을 것이다.'라고로도 있고, '나는 색(色)을 가진 자일 것이다.'라고로도 있고, '나는 색(色)을 가지지 않은 자일 것이다.'라고로도 있고, '나는 상(想)을 가진 자일 것이다.'라고로도 있고, '나는 상(想)을 가지지 않은 자일 것이다.'라고로도 있고, '나는 상(想)을 가진 자도 아니고 상을 가지지 않은 자도 아닐 것이다.'라고로도 있다.


“tiṭṭhanteva kho, bhikkhave, tattheva pañcindriyāni. athettha sutavato ariyasāvakassa avijjā pahīyati, vijjā uppajjati. tassa avijjāvirāgā vijjuppādā ‘asmī’tipissa na hoti; ‘ayamahamasmī’tipissa na hoti; ‘bhavissan’ti... ‘na bhavissan’ti... rūpī... arūpī ... saññī... asaññī... ‘nevasaññīnāsaññī bhavissan’tipissa na hotī”ti.

 

비구들이여, 비록 다섯 가지 기능들이 바로 거기에 남아있지만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에게는 무명(無明)이 버려지고 명(明)이 생긴다. 그에게 무명이 빛바래고 명이 생기기 때문에 '나는 있다.'라고로도 있지 않고, '나는 이것이다.'라고로도 있지 않고, '나는 있을 것이다.'라고로도 있지 않고, '나는 있지 않을 것이다.'라고로도 있지 않고, '나는 색(色)을 가진 자일 것이다.'라고로도 있지 않고, '나는 색(色)을 가지지 않은 자일 것이다.'라고로도 있지 않고, '나는 상(想)을 가진 자일 것이다.'라고로도 있지 않고, '나는 상(想)을 가지지 않은 자일 것이다.'라고로도 있지 않고, '나는 상(想)을 가진 자도 아니고 상을 가지지 않은 자도 아닐 것이다.'라고로도 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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