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4. 깨달음의 산물 ㅡ 열반(涅槃)
Ⅰ. 열반(涅槃)으로 온전하게 이끄는 가르침
부처님의 전생을 설하는 경전들은 부처님이 깨달음을 성취하기 이전인 전생에는 사무량심(四無量心)을 닦아 많은 사람들을 범천(梵天)의 세상으로 이끌었지만 깨달음을 성취한 지금은 열반(涅槃)으로 온전하게 이끄는 가르침 즉 팔정도(八正道)를 설한다고 합니다. 생(生)-노(老)-사(死)의 문제를 해결하고 윤회(輪迴)하는 중생의 삶에서 벗어난 해탈된 삶의 실현입니다.
나는 그때 마하고윈다 바라문이었다. 나는 그 제자들에게 범천의 세상의 일원이 되는 길을 설했다. 그러나 빤짜시카여, 그 나의 길은 범행(梵行)을 염오(厭惡)로 이탐(離貪)으로 소멸(消滅)로 가라앉음으로 실다운 지혜로 깨달음으로 열반으로 이끌지 못했다. 단지 범천의 세상에 태어남까지 이끌었을 뿐이다.
그러나 빤짜시카여, 이 나의 길은 범행(梵行)을 온전하게 염오(厭惡)로 이탐(離貪)으로 소멸(消滅)로 가라앉음으로 실다운 지혜로 깨달음으로 열반으로 이끈다. 그러면 빤짜시카여, 어떤 길이 그 범행을 온전하게 염오(厭惡)로 이탐(離貪)으로 소멸(消滅)로 가라앉음으로 실다운 지혜로 깨달음으로 열반으로 이끄는가?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이다. 빤짜시카여, 이것이 그 범행을 온전하게 염오(厭惡)로 이탐(離貪)으로 소멸(消滅)로 가라앉음으로 실다운 지혜로 깨달음으로 열반으로 이끈다.
mahāgovindasuttaṃ (DN 19)[마하고윈다 경]
전생에 마하고윈다 바라문이었을 때 가르친 길은 범천의 세상으로 이끄는 도관(導管)이었지만 지금 깨달음을 성취한 부처로서 가르치는 길은 온전하게 열반으로 이끄는 도관(導管)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길은 범행(梵行) 즉 삶의 향상을 위한 노력을 더 이상 범천의 세상이 아닌 온전하게 열반으로 이끄는 길[도관(導管)]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범행(梵行)의 결실을 온전하게 거둘 수 있게 해 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범천의 세상 즉 색계(色界)-무색계(無色界)의 높은 삶[소유에 수반되는 괴로움 없음]으로 이끄는 것은 사무량심(四無量心)을 닦는 깨달음 이전의 스승에 의해서도 가능하지만 해탈된 삶의 실현 즉 열반(涅槃)으로 직접 이끄는 가르침은 깨달음을 성취한 부처님에 의해서만 안내될 수 있는 것입니다. 다른 종교에 대한 불교의 입장도 이와 같다고 하겠습니다.
[참고] 자비(慈悲)는 불교에서 중요한 교리입니다. 자비희사(慈悲喜捨) 사무량심(四無量心)[사범주(四梵住)]를 구성하는 요소이고, 내가 세상을 만나는 수단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비(慈悲)가 불교의 중심은 아닙니다. 세상을 만나기 이전에 나의 상태를 완성하는 것[무아(無我)]를 불교는 중심에 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불교의 중심은 팔정도(八正道)이고, 팔정도는 사무량심(四無量心)을 포함하여 더 넓은 영역에 걸친 고멸(苦滅)의 길입니다.
그리고 팔정도(八正道)라는 전혀 새로운 길을 따라 아(我)에 적용된 참된 것이라는 설정을 깨뜨리고 오른 무아(無我)의 산(山)의 정상을 부처님은 열반(涅槃)[nibbāna]라고 이름붙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