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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재] Ⅲ. 누구를 위한 깨달음인가? 1. 법의 정형구

0 615 2018.03.03 09:09

Ⅲ. 누구를 위한 깨달음인가?


결국 깨달음은 누진(漏盡)입니다. 그런데 누진(漏盡)은 개별적인 것입니다. 자기 내면에서 누적되고 작용하는 것이어서 밖에 있는 누군가가 대신 부숴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깨달음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자기 내면의 번뇌[루(漏)]를 부숨으로써 자기에게서 완성되는 번뇌 없는 삶[무위(無爲)]가 바로 깨달음입니다.


그렇다고 슬퍼할 일은 아닙니다. 신(神)적 권능을 가진 어떤 설정[거짓]에 의지해 구원되기 보다는 이 방법이 훨씬 구체적이고 실현가능하기 때문입니다[참]. 그래서 apaṇṇakasuttaṃ (MN 60)은 말합니다.


「ye pana te bhonto samaṇabrāhmaṇā evaṃvādino evaṃdiṭṭhino —‘natthi sabbaso bhavanirodho’ti, tesamayaṃ diṭṭhi sārāgāyasantike, saṃyogāya santike, abhinandanāya santike, ajjhosānāya santike, upādānāya santike. ye pana te bhonto samaṇabrāhmaṇā evaṃvādino evaṃdiṭṭhino — ‘atthi sabbaso bhavanirodho’ti, tesamayaṃ diṭṭhi asārāgāya santike, asaṃyogāya santike, anabhinandanāya santike, anajjhosānāya santike, anupādānāya santike’”ti. so iti paṭisaṅkhāya bhavānaṃyeva nibbidāya virāgāya nirodhāya paṭipanno hoti.


‘어디에도 존재의 소멸은 없다.’라고 이렇게 말하고 이런 견해를 가진 그 사문-바라문들의 이런 견해는 탐닉에 가깝고, 족쇄에 가깝고, 즐김에 가깝고, 묶임에 가깝고, 집착에 가깝다[유위(有爲)의 삶]. 


‘어디에도 존재의 소멸은 있다.’라고 이렇게 말하고 이런 견해를 가진 그 사문-바라문들의 이런 견해는 탐닉 아님에 가깝고, 족쇄 아님에 가깝고, 즐기지 않음에 가깝고, 묶이지 않음에 가깝고, 집착 아님에 가깝다[무위(無爲)의 삶].


그는 이렇게 숙고한 뒤 존재를 염오(厭惡)하고 이탐(離貪)하고 소멸(消滅)하기 위해 실천한다.」


1. 법의 정형구


그런데 이런 관점은 부처님의 가르침 즉 법(法)의 전반에 적용됩니다. 부처님은 법(法)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 법의 정형구에 대한 두 단계의 해석

 

 [1단계 해석]

 

법(法-dhamma)은 <계속해서 생각함의 장소 경(A6:25)> 등 여러 경전에서 정형구문으로 나타나는데, 「부처님의 가르침[진리] - 괴로움을 소멸하는 방법」에 대한 정의라고 할 것입니다. 

 

‘svākkhāto bhagavatā dhammo sandiṭṭhiko akāliko ehipassiko opaneyyiko paccattaṃ veditabbo viññūhī’ti.

 

부처님에 의해 잘 설해진 법은 스스로 보아 알 수 있고, 시간이 걸리지 않고, 와서 보라는 것이고, 향상으로 인도하고, 지자들이 각자 알아야 하는 진리입니다.                                           [초기불전연구원 번역]

 

그런데 부처님은 법의 정형구를 어떤 상황을 설정하여 설명합니다. 내 안에서 경험되는 탐진치(貪嗔癡)에 대한 상황입니다. <우빠와나 경(S35:70)> 등 여러 경전은 유사한 방법으로 법의 정형구를 설명해 주는데, 법의 의미를 추상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삶과 수행에서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대덕이시여, '스스로 보아 알 수 있는 법, 스스로 보아 알 수 있는 법'이라고들 합니다. 어떻게 법은 스스로 보아 알 수 있고, 시간이 걸리지 않고, 와서 보라는 것이고, 향상으로 인도하고, 지자들이 각자 알아야 하는 것입니까?」라는 우빠와나 존자의 질문에 대해, 부처님은 「우빠와나여, 여기 비구는 안(眼)으로 색(色)을 보고서 색(色)을 경험하고 색(色)에 대한 탐(貪)도 경험한다. 그는 '내 안에는 색(色)들에 대한 탐(貪)이 있다.'라고 자기 안에 색(色)들에 대한 탐(貪)이 있음을 분명히 안다. 우빠와나여, 이렇게 분명히 아는 것이 '스스로 보아 알 수 있고, 시간이 걸리지 않고, 와서 보라는 것이고, 향상으로 인도하고, 지자들이 각자 알아야 하는 것이다.’라고 불린다. 우빠와나여, 여기 비구는 안(眼)으로 색(色)을 보고서 색(色)을 경험하지만 색(色)에 대한 탐(貪)은 경험하지 않는다. 그는 '내 안에는 색(色)들에 대한 탐(貪)이 없다.'라고 자기 안에 색(色)들에 대한 탐(貪)이 없음을 분명히 안다. 우빠와나여, 이렇게 분명히 아는 것을 두고 '스스로 보아 알 수 있고, 시간이 걸리지 않고, 와서 보라는 것이고, 향상으로 인도하고, 지자들이 각자 알아야 하는 것이다.’라고 한다.」라고 답합니다. 부처님의 답변은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로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을 인식하는 전체영역에 걸쳐 주어집니다.

 

이 말씀은 법 자체의 성품을 설명하는 '스스로 보아 알 수 있고, 시간이 걸리지 않고, 와서 보라는 것이고'의 부분과 부가적 설명인 '향상으로 인도하고, 지자들이 각자 알아야 하는 것'의 부분으로 나누어 이해할 수 있는데,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1) '내 안에 탐(貪)이 있다.'라는 것은 직접 확인이 가능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탐(貪)이 드러나 보이게 하는 어떤 특별한 진언[탐욕 보기 진언]을 만들어 100번쯤 외워야 드러나는 비밀스러움 없이 그냥 드러나 보이는 것입니다.

 

2) 그리고 드러나는 그 순간 보입니다. 탐(貪)이 일어나고 10분쯤 후에 알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3) 그러나 누구나 '내 안에 탐(貪)이 있다.'라고 보지는 못합니다. 그러면 누가 볼 수 있습니까? 가서 보려고 하는 사람[사띠 하는 사람]에게 보입니다.

 

4) 이렇게 가서 보는 사람은 자기 안에 있는 탐(貪)을 제어하게 됩니다. 그러면 탐(貪)이 제어된 삶 즉 향상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닙바나[열반(涅槃)]으로 이끌리는 것입니다.

 

5) 그런데 자기 안에 있는 탐(貪)은 누가 대신 보아주지 못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각자가 스스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지혜로운 사람입니까? 가서 보려는 사람[수행자(修行者)]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스스로 가서 보려하지 않으면 탐(貪)은 스스로 드러나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동일한 이야기를 호흡수행에 대해서도 적용해 보았습니다.

 

1) '내가 숨 쉬고 있다.'는 것은 직접 확인이 가능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호흡 보기 진언을 만들어 100번쯤 외워야 드러나는 비밀스러움 없이 그냥 드러나 보이는 것입니다.

 

2) 그리고 드러나는 그 순간 보입니다. 숨 쉬고 나서 10분쯤 후에 알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3) 그러나 누구나 '내가 숨 쉬고 있다.'라고 보지는 못합니다. 그러면 누가 볼 수 있습니까? 가서 보려고 하는 사람[사띠하는 사람]에게 보입니다.

 

4) 이렇게 가서 보는 사람의 사띠는 힘 있어집니다. 그러면 바른 삼매가 성취되고 여실지견(如實知見)하게 되고, 사마타-위빳사나의 높은 수행으로 이어져 삶은 괴로움의 소멸로 향하게 됩니다. 즉 향상하는 삶을 살게 되고, 닙바나[열반(涅槃)]으로 이끌리는 것입니다.

 

5) 그런데 자기의 호흡은 누가 대신 보아주지 못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각자가 스스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지혜로운 사람입니까? 가서 보려는 사람[수행자]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스스로 가서 보려하지 않으면 호흡은 스스로 드러나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법은 이렇게 '스스로 보아 알 수 있고, 시간이 걸리지 않고, 와서 보라는 것‘이어서 법의 성품에 맞게 대응하면 향상으로 인도되는 것입니다. 다만, 현명한 사람이 각자 알아야 하는 것이지 누가 대신해주지 못한다는 것은 명심해야 합니다.


[2단계 해석 – 근본경전연구회의 해석-번역]


‘svākkhāto bhagavatā dhammo ①sandiṭṭhiko ②akāliko ③ehipassiko ④opaneyyiko ⑤paccattaṃ veditabbo viññūhīti.


법의 정형구에 대한 2단계의 해석을 이렇게 하였습니다.


①sandiṭṭhiko-②akāliko-③ehipassiko는 법 자체의 성품이라고 이해하였습니다. 이때, ②akāliko는 ‘시간을 넘어선 것’으로 해석하였고, 이것에 대해 현실적인 것으로의 ①sandiṭṭhiko는 대상의 측면에서 ‘스스로 보이는 것’으로 해석하고, ③ehipassiko는 보는 자의 측면에서 ‘와서 보라는 것’으로 해석하였습니다. 즉 시간을 넘어선 것인 법은 조건이 갖추어지면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이어서, 가서 보려는 자에게는 감춤 없이 보이는 것이라고 정리한 것입니다.


④opaneyyiko는 이러한 법 즉 가르침의 역할의 측면에서 향상의 끝인 ‘열반으로 이끌고’라고 해석하고, 

 

⑤paccattaṃ veditabbo viññūhī는 열반이 개별적으로 성취되는 것이라는 점에서 ‘지혜로운 이에게 개별적으로 알려지는 것’이라고 해석하였습니다.


그래서 법의 정형구에 대한 근본경전연구회의 해석-번역은 이렇습니다. - 「부처님에 의해 잘 설해진 법은 ①스스로 보이는 것이고, ②시간을 넘어선 것이고. ③와서 보라는 것이며, ④열반으로 이끌고, ⑤지혜로운 이에게 개별적으로 알려지는 것입니다. 」


이렇게 정의되는 법(法)은 삼법인(三法印)에서는 존재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모든 존재에 대해서도 이 정의는 적용됩니다. 존재하는 것들의 성품은 ①스스로 보이는 것이고, ②시간을 넘어선 것이고. ③와서 보라는 것이며, 이 존재들 즉 삶의 현실 위에서 존재의 성품에 부합한 삶을 통해 ④열반으로 이끌고, 그때 ⑤지혜로운 이에게 개별적으로 알려지는 것입니다.


한편, nibbutasuttaṃ (AN 3.56)은 법의 이런 성질을 열반에 적용하여 설하는데, 열반도 법에 속하기 때문이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sandiṭṭhikaṃ nibbānaṃ sandiṭṭhikaṃ nibbānan’’ti, bho gotama, vuccati. kittāvatā nu kho, bho gotama, sandiṭṭhikaṃ nibbānaṃ hoti akālikaṃ ehipassikaṃ opaneyyikaṃ paccattaṃ veditabbaṃ viññūhī”ti?


스스로 보이는 것이고, 시간을 넘어선 것이고, 와서 보라는 것이고, 향상으로 이끌고, 지혜로운 이에게 개별적으로 알려지는 것인 열반(涅槃)


이렇게 개별적 누진(漏盡)을 통해 실현되는 열반(涅槃)은 개별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를 위한 깨달음인가?’에는 이렇게 답해야 합니다. ㅡ 「자기 자신을 위한 깨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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