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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재] 2. 자주(自洲)-법주(法洲)

2. 자주(自洲)-법주(法洲)


이렇게 자기 자신을 위한 깨달음이란 이해는 자주(自洲)-법주(法洲)의 가르침에서 분명해집니다. 자등명(自燈明)-법등명(法燈明)으로 잘 알려진 이 가르침은 부처님에 의해 개척된 법(法)에 의지해서[법주(法洲)] 스스로의 노력을 통해 고멸(苦滅)의 삶을 재현(再現)하라[자주(自洲)]는 의미입니다. 이때, 섬[주(洲)]란 윤회(輪迴)로 포괄되는 괴로움의 바다[고해(苦海)]에서 벗어난 안전한 땅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자주(自洲)-법주(法洲)의 가르침은 이런 의미의 섬에 닿기 위해서는 바른 방법에 따른[법주(法洲)] 스스로의 노력[자주(自洲)]만이 결실을 거두는 것이지 어떤 방법으로든 설정된 상황에 의지해서는 결실을 거둘 수 없다는 가르침입니다.



「자주(自洲)-법주(法洲)」를 설하는 경전들


attadīpā viharatha attasaraṇā anaññasaraṇā,

dhammadīpā dhammasaraṇā anaññasaraṇā

 

앗따디-빠- 위하라타 앗따사라나- 아난냐사라나-,

담마디-빠- 담마사라나- 아난냐사라나-

 

스스로 섬이 되어 머물고 스스로 의지처가 되어 머물고 남을 의지처로 하여 머물지 말라.

법을 섬으로 하여 머물고 법을 의지처로 하여 머물고 다른 것을 의지처로 하여 머물지 말라. 



1. 완전한 형태 - 격과 시제의 변화에 따라 다른 형태로 네 번 반복됨. 


1) 제시 ㅡ Tasmātiha, bhikkhave, attadīpā viharatha attasaraṇā anaññasaraṇā, dhammadīpā dhammasaraṇā anaññasaraṇā


2) 어떻게? ㅡ Kathañca, bhikkhave, bhikkhu attadīpo viharati attasaraṇo anaññasaraṇo, dhammadīpo dhammasaraṇo anaññasaraṇo?

    

• [답] 사념처(四念處) ㅡ Idha, bhikkhave, bhikkhu kāye kāyānupassī viharati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ṃ; vedanāsu…pe…  citte…pe…  dhammesu dhammānupassī viharati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ṃ.


3) 이렇게 ㅡ Evaṃ kho, bhikkhave, bhikkhu attadīpo viharati attasaraṇo anaññasaraṇo, dhammadīpo dhammasaraṇo anaññasaraṇo.


4) 이렇게 하면 ㅡ Ye hi keci, bhikkhave, etarahi vā mamaccaye vā attadīpā viharissanti attasaraṇā anaññasaraṇā, dhammadīpā dhammasaraṇā anaññasaraṇā


Tasmātiha, bhikkhave, attadīpā viharatha attasaraṇā anaññasaraṇā, dhammadīpā dhammasaraṇā anaññasaraṇā. Kathañca, bhikkhave, bhikkhu attadīpo viharati attasaraṇo anaññasaraṇo, dhammadīpo dhammasaraṇo anaññasaraṇo? Idha, bhikkhave, bhikkhu kāye kāyānupassī viharati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ṃ; vedanāsu…pe…  citte…pe…  dhammesu dhammānupassī viharati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ṃ. Evaṃ kho, bhikkhave, bhikkhu attadīpo viharati attasaraṇo anaññasaraṇo, dhammadīpo dhammasaraṇo anaññasaraṇo. Ye hi keci, bhikkhave, etarahi vā mamaccaye vā attadīpā viharissanti attasaraṇā anaññasaraṇā, dhammadīpā dhammasaraṇā anaññasaraṇā; tamatagge mete, bhikkhave, bhikkhū bhavissanti ye keci sikkhākāmā”ti.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여기서 그대들은 스스로 섬이 되어 머물고 스스로 의지처가 되어 머물고 남을 의지처로 하여 머물지 말라. 법을 섬으로 하여 머물고 법을 의지처로 하여 머물고 다른 것을 의지처로 하여 머물지 말라.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떻게 비구는 스스로 섬이 되어 머물고 스스로 의지처가 되어 머물고 남을 의지처로 하여 머물지 않는가? 법을 섬으로 하여 머물고 법을 의지처로 하여 머물고 다른 것을 의지처로 하여 머물지 않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신(身)에서 신(身)을 이어 보면서 머문다. 알아차리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옳음의 유지-향상을 위해 노력하여, 세상에서 간탐(慳貪)과 고뇌(苦惱)를 제거한다. 수(受)에서 … 심(心)에서 … 법(法)에서 법(法)을 이어 보면서 머문다. 알아차리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옳음의 유지-향상을 위해 노력하여, 세상에서 간탐(慳貪)과 고뇌(苦惱)를 제거한다. 


비구들이여, 이처럼 비구는 스스로 섬이 되어 머물고 스스로 의지처가 되어 머물고 남을 의지처로 하여 머물지 않으며, 법을 섬으로 하여 머물고 법을 의지처로 하여 머물고, 다른 것을 의지처로 하여 머물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누구든지 지금이거나 내가 죽은 뒤에라도 스스로 섬이 되어 머물고 스스로 의지처가 되어 머물고 남을 의지처로 하여 머물지 않으며, 법을 섬으로 하여 머물고 법을 의지처로 하여 머물고 다른 것을 의지처로 하여 머물지 않으면서 공부를 즐기는 비구들이 나에게 최고의 제자가 될 것이다.


2. 자주법주(自洲法洲)를 완전한 형태로 설하는 경전들


1) mahāparinibbānasuttaṃ(D16)[대반열반경]

2) gilānasuttaṃ(SN 47.9)[병 경]

3) cundasuttaṃ(SN 47.13)[쭌다 경]

4) ukkacelasuttaṃ (SN 47.14)[욱깐쩰라 경]


3. [제시-어떻게-이렇게]에 이어 다른 형태가 나타나는 경전

    ㅡ cakkavattisuttaṃ(D26-전륜성왕 경)


비구들이여, 영역인 물려받은 세상(*)에서 살아야 한다. 비구들이여, 영역인 물려받은 세상에서 사는 그대들에게 수명도 늘어나고, 용모도 좋아지고, 행복도 커지고, 재산도 늘어나고, 힘도 세질 것이다.


(*) (SN 47.6-매 경)/(SN 47.7-원숭이 경)에 의하면, 비구에게 영역인 물려받은 세상은 사념처(四念處)이고, 영역이 아닌 남의 세상은 다섯 가지 소유의 사유에 묶인 것(pañca kāmaguṇā)임.


• 비구의 수명 - 사여의족(四如意足)

• 비구의 용모 - 계(戒)를 잘 지님

• 비구의 행복 - 사선(四禪)

• 비구의 힘 - 심해탈(心解脫)-혜해탈(慧解脫)의 구족


4. 자주법주(自洲法洲) 이후를 설하는 경전 

    ㅡ attadīpasuttaṃ (SN 22.43-스스로 섬이 됨 경)


자주법주(自洲法洲)는 사념처(四念處)입니다. 그렇다면 사념처(四念處)에 이어지는 사마타-위빳사나가 자주법주(自洲法洲) 이후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SN 22.43-스스로 섬이 됨 경)은 자주법주(自洲法洲) 하는 자들은 수비고우뇌(愁悲苦憂惱)가 무엇으로부터 생기고 무엇으로부터 발생하는지 그 근원을 조사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오온(五蘊)의 자라남-줄어듦의 관찰이고, 위빳사나입니다.


경은 


배우지 못한 범부는 존재의 실상인 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에 무지하여 오온(五蘊)을 아(我)인 것으로 관찰하지만 오온은 자기의 존재성[실상]에 의해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가기 때문에 수비고우뇌(愁悲苦憂惱)가 생긴다고 알려줍니다.(*) ⇒ 사실에 괴리(乖離)된 삶의 결과.


(*) 색(色)을 아(我)로부터 관찰하고, 색(色)을 가진 자로서의 아(我)를 관찰하거나, 아(我)에서 색(色)을 관찰하거나, 색(色)에서 아(我)를 관찰한다. 그에게 그 색(色)은 변하고 다른 것이 된다. 그에게 색(色)이 변하여 다른 존재가 됨으로부터 수비고우뇌(愁悲苦憂惱)가 생긴다.(오온(五蘊)에 반복)


반면에 


오온을 무상하고 괴롭고 변하기 마련인 것이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 보는 자들은 수비고우뇌를 모두 버린다고 알려줍니다. ⇒ 사실에 부합(符合)한 삶의 결과.


또한, ‘그것들의 버림으로부터 동요하지 않고, 동요하지 않는 자는 행복하게 머문다. 비구들이여, 행복하게 머무는 자는 ‘부분적으로 꺼진 자’라고 불린다.’라고 합니다.


  (*) nibbuta - 꺼진 = 열반을 증득한 자


사실에 괴리(乖離)된 삶의 결과로 수비고우뇌가 생기고, 사실에 부합(符合)한 삶의 결과로 수비고우뇌가 버려진다는 이 주제는 온(蘊) 상윳따(SN 22)가 알려주는 중요한 주제입니다. 


이 경은 이 주제를 사념처(四念處)에 의해 자주법주(自洲法洲) 하는 자에게 이어지는 수행 주제로 제시하고 있다고 하겠는데, 구체적으로는 사마타-위빳사나입니다.

 

3. 이렇게 두 가지 측면[지혜로운 이에게 개별적으로 알려지는 열반(涅槃) & 자주(自洲)-법주(法洲)]에 의하면, 깨달음은 분명히 자기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지해서[법주(法洲)] 자기 내면의 번뇌를 자기 스스로 부술 때[자주(自洲)] 개별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깨달음의 산물(産物)인 열반(涅槃)은 알려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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