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사회참여/외부특강 > 학술세미나 > 깨달음

학술세미나

[교재] Ⅳ. 불교의 중생 구제 1. <상가라와 경(A3:60)>

0 760 2018.03.03 09:21

. 불교의 중생 구제

 

깨달음이 이렇게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라면 세상에서 괴로움을 겪고 있는 많은 중생들은 누가 어떻게 구제합니까? 불교는 중생구제를 염두에 두지 않는 종교입니까?

 

1. <상가라와 경(A3:60)>을 인용하면 이렇게 답할 수 있습니다. - 앞서 공부한 사람이 스스로의 삶을 향상하면 그 삶을 보고 뒤따르는 사람들이 생겨나 스스로의 삶을 향상하는 것이 불교적인 포교이며 불교적인 중생구제의 방법입니다.

 

이 경에서 상가라와 바라문은 제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공덕이 되고 출가는 한 사람에게만 영향을 끼치는 공덕이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스승이 법을 설하면 다른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얻기 위해 실천하기 때문에 출가로 인해 공덕을 쌓는 것은 여러 사람에게 영향을 끼친다고 말합니다.

 

부처님의 이런 설명은 가르침에 의지해 스스로 삶을 향상한다는 자주법주(自洲法洲)로 집약되어 나타나는데, 고멸(苦滅) 즉 행복의 실현을 위한 불교의 기본적인 입장입니다. <가나까목갈라나 경(M107)>에서도 부처님은 '여래는 단지 길을 가리킬 뿐'이라고 말하는데, 길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의지해[법주(法洲)] 그 길을 직접 걸어가는 사람만이 거기에 닿을 수 있다[자주(自洲)]는 의미입니다. 또한, 사성제(四聖諦)의 고멸도성제(苦滅道聖諦)가 팔정도(八正道)를 실천하는 것으로의 중도(中道)로 정의되는 것도 같은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이런 입장은 <웃띠야 경(A10:95)>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이 경은 여래는 세상 사람들이 모두 열반으로 인도되거나, 반 혹은 삼분의 일이 그렇게 되는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여래는 세상으로부터 열반으로 인도되었고 인도되고 인도될 자들은 모두 마음의 오염원이고 지혜를 무력하게 만드는 다섯 가지 장애를 버리고 사념처(四念處)에 잘 확립된 마음으로, 칠각지(七覺支)를 있는 그대로 닦은 뒤에 비로소 세상으로부터 열반으로 인도되었고 인도되고 인도될 것이다.’라고 압니다.라고 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열반으로 인도되는지 즉 구제되는지의 문제가 아니라 열반으로 인도되는 길을 정확히 안내하는 것으로써 부처님의 역할을 정의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중생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삶의 현실이 제3[부처님 또는 어떤 권능가진 자]에 의해 구제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바른 방법에 의한 노력에 의해 스스로를 구제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이때, 열반으로 인도되는 길은 마음의 오염원이고 지혜를 무력하게 만드는 다섯 가지 장애의 제거 지혜의 강화 - 칠각지의 팽창 사념처에 잘 확립된 마음 칠각지를 있는 그대로 닦음의 과정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사람들에게 이런 길을 안내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런 길이 알려져야 여기에 의지해서 스스로의 삶을 향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보시 분석의 경(M142)>삼보귀의(三寶歸依), 오계(五戒) 수지, 네 가지 높은 마음[사증상심(四增上心), 사성제(四聖諦)에 대한 믿음을 실행할 수 있도록 인연이 되어준 사람에게 '인사하거나 일어서 맞이하거나 합장을 하거나 친절을 보이거나 의()-()-()-약품(藥品)을 보시하여 그 은혜를 갚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라고 말하는데, 인연이 되어준 사람의 은혜즉 포교의 공덕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포교는 '삼보귀의-오계수지-네 가지 높은 마음-사성제에 대한 믿음'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라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스스로의 삶을 향상으로 이끄는 출발점이 바로 이 네 가지라는 의미입니다

 

※ 「진정한 대승(大乘) 아라한(阿羅漢)!

 

어떤 학술대회에서 '수행에 의해서 번뇌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단지 번뇌로부터 멀어질 뿐이라는 발언과 같은 맥락에서 아라한도 세상에 있는 번뇌를 소멸하는 것이 아니고 그 번뇌들로부터 피한 상태'라는 토론이 있었습니다. 왜 사람들이 아라한을 낮은 단계의 성취라고 오해하고 폄훼하는지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토론이었습니다.

 

아마도 사람들은 세상의 모든 번뇌를 다 제거하여 모든 사람들이 번뇌 없이 살아갈 수 있게 해 주는 것으로의 깨달음을 기대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라한은 번뇌 없는 세상을 만드는 게 아니라 자기만이 번뇌로부터 멀어지는 것으로 깨달음의 내용을 삼으니 소승(小乘)이고 낮은 깨달음이라는 이해가 성립하는 것일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이런 관점은 부처님의 가르침과는 다릅니다. 부처님은 이상적인 추구를 설하는 스승이 아닙니다. 오직 삶의 현실에 대한 통찰 위에서 실현 가능한 가르침을 설하는 스승입니다그러므로 이 측면에서 번뇌를 이해해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번뇌는 개인의 원력에 의해 다 제거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세상은 없습니다. 다른 존재의 내면에서 작용하는 번뇌를 내가 대신 버려줄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고 번뇌가 부수어지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아라한 또한 번뇌를 단지 피하기만 하는 성취가 아닙니다(*). 번뇌는 개별적인 것이기 때문에 자기 내면의 번뇌는 자기만이 부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라한은 자기 내면의 번뇌를 모두 부수어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진 성자입니다. 삶의 완성 즉 해탈된 삶을 실현한 분이고, 다시 존재로 이끄는 것인 번뇌가 원인인 윤회에서 벗어난 분입니다.

 

(*) 번뇌를 피하는 것은 삼매에 듦으로써 2차 인식에 부대(附帶)하는 상()의 상태를 일시적으로 개선하는 것인데, 사념처(四念處)에 잘 확립된 심()으로 완성됩니다[사띠 토대 - satiāyatana]. 반면에 번뇌를 부숨[누진(漏盡)]은 사띠 토대 위에서 상()의 병듦의 치유 즉 번뇌를 직접 부수어 해탈하는 것인데, 사마타-위빳사나의 역할입니다.

 

때문에 세상의 번뇌에 대처하는 부처님의 방법은 단순합니다. 개별적인 것인 번뇌는 지혜로운 자에게 개별적으로 알려지는 것이고, 때문에 번뇌의 부숨은 개별적으로 실현되어야 한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세상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이 제각각 자기의 번뇌를 부수게 하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앞 선 사람들이 먼저 자기의 번뇌를 부수고, 뒤따르는 사람들에게 번뇌가 부서진 해탈된 삶을 보여주고 그 방법을 가르치면, 뒤따르는 사람들이 그 방법을 배워 자기의 번뇌를 개별적으로 부수는 것입니다. 번뇌는 모든 괴로움의 원인이기 때문에 번뇌를 부수는 이 방법이 바로 부처님의 중생 구제 방법입니다.

 

그래서 번뇌 부서진 해탈된 삶을 실현한 아라한은 소승(小乘)이고 낮은 깨달음의 상태가 아닙니다. 아라한의 이러한 성취 이러한 삶이야말로 진정한 대승(大乘)이고 완전한 깨달음의 실현입니다. 그래서 스승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번뇌를 부수고 깨달은 최초의 아라한을 여래(如來)라고 부르고, 여래(如來)의 덕성 가운데 첫 번째로 아라한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