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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재] Ⅱ. 비유를 통해 깨달음을 두 단계로 설명하는 경전들

0 592 2018.03.03 21:29

Ⅱ. 비유를 통해 깨달음을 두 단계로 설명하는 경전들


1. sāraṇīyasuttaṃ(A3:12)[기억 경]


비구들이여, 관정(灌頂)의 대관식을 거행한 끄샤뜨리야 왕은 세 가지 장소를 목숨이 붙어있는 한 기억할 것이다. 어떤 것이 셋인가? 비구들이여, 관정의 대관식을 거행한 끄샤뜨리야 왕이 태어난 곳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관정의 대관식을 거행한 끄샤뜨리야 왕이 기억할 첫 번째 장소이다. 다시 비구들이여, 관정의 대관식을 거행하고 끄샤뜨리야 왕이 된 곳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관정의 대관식을 거행한 끄샤뜨리야 왕이 기억할 두 번째 장소이다. 다시 비구들이여, 관정의 대관식을 거행한 끄샤뜨리야 왕이 전쟁에서 이기고, 그 지역의 최고 지도자가 된 곳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관정의 대관식을 거행한 끄샤뜨리야 왕이 기억할 세 번째 장소이다. 비구들이여, 관정(灌頂)의 대관식을 거행한 끄샤뜨리야 왕은 이러한 세 가지 장소를 목숨이 붙어있는 한 기억할 것이다.


비구들이여, 그와 마찬가지로 비구도 세 가지 장소를 목숨이 붙어있는 한 기억할 것이다. 어떤 것이 셋인가? 비구들이여, 비구가 머리와 수염을 깎고 가사를 수하고 집을 나와 출가한 곳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비구가 죽을 때까지 기억할 첫 번째 장소이다.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가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실천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 곳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비구가 죽을 때까지 기억할 두 번째 장소이다. 


“puna caparaṃ, bhikkhave, yasmiṃ padese bhikkhu ‘idaṃ dukkhan’ti yathābhūtaṃ pajānāti, ‘ayaṃ dukkhasamudayo’ti yathābhūtaṃ pajānāti, ‘ayaṃ dukkhanirodho’ti yathābhūtaṃ pajānāti, ‘ayaṃ dukkhanirodhagāminī paṭipadā’ti yathābhūtaṃ pajānāti. idaṃ, bhikkhave, dutiyaṃ bhikkhussa yāvajīvaṃ sāraṇīyaṃ hoti.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가 번뇌들을 부수어 번뇌가 없는 심해탈(心解脫)과 혜해탈(慧解脫)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실답게 알았기 때문에 실현한 뒤 구족하여 머무는 곳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비구가 죽을 때까지 기억할 세 번째 장소이다. 


puna caparaṃ, bhikkhave, yasmiṃ padese bhikkhu āsavānaṃ khayā anāsavaṃ cetovimuttiṃ paññāvimuttiṃ diṭṭheva dhamme sayaṃ abhiññā sacchikatvā upasampajja viharati. idaṃ, bhikkhave, tatiyaṃ bhikkhussa yāvajīvaṃ sāraṇīyaṃ hoti.


비구들이여, 비구도 이러한 세 번째 장소를 목숨이 붙어있는 한 기억할 것이다.


2. bahukārasuttaṃ(A3:24)[크게 도움 됨 경]


비구들이여, 세 부류의 사람은 사람에게 크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다. 어떤 것이 셋인가?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으로 인해 한 사람이 부처님께 귀의하고 법에 귀의하고 승가에 귀의할 때 그 사람은 이 사람에게 크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다.


비구들이여, 다시 어떤 사람으로 인해 한 사람이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 …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실천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 때 그 사람은 이 사람에게 크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다.


비구들이여, 다시 어떤 사람으로 인해 한 사람이 번뇌들을 부수어 번뇌가 없는 심해탈(心解脫)과 혜해탈(慧解脫)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실답게 알았기 때문에 실현한 뒤 구족하여 머물 때 그 사람은 이 사람에게 크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다.


비구들이여, 사람에게 이러한 세 부류의 사람보다 더 도움이 되는 사람은 없다. 이러한 세 부류의 사람에게 입은 은혜는 절을 올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맞이하고 합장하고 경의를 표하고 의복과 음식과 거처와 병구완을 위한 약품과 다른 필수품을 공양한다 하더라도 쉽게 보답할 수 없다고 나는 말한다.


3. 곪은 상처 경(A3:25) ⇒ [육차 결집본] vajirūpamasuttaṃ (AN 3.25)[금강석과 같음 경] 


비구들이여, 세상에는 세 부류의 사람이 있다. 어떤 것이 셋인가? 곪은 종기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 번갯불과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 금강석과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누가 곪은 종기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성미가 급하고 격렬하다. 사소한 농담에도 노여워하고 화를 내고 분노하고 분개한다. 분노와 성냄과 불만족을 거침없이 드러낸다. 마치 곪은 종기가 나무 꼬챙이나 사금파리에 부딪치면 고름과 피가 많이 나오듯이 어떤 사람은 성미가 급하고 격렬하다. 사소한 농담에도 노여워하고 화를 내고 분노하고 분개한다. 분노와 성냄과 불만족을 거침없이 드러낸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곪은 종기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 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누가 번갯불과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 …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실천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비구들이여, 마치 눈을 가진 자가 칠흑 같이 어두운 밤에 번갯불로 형상을 보듯이 어떤 사람은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 …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실천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번갯불과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 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누가 금강석과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번뇌들을 부수어 번뇌가 없는 심해탈(心解脫)과 혜해탈(慧解脫)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실답게 알았기 때문에 실현한 뒤 구족하여 머문다. 비구들이여, 마치 보석이건 돌이건 금강석으로 부수지 못할 것이 없듯이 어떤 사람은 번뇌들을 부수어 번뇌가 없는 심해탈(心解脫)과 혜해탈(慧解脫)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실답게 알았기 때문에 실현한 뒤 구족하여 머문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금강석과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 한다.


비구들이여, 세상에는 이러한 세 부류의 사람이 있다.


4. āsaṃsasuttaṃ(A3:13)[희망 없음 경]


비구들이여, 세상에는 세 부류의 사람이 있다. 어떤 것이 셋인가? 희망이 없는 사람과 희망을 가진 사람과 더 이상 희망을 갖지 않는 사람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자가 희망이 없는 사람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자는 비천한 가문에 태어나나니, 천민의 가문이나 사냥꾼의 가문이나 죽세공의 가문이나 마차공의 가문이나 넝마주이 가문에 태어난다. 그는 가난하고 먹고 마실 것이 부족하고 생계가 곤란하여 거친 음식이나 겨우 몸을 가리는 천조차도 아주 어렵게 얻는다. 그는 못생기고 보기 흉하고 기형이고 병약하고 눈멀고 손이 불구이고 절름발이이고 반신불수이다. 그는 음식과 마실 것과 의복과 탈 것과 화환과 향과 바르는 것과 침상과 숙소와 불을 얻지 못한다.


그는 '끄샤뜨리야들이 어떤 특정한 끄샤뜨리야 사람을 왕으로 모시는 관정의식을 거행했다.'는 소식을 들을 때 '언제 끄샤뜨리야들이 나를 왕으로 모시는 관정의식을 거행할 것인가?'라는 생각은 아예 내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희망이 없는 사람이라 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자가 희망을 가진 사람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관정의 대관식을 올린 끄샤뜨리야 왕의 첫째 왕자가 있다. 그는 왕으로 모시는 관정의식을 올릴 만하고 성숙했지만 아직 관정의식을 거행하지 않았다. 그가 '끄샤뜨리야들이 어떤 특정한 끄샤뜨리야 사람을 왕으로 모시는 관정의식을 거행했다.'는 소식을 들을 때 그는 '언제 끄샤뜨리야들이 나를 왕으로 모시는 관정의식을 거행할 것인가?'라는 생각을 한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희망을 가진 사람이라 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자가 더 이상 희망을 갖지 않는 사람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관정의 대관식을 거행한 끄샤뜨리야 왕이 있다. 그는 '끄샤뜨리야들이 어떤 특정한 끄샤뜨리야 사람을 왕으로 모시는 관정의식을 거행했다.'는 소식을 들을 때 그는 '언제 끄샤뜨리야들이 나를 왕으로 모시는 관정의식을 거행할 것인가?'라는 생각을 더 이상 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그것은 왕으로 모시는 관정의식을 거행하지 않았을 때 왕이 되고 싶었던 이전의 희망을 이미 성취했기 때문이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더 이상 희망을 갖지 않는 사람이라 한다.


비구들이여, 세상에는 이러한 세 부류의 사람이 있다.


비구들이여, 그와 마찬가지로 비구들 가운데도 세 부류의 사람이 있다. 어떤 것이 셋인가? 희망이 없는 사람과 희망을 가진 사람과 더 이상 희망을 갖지 않는 사람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자가 희망이 없는 사람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자는 계행이 나쁘고 사악한 성품을 지녔고 불결하고 의심하는 습관을 가졌고 비밀리에 행하고 사문이 아니면서 사문이라 자처하고 범행을 닦지 않으면서 범행을 닦는다고 떠벌리며 안이 썩었고 번뇌가 흐르며 청정하지 않다. 그가 '어떤 특정한 비구가 번뇌들을 부수어 번뇌가 없는 심해탈(心解脫)과 혜해탈(慧解脫)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실답게 알았기 때문에 실현한 뒤 구족하여 머문다.'라는 소식을 들으면 '나는 언제 번뇌들을 부수어 번뇌가 없는 심해탈(心解脫)과 혜해탈(慧解脫)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실답게 알았기 때문에 실현한 뒤 구족하여 머물까?'라는 생각을 아예 내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희망이 없는 사람이라 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자가 희망을 가진 사람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자는 계를 지니고 선한 성품을 지닌다. 그는 '어떤 비구가 번뇌들을 부수어 번뇌가 없는 심해탈(心解脫)과 혜해탈(慧解脫)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실답게 알았기 때문에 실현한 뒤 구족하여 머문다.'라는 소식을 들으면 '나는 언제 번뇌들을 부수어 번뇌가 없는 심해탈(心解脫)과 혜해탈(慧解脫)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실답게 알았기 때문에 실현한 뒤 구족하여 머물까?'라는 생각을 한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희망을 가진 사람이라 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자가 더 이상 희망을 갖지 않는 사람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번뇌 다한 비구가 있다. 그는 '어떤 비구가 번뇌들을 부수어 번뇌가 없는 심해탈(心解脫)과 혜해탈(慧解脫)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실답게 알았기 때문에 실현한 뒤 구족하여 머문다.'라는 소식을 들으면 '나는 언제 번뇌들을 부수어 번뇌가 없는 심해탈(心解脫)과 혜해탈(慧解脫)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실답게 알았기 때문에 실현한 뒤 구족하여 머물까?'라는 생각은 더 이상 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번뇌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던 이전의 희망을 성취했기 때문이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더 이상 희망을 갖지 않는 사람이라 한다.


비구들이여, 비구들 가운데도 이러한 세 부류의 사람이 있다.


● <기억 경(A3:12)>과 <크게 도움 됨 경(A3:24)>은 세 가지를 비교하게 해줍니다.


• 크샤뜨리야 왕이 기억할 곳 - ①태어난 곳, ②왕이 된 곳, ③최고 지도자가 된 곳

• 비구가 기억할 곳 - ①출가한 곳, ②사성제를 꿰뚫어 안 곳, ③아라한 된 곳


• 어떤 사람에게 크게 도움 되는 것 - ①삼보에 귀의한 것, ②사성제를 꿰뚫어 안 것, 

                                   ③아라한된 것


⇒ 삶의 향상의 두 단계 - ①사성제를 꿰뚫어 아는 것, ②아라한 되는 것

                      & ①희망을 가진 사람, ②더 이상 희망을 갖지 않는 사람

 

이때 각각의 세 가지를 재배열하면 「태어난 곳-출가한 곳-귀의한 것, 왕이 된 곳-사성제를 꿰뚫어 안 곳-사성제를 꿰뚫어 안 것, 최고 지도자가 된 곳-아라한 된 곳-아라한 된 것」의 연결 관계를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비구가 출가한 곳과 어떤 사람이 삼보에 귀의한 것은 크샤뜨리야 왕의 태어난 곳과 견주어집니다. 그렇다면 출가 또는 삼보에 귀의하는 것은 불자(佛子)로서의 새로운 태어남과 같다고 할 것입니다.


이어서 왕이 되는 것과 견주어지는 것은 사성제를 꿰뚫는 것입니다. 그리고 최고 지도자가 되는 것은 아라한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라한을 성취하는 것은 완결이므로 논의거리가 아닙니다. 그러나 '사성제를 꿰뚫음'에 대해서는 그 위치가 어디에 해당하는지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관식을 거쳐 왕이 되는 것에 비유되는 의미 있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이때,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아는 것[yathābhūtaṃ pajānāti]」과 「있는 그대로 안 뒤 집착 없이 해탈하는 것[yathābhūtaṃ viditvā anupādāvimutto hoti]」의 용례 분석은 '사성제를 꿰뚫음'이 예류자(預流者)인 것을 알려줍니다.


이런 이해 위에서 <금강석과 같음 경(A3:25)>은 


1) 두 단계의 깨달음을 말해줍니다. 사성제를 꿰뚫은 자로서의 예류자와 번뇌를 소멸한 아라한입니다. 그런 점에서 위의 경전들과 같은 주제의 경입니다. 


2) [예류자] ㅡ 사성제를 꿰뚫음을 [마치 눈을 가진 자가 칠흑 같이 어두운 밤에 번갯불로 형상을 보듯이]라고 비유함으로써 법안(法眼)을 얻음을 말해주는데, 무엇보다도 바른 삼매에 들어있는 제한된 시간 동안의 여실지견(如實知見)이라는 점을 확인해 줍니다.


3) [아라한] ㅡ 심해탈-혜해탈의 실현을 [보석이건 돌이건 금강석으로 부수지 못할 것이 없듯이]라고 비유함으로써 완성된 깨달음을 나타냅니다. 


(*) 대승불교의 금강(金剛) 즉 금강경 등에서 쓰이는 금강의 근거가 되는 경전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또한, <희망 없음 경(A3:13)>은 희망을 가진 사람과 더 이상 희망을 갖지 않는 사람의 비유로써 이러한 깨달음의 과정을 다시 설명해 주는 것입니다.


● 그러면 부처님은 왜 사쌍(四雙)의 성자(聖者) 가운데 예류자(預流者)와 아라한(阿羅漢)만을 언급하는 것입니까? 예류자가 가지는 두 가지 특징을 통해 이해해 보았습니다.


• 특징1. 예류자 - 대부분의 괴로움은 멸진-해소되어 남아있는 괴로움은 아주 적음


<수미산 경(S56:49)>은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산의 왕 수미산 위에 강낭콩만한 자갈 일곱 개를 놓는다 하자. 비구들이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어떤 것이 더 많은가? 일곱 개의 강낭콩만한 자갈인가, 아니면 산의 왕 수미산인가?」라는 비유를 통해 견해를 구족하고 관통을 갖춘 성스러운 제자 즉 예류자에게는 대부분의 괴로움이 멸진-해소되어 남아있는 괴로움은 아주 적다고 말합니다. 예류자의 삶이 얼마나 행복[불만족의 해소]인지에 대한 설명입니다. 진리 상윳따의 이어지는 11개의 경[S56:50~60]은 비유를 달리하면서 동일한 내용을 설하고 있는데, 예류자의 경지에 대한 강조라고 할 것입니다. 또한, 관통 상윳따(S13)도 동일한 내용을 다른 비유로써 설명하는데, 11개 경전 중 10개[S13:1~10]은 「법의 관통은 이처럼 큰 이익이 있고, 법의 눈을 얻음은 이처럼 큰 이익이 있다.」고 합니다(*). 


(*) 이어지는 1개의 경전[S13:11]은 「견해를 구족한 자에게는 이처럼 큰 성취가 있고, 이처럼 큰 실다운 지혜가 있다.」라고 하는데, 이것은 예류자이기 보다는 예류자에게 기대되는 이후의 과정을 포괄하여 지칭한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실다운 지혜[abhiñña]는 예류자보다 더 높은 경지의 성취에 해당하는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 특징2. 예류자 - 깨달음이 보장된 자리


손톱 끝 경(S13:1)~산의 비유 경2(S13:10), 수미산 경1 (S56:49), 수미산 경2(S56:50), 손톱 경(S56:51)~산의 비유 경2(S56:60)는 


evameva kho, bhikkhave, ariyasāvakassa diṭṭhisampannassa puggalassa abhisametāvino etadeva bahutaraṃ dukkhaṃ yadidaṃ parikkhīṇaṃ pariyādiṇṇaṃ; appamattakaṃ avasiṭṭhaṃ. neva satimaṃ kalaṃ upeti na sahassimaṃ kalaṃ upeti na satasahassimaṃ kalaṃ upeti purimaṃ dukkhakkhandhaṃ parikkhīṇaṃ pariyādiṇṇaṃ upanidhāya yadidaṃ sattakkhattuṃparamatā.


비구들이여, 그와 같이 견해를 구족하고 관통을 갖춘 성스러운 제자에게는 괴로움이 대부분 멸진하고 해소되어 남아있는 괴로움은 아주 적다. 그에게 남아있는 괴로움은 멸진하고 해소된 이전의 괴로움의 무더기에 비하면 백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고 천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고 십만 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나니, 이제 최대 일곱 생만이 더 남아있다.


고 하고, <인간 경(S15:10)>은 


“yato ca ariyasaccāni, sammappaññāya passati.

dukkhaṃ dukkhasamuppādaṃ, dukkhassa ca atikkamaṃ. ariyaṃ caṭṭhaṅgikaṃ maggaṃ, dukkhūpasamagāminaṃ. 

“sa sattakkhattuṃparamaṃ, sandhāvitvāna puggalo. 

dukkhassantakaro hoti, sabbasaṃyojanakkhayā”ti.


괴로움, 괴로움의 일어남, 괴로움의 극복 그리고 괴로움의 가라앉음으로 이끄는 여덟 요소로 구성된 성스러운 도라는 성스러운 진리를 바른 지혜로 보기 때문에

그 사람은 최대한 일곱 번만 더 윤회한 뒤에

모든 족쇄를 부수고 괴로움의 끝을 만들 것이다.


라고 하여, 예류자에게는 최대 일곱 번의 태어남만이 남아 있다고 알려줍니다. 즉 일곱 번의 윤회하는 삶 이내에 아라한을 성취하여 여덟 번 다시 태어나는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류자를 성취하였다는 것은 이렇게 아라한을 보장 받았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일래자(一來者)나 불환자(不還者)에 비해 예류자(預流者)를 특히 더 강조하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불교는 두 단계의 깨달음을 말합니다. 일단 예류자까지만 도달하면 아라한은 보장되기 때문입니다. 


<좋은 가문의 아들 경(S56:3)>은


"비구들이여, 과거에 바르게 집에서 나와 출가한 좋은 가문의 아들들은 모두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四聖諦]를 있는 그대로 관통하기 위해서 출가하였다.


비구들이여, 미래에 바르게 집에서 나와 출가할 좋은 가문의 아들들은 모두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있는 그대로 관통하기 위해서 출가할 것이다.


비구들이여, 현재에 바르게 집에서 나와 출가하는 좋은 가문의 아들들은 모두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있는 그대로 관통하기 위해서 출가한다."


라고 하여 출가의 목적을 예류자의 성취로 제시하는데, <좋은 가문의 아들 경2(S56:4)>, <사문-바라문 경1(S56:5)>, <사문-바라문 경2(S56:6)> 등에서도 유사하게 설명됩니다. 


어떻게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예류자가 되면 아라한은 보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라한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우선 예류자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 이후는 퇴보하지 않음에 의해 보장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불교는 깨달음을 두 단계로 제시하는 것입니다.


※ 1단계의 깨달음 : 예류자 – 해탈된 삶을 향해 벗어남의 길에 오른 수행자 → 여실지견(如實知見)


   2단계의 깨달음 : 아라한 – 해탈된 삶의 실현 ← 사마타-위빳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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